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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의학 | [다니엘 한의원의 체질칼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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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호동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9-19 13:43 조회2,5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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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벗어나 삶에 만족하는 자세가 건강 유지의 첫 길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언제가부터 조금은 궁금하면서도 익숙한 제목. 그 뉘앙스가 강열하고 멋지고 시원시원하다. 세상과 세속을 초월하는 어떤 힘이 느껴지기도 하고. 저 소리의 출처가 어디던가 궁금증이 있었음이 틀림없는데  최근에 이것이 책의 제목임을 알게 되었다. 30대 초반의 세 여자 이야기 (대학 동창생들이다). 작가는 세명의 서른이 막 지난 인생에 온갖 인생의 풍파와 桎梏(질곡)을 다 담아 놓았다. 세상 다 산 사람들처럼. 서른의 인생이 마치 여든 인생의 무게보다 더 나가는 것처럼. 인생이 저리도 짧은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필자가 느낀 소견은 이렇다. 세 여자의 삶을 통해 보는 인간 세계는 不貞과 폭력, 불신과 몰이해, 절망 그러면서도 인간을 향한 그리움과 갈등 해소를 향한 몸부림. 한 여자는 두 번의 자살 시도 끝에, 남편을 향한 극한의 분노와 피해의식, 몸과 정신의 피폐 속에  마침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이혼하지 않은 남편과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자식 둘을 남겨놓고. 또 한 여자는 한 개인으로서의 자기 실현과 가정 주부로서의 현실 사이의 부단한 투쟁 속에서 두 살짜리 아이를 사고로 잃고 부부간의 신뢰가 금이 간 후 곧 이어 이혼한 후 혼자 살아간다. 연이은 방황, 고독, 자존감에 상처를 입고 싶어 하지 않은 두려움 속에서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과 시도, 그러면서 여전한 아픔. 그리고 세 번째 여자는 사회적 지위와 부를 지니고 있는 남편의 不貞(부정)을 목격한 이후에도 이혼하지 않고 살아간다. 이혼보다는 안락함이란 방패를 택한 것. 그 결과는 더 이상 쏟아 낼 눈물도 없을 정도로 쓰다- 자기 모멸감과 표출하지 않는 증오심. 그러면서 한을 품은 체, 복수의 날을 기다린다. 그 날이 언제던가. 자신의 남편이 늙어 반신불수가 될 때다. 그 때 너를 부셔버릴 것이다.

답이 없다.  그 상처, 눈물, 아픔, 망가짐, 고독, 회한, 욕정, 연이은 방황, 죽음, 포기….그런데 책의 말미에서 작가는 인간의 의지를 그리고 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세상 무슨 일이 일어나고, 세상 누가 무어라고 해도 너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모든 비난, 부조리, 상처 그리고 고통에 초연하여 표연이 그리고 獨也靑靑 (독야청청)하라.  

세 여자의 고통의 시작은 모두 남편에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남편은 모두가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권위적이다. 더 나아가 폭력적이다. 더 나아가 부도덕하다. 한 남자는 결혼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여자와 부정한 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자책과 더불어 실수라며 용서을 구한다. 그러면서 세상 성공과 함께 권위적, 자기 중심적이 되고 자기 아내를 철저히 무시하며 다른 여자와 스스럼 없이 만난다. 그러면서 말한다. “난, 선은 넘지 안않어.”  또 다른 남자는 아내의 출산 이후 대놓고 부정을 저지른다. 분노로 맞선 자신의 아내에게 하는 말, “니가 원하면 너도 그리해.” 그리고 나머지 한 남편은 외도는 하지 않지만 아내의 몸과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수치심을 남긴다.
작가는 여자이기에 이렇게 그린 것일까? 세상 모든 여자(아내)는 피해자요 세상 모든 남자 (남편)은 가해자라고 말하는 것일까. 필자의 작가의 의도에 대한 이해가 옳든 틀리든, 그 책은 한 인간의 고통의 뿌리가 또 다른 인간에게 있고 그 해결점을 찾고자 인간 사이에서 부단히 애를 쓰지만 해답은 없다는 것이다. 있다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 연약하고 방황하고 있는 인생에게 내 놓은 해답,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기에는 우리 인간에 놓여 있는 실존의 늪이… 너무나 깊은 것은 아닐까. 미워하고 분노하고, 고통하고, 자책하고, 속이고, 자살하고, 저주하고, 울고, 아파하고, 모른 척 하고, 술 마시고, 간통하고, 너무나 쉽게 툭 욕정에 내 맡기고 그리고 나서는 없던 것처럼 여기고…필자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책의 표지에서 처음 갖게 됬던 어떤 활력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오히려 인간의 무력감으로 바뀐 것 같음을 느낀다. 증상은 잘 짚은 것 같은데, 진단이 잘못 된 것은 아닐까. 그 아프고 상실된 인생에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무소의 뿔처럼 당차게 분노하고, 술 마시고, 육신이 원하면 잠시잠시 쾌락을 좇고, 자신의 일을 찾고, 자존감을 잃지 않고, 그리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여기고 당당히 가라는 것일까. 그런데 어이 할 것인가, 이것이 인간의 실존이라면. 그러나 분명 이는 인간의 본질은 아니다!

지금부터는 제법 오래됬지만 어느 한 날부터, 인간 실존의 명제를 가지고 그로부터 수없는 나날을 고민한 적이 있다. 인간 앞에 놓인 實存과 本質. 고독과 허무와 무의미와 방탕의 의미를 알고자 애를 쓰면서 그러한 모든 것이 인간에게서 떨어질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실존임을 알게 되었다. 그 때, 너무나 흠모했던 한국의 K씨와 독일의 H씨의 글들이 인간 실존의 한계와 모순을 해결해 주는 끈이요 돌파구로 확신했다. 그러나 그것은 錯視(착시). 인간 실존을 좀 더 명확하고도 처절하게 그린 글들을 찾아 청계천 고서점을 들락거린 시간들. 그럴 때마다 더 깊이 찾아드는 인간 한계 앞에 숨도 못 쉴 정도의 나날들. 그로부터 몇 년, 아니 더 많은 시간 후에 마침내, 인간탐구의 명제를 바꾸었다. 그것은, 인간 실존의 파헤침에서 인간 존재를 규명하고자 하는 ‘본질’이 무엇이냐였다. 실존보다는 본질이 앞선다는 것이다! (필자가 알기로 20세기 사상계의 흐름은 실존이 본질보다 앞선다.)

철학은 원래 인간 본질을 궁구하는 학문이다. 문학도 아마 그러하리라. 그래서 위대하고 아름다운 방법론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지나가는 세월 속에서 이런 질문에 부딪치게 되었다.  문학과 철학은 누가 하는 것이던가. 인간 한계 앞에서 똑같이 실수하고 똑같이 아파하고 똑같이 신음하는 또 다른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던가. 무엇보다 산업혁명 이후 소위 세상에 부가 축적되고 광란같던 전쟁과 더불어 인간 사회에 여러 병폐가 산출되면서 고독, 불안, 두려움, 죄의식, 절망이라는 인간 문제가 대두되고 그 때부터 문학 (그리고 철학)의 흐름이 바뀌고 말았다. 본질보다는 실존이 우선한다. 실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기에 문학과 철학은, 필자가 느끼기로는 20세기부터 인간 본질을 (더이상) 규명하지 않으려 하고 또한 못한다. 그 흠모했던K와 H의 실제 삶에서 사르트르가 떠벌린 ‘구토’를 느끼고 말았다. 인간 최고봉이라고 여겼던 문학과 철학에서. 그 무엇보다도 문학과 철학은 不正과 不貞을 심판하지 않는다. 갈수록 더.

차라리 나는, 재물에서 가난하지만 가난하지 않았고, 저 산만큼의 책과 시간을 놓고 인생 전체를 쏟아 부어 道를 찾고자 부단 정진했지만 끝까지 세속의 감투에 연연하지 않았고 더불어 겸양을 유지했으며, 不貞과 不正이 만연한 시대에 타협하지 않고 義를 찾고자 몸부리쳤던 우리 한국 사람, 이제마에게서 그나마 어떤 본질을 향한 탐구를 보게 된다. 그는 최소한 선과 악을 분간했다. 그리고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임을 분명히 설파했다.

이 세상은 이제 더 이상 선과 악을 나누지 않는 것 같다. 선을 선이라 하지 않고 악을 악이라 하지 않는 풍조, 죄를 지어도 벌하지 않는 세태 속에서 이제마는 선과 악을 분명히 분간했다! 교긍벌과, 탈치라절(교만하고 잘난체하고 뽐내고 과장하고, 거짓말하고 게으르고 남의 것 빼앗고, 사치하고)은 악이다. 酒色財權(주색재권)은 사람을 가두는 네 담벼락이요 감옥이다. 일신의 壽夭 (수요: 요절과 장수), 一家의 禍福(화복)이 이에 달려 있다. “술 취하여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지 마라. 음란하게 살지 말고 절제하라. 재물을 쌓지 말고 나누라. 권세로 남을 억압하거나 치부의 수단으로 삼지 말고 남을 섬기라.” 狂童(광동-이성보다는 감각으로 사는 인간)은 淫女(음녀-육신의 욕정만을 탐하는 인간)를 사랑하고 음녀는 광동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패망한다. 천하의 모든 악은 妬賢嫉能(투현질능-어질고 재능있는 자와 비교, 시기, 질투)이요 천하의 선은 好賢樂善이다 (사람을 사랑하고 선을 즐기고 따르는). (동의수세보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 그려진 인간사회에는 광동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광녀들의 모습 역시 있다. 술마시고, 통간하고, 욕정에 몸 맡기고, 그러면서 자존감을 지키려하고, 그리고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기 일을 하고 성공하고자 하는 광동들과 광녀들. 그 책이 한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대표적인 작가들 중의 한 사람의 시각이라면, 한국 사회 그리고 만천하는 광동들과 광녀들의 세상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난 차라리 이 시대에 이제마가 還生 (환생)이라도 하기를 바랄 때가 있다. 왜냐하면 최소한 그는 무엇이 선이고 악이며, 누가 광동이고 광녀인지 분명히 짚어 주기 때문이다. 거기에 해결의 시작과 실마리가 있다. 거기에 치유가 있다. 그런데 문학은 그리 안한다. 철학도 그리 안한다. 선을 더 이상 선이라 하지 않고 악을 선으로 선을 악으로 둔갑시키거나 단죄하지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필자같은 사람은, 아름다운 시 한귀절과 잘 다듬어진 인간 내면의 묘사의 글을 좋아하면서도, 비록 문학이나 철학을 잘 알지 못하지만, 거기에 더 이상 의지하지 않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그  답은, 우리에게는 하늘에 대한 두려움과 영원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문학과 철학은 고상할 지 모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리 또 생각하고 생각해도, 인간 실존의 한계를 극복하는 힐링은 되지 못한다. 누가 종교를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산물이라고 했을까. 누가 종교를 연약한 인간이 의지하는 아편 정도일 뿐이라고 하는가. 그렇게 아파하고 그렇게 실수하고 그렇게 고통하고 그렇게 자책하고 그러다가 종시에는 바람처럼 사라지고 미물처럼 으깨어지는 존재에 불과할 뿐인 인간에 또 다른 희망이 어디에 있다고…

권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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