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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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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창섭 작성일17-07-20 09:17 조회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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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의 목표는 과거라는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머리를 이쪽저쪽으로 돌려, 조상들이 상상할 수 없었거나 우리가 상상하기를 원치 않았던 가능성을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를 지금 여기로 이끈 우연한 사건들의 연속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생각과 꿈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깨닫고, 다른 생각과 다른 꿈을 품을 수 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명분을 밝히고 성리학적 통치 규범(상하 관계 유지)을 정착시키기 위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역사서의 편찬에 힘썼다.  

 

  국가는 왜 실록을 편찬했을까? 먼저 역사를 정리하여 기록해 놓는다는 의미가 있었다. 유교는 역사 기록을 중요시하였다. 역대 왕들의 기록을 정리한다는 차원에서 실록을 편찬하였다. 그러나 실록은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매일 기록하는 것은 그 자체로 왕을 제약할 수 있었다. 실록을 만든 또 다른 이유는 왕조사, 즉 정사(정확한 사실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전 왕조의 역사를 공식적으로 정리하는 일은 새로운 통치자 측에서 전 왕조에 대해 관용을 보이는 태도였다. 뿐만 아니라 새 왕조의 정통성을 획득하는 효과도 있었다. 또한 전 왕조에 대해 충성심을 간직한 신하를 새 왕조로 흡인(빨아들이거나 끌어당김)할 수 있었다. 

 

  신하들은 훌륭한 역사서의 편찬을 충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마치 효성스런 아들이 돌아가신 부모의 전기를 쓰면서 부모를 생각하듯이 충신들은 자신의 왕조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역사를 편찬했다. 왕조사가 편찬되기 위해서는 전 왕조의 사료가 있어야 했다. 이를 위해 각 왕조는 자신의 왕대별 역사 기록인 실록을 만들었던 것이다. 실록은 다음 왕조로 넘겨져서 왕조사로 정리되고 정사로 불렸다. 이 점에서 실록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역사서인 동시에 정사를 위한 자료집이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실록의 편찬을 매우 중요시하고, 이를 국가 차원에서 계속적으로 추진하였다. 한 왕대의 역사를 후대에 남기기 위한 실록의 편찬은 「태조실록」부터 「철종실록」까지 25임금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방대한 역사서이다. 조선 시대를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다방면에서 기록한 실록은 역사적 진실성과 신빙성이 매우 높다. 「조선왕조실록」은 모두 1,893권 888책 속에 한문 글자 수 5,300여만 자를 담고 있다. 이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필요한 가장 귀중한 자료로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고, 단 4부를 찍기 위하여 금속활자를 사용하였다. 또한 다른 실록들(중국, 일본, 베트남 실록)은 모두 원본이 없어지고 사본만 남아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은 원본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1997년 유네스코에서도 그 중요성을 인정하여 세계 기록 문화유산으로 등록하였다.

 

  실록 편찬의 중요 자료는 사관(역사를 기록하던 관리)이 기록한 사초(사관이 역사적 사실을 기록해 둔 책),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에서 작성한 일지인 시정기 등이었다. 춘추관에서 일하는 사관은 예문관 ․ 승정원 ․ 대간 등 다른 관청 소속의 관료들이 겸임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예문관의 봉교(정7품) 2명, 대교(정8품) 2명, 검열(정9품) 4명이 사관 업무를 전담하는 전임 사관이었으며 사관의 직명을 좁은 의미로 한정할 때에는 이들 예문관의 관리들을 지칭하였다. 이들 전임 사관들은 번갈아 가며 궁중에 들어가 왕을 알현(지체 높은 사람을 찾아 뵘)하고 조참(정기적으로 시행되는 조회), 경연, 상참(요직에 있는 관리가 왕을 뵙는 약식 조회), 중신 회의 등에 배석해서 사초를 작성하였다. 비록 중신이라 할지라도 사관이 없는 상태에서 임금과의 독대는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사관은 비록 품계는 낮지만 조정의 각종 회의에 참석하여 왕과 신하들의 국사에 관한 논의 및 처리 과정 등을 숨김없이 기록하는 권한을 지녔으며, 사초는 사관의 자택에 비밀리에 보관하였다.

 

  한 국왕이 죽고 다음 국왕 때 전왕의 실록을 편찬할 때에는 춘추관을 중심으로 실록청을 설치하고 개인이 보관하고 있던 사초들을 수합하였다. 사초와 시정기 등을 기본 자료로 실록을 편찬하였고, 완성된 실록은 사관이 아니면 왕이라도 직접 열람할 수 없게 하였다. 즉 실록 편찬에 있어서 사관이라는 관직의 독립과 내용 기술에 대한 비밀이 보장되었던 것이다.

 

  인쇄까지 마친 실록은 사고(역사에 관한 기록이나 중요한 서적을 보관하던 정부의 서고)에 봉안하였다. 그러고 나서 실록 편찬에 사용한 모든 자료는 보안관계상 없애 버렸다. 중국의 경우에는 실록에 이용한 자료를 소각했으나 조선은 실록에 사용한 자료들을 태우지 않고 물로 빨았다. 이를 세초라고 한다. 세초를 한 이유는 기밀을 유지하고 종이를 재생하여 쓰기 위해서다. 

 

   실록은 처음에 2부를 만들어 춘추관과 충주 사고에 보관하였다가 세종 때부터 4부를 만들어 춘추관 ․ 충주 ․ 전주 ․ 성주의 사고에 보존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4대 사고 중 춘추관 ․ 충주 ․ 성주의 사고가 소실되면서 선조 때 전주 사고본을 토대로 다시 작성하여 춘추관 ․ 오대산 ․ 태백산 ․ 마니산 ․ 적상산 사고에 보존하였다. 일제 강점기 일본의 경성 제국 대학으로 이관하였던 마니산 ․ 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광복 후 서울대학교와 정부 기록 보존소에 소장되어 있다. 오대산 사고의 실록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가 간토(관동) 대지진(1923년)으로 소실되어 현재 27권만 전하고 있고, 적상산 사고의 실록은 구황궁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가 6 ․ 25 전쟁 당시 북한이 가져가 현재 김일성 종합 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1927년부터 편찬에 착수하여 1934년 편찬을 완료하고, 1935년 간행했다. 이 두 실록은 일제에 의해 편찬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실록은 후손들에게 외면당해 왔다. 그들에 대한 기록인 실록 또한 철저하게 외면당해 왔다는 점에서 비운의 실록이다.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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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1 : 조선왕조실록 - 조선 태조부터 철종까지의 사실을 각 왕별로 기록한 편년체(연대순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형식) 역사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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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2 : 세검정 - 실록이 완성되면 실록에 사용된 자료는 모두 세초했다. 세초하던 장소  는 세검정 부근의 차일암이었다. 제지공장인 조지서가 세검정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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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3 : 인조무인사초 – 사관이 작성하여 집안에 보관했던 가장사초의 원본. 가장사초에는 당대 정치현안과 고위관료, 국왕에 대한 신랄한 평가가 담겨 있었다. 이 점에서 가장사초는 조선왕조 내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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