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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독립 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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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창섭 작성일17-08-17 08:54 조회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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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침략과 급진적인 갑오․을미개혁의 실시로 대부분의 국민 사이에 반일 정서가 확산되었다. 또, 고종은 왕권을 제약하려는 개화 세력의 개혁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을미사변(1895, 명성 황후<민비>시해 사건) 후에는 신변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다. 이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고(1896, 아관 파천), 개화파 정부는 무너졌다. 이후 고종은 단발령 철회, 의병 해산 권고 조치 등을 단행하였다.

  아관 파천으로 국가의 자주성은 손상되었고, 광산, 산림, 등에 대한 열강의 이권 침탈도 심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재필 등은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한글과 영문판으로 된 독립신문은 국민을 계몽하고, 자주독립과 자유 민권 사상을 전파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어 서재필은 독립문 건립을 명분으로 하여 근대적 개혁 사상을 지닌 인사들과 함께 독립 협회를 창립하였다(1896). 창립 초기에는 현직 관료도 광범위하게 참여하였다.

  독립 협회는 의사 결정 과정에 다수결의 원칙 등 민주적인 운영 방식을 채택하였다. 또한 독립문과 독립관 건립에 쓰일 보조금을 내고 가입 의사를 밝히면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 점차 학생, 교사, 하급 군인 등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국민적인 단체로 성장해 나갔다. 독립 협회는 모금을 통해 청의 사신이 사용했던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조하였으며, 청의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 터에 독립문을 건립하였다.

  독립 협회는 강연회와 토론회 등을 통하여 민중에게 근대적 지식과 국권·민권 사상을    고취시켜, 광범한 사회 계층의 지지를 받는 단체로 발전하였다. 또, 독립 협회는 자주 국권, 자유 민권 등을 달성하려는 정치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국내 산업 진흥과 상권 보호를 위한 다양한 방안을 제시하고, 외국의 이권 탈취 및 경제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또한, 만민 공동회와 관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헌의 6조를 결의하였다.

   

  관민 공동회의 헌의6조는 

1.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관·민이 힘을 합하여 전제 황권을 견고하게 할 것. 

2. 외국과의 이권에 관한 조약은 각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 날인하여 시행할 것. 

3. 국가 재정은 탁지부에서 전관하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포할 것. 

4. 중대 범죄를 공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 것. 

5. 칙임관을 임명할 때에는 정부의 자문을 받아 다수의 의견에 따를 것. 

6. 정해진 규정을 실천할 것.                                                

<독립신문>

 

  1890년대 후반에 독립 협회에서는 독립신문의 논설을 통해 여성을 억압하는 혼인 제도의 개혁, 애정과 평등한 인격에 기반을 둔 부부 중심의 가족 제도, 여성의 교육권과 사회적 활동의 필요성 등을 주장하였다. 또, 1898년에는 서울의 북촌 부인들을 중심으로 찬양회가 조직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여권 운동을 전개하였다. 찬양회는 독립신문에 여성의 참정권, 직업권, 교육권을 주장하는 '여성 통문'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독립 협회의 활동은 의회의 설립과 서구식 입헌 군주제 실현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보수 세력과 대립하였다. 독립 협회는 보수 세력이 동원한 황국 협회(전국의 보부상으로 조직된 단체)의 방해를 받았고, 결국 3년 만에 해산되고 말았다.

'정부에서 벼슬하는 사람은 임금의 신하이며 백성의 종이다. 종이 상전의 경계와 사정을 자세히 알아야 그 상전을 잘 섬길 터인데, 조선은 거꾸로 되어 백성이 정부 관리의 종이 되었으니, 백성은 죽도록 일을 하여 돈을 벌어 관리들에게 주면서 상전 노릇하여 달라 하니 어찌 우습지 않겠는가.'             (자주 의식의 필요성 강조)  -독립신문(1896. 11. 21)

'누구든지 남의 물건과 권리를 뺏으려고 하는데, 한두 번이고 빼앗아 본 사람과 나라는 언제든지 욕심이 자라 그칠 날이 없다. 이런 무리한 일을 못하게 하는 방책은 아무리 저 사람이 뺏으려 하더라도 내가 뺏기지 아니하면 그 사람이 무리한 일을 못하는 법이다. …… 도적들이 가진 병장기의 힘을 헤아려 도적의 병장기(예전에, 병사들이 쓰던 온갖 무기)보다 더 편리한 병장기를 준비해 두어야 설령 도적이 오더라도 방어를 할 터이요, 또 도적이 그 집에 이로운 병장기가 있고 사람이 많이 있는 줄 알면 가지를 아니할 터이다.'           

(민권 의식의 중요성 강조) -독립신문(1897. 8. 12)

독립 협회는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주권을 수호하여 자주독립을 이루고자 하였으며, 국민을 계몽하고 자유 민권 사상을 보급하여 자강 개혁을 달성하려 하였다. 독립 협회는 민중의 참여를 이끌어 내어 갑신정변(1884)과 갑오개혁(1894)의 한계를 극복해 나갔다.

그러나 독립 협회의 주도 세력은 러시아를 견제하는 것에는 적극적이었지만 미국, 영국, 일본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외세에 대한 편중된 인식을 가졌다. 또 미국, 일본 등 제국주의 열강과 교류하면서 근대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역점을 두어 그들의 침략 의도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녔다.

 

<사진 설명>

* 사진 1 : 독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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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2 :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 청일전쟁 이후인 1895년에 허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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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3 : 완공된 직후(1897년 11월)의 독립문. 서재필은 일본식 정원 같은 독립공원의 조성을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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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4 : 독립문 - 민족의 자주 독립과 자강의 의지를 담아 세운 기념물이다. 독립문 앞에 세워져 있는 기둥은 영은문의 주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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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5 : 이완용의 글씨가 새겨진 독립문. 이완용은 독립협회 부위원장 자격으로 독립문 건설에 100원(당시 소 한 마리의 가격은 5원. 지금 소 한 마리의 가격은 1,700만원. 그러므로 대략 현재 3억 4천만 원 쯤 됨)을 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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