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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항일 의병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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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창섭 작성일17-08-28 09:28 조회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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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5, 6명이 내 앞에 왔는데 모두 18~26세 정도의 젊은이들이었다. …… 하나는 한국 정규군의 낡은 제복을 아직도 입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군복 바지를 입고, 둘은 얇고 누덕누덕한 한복을 입고 있었다. …… 오전에 벌어진 전투를 지휘한 장교인 그는 자기들의 앞날이 결코 밝지는 않다는 것을 시인했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겠지요. 그렇게 되라지요. (그러나) 일본의 노예로 살기보다는 자유로운 몸으로 죽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라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 매켄지(캐나다 인, 영국 신문사에서 기자를 지낸 언론인), “한국의 독립운동”

 

  일제의 침략에 맞선 강력한 저항이 의병 투쟁으로 나타났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서 비롯된 의병 투쟁은 명성 황후(고종의 부인) 시해 사건과 단발령(상투 풍속을 없애고 머리를 짧게 깎도록 한 명령) 실시를 계기로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1895. 을미의병). 을미의병은 제천의 유인석, 춘천의 이소응 등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양반 유생들이 주도하였고, 농민과 동학 농민군의 잔여 세력이 가담하였다. 의병들은 지방 관청이나 일본군을 공격하고 친일 관리와 일본인을 처단하였다.

 

  그러나 양반 유생 의병장들의 신분 차별 의식 때문에 전력이 약화되었다. 또 아관파천(고종의 러시아 공사관으로의 피신)으로 친일 내각이 무너지고, 고종이 단발을 자유의사에 맡기겠다고 발표하면서 의병의 해산을 권유하자 대부분 활동을 중단하였다. 하지만 의병 투쟁에 참여하였던 농민층은 의병 부대가 해산된 이후에도 활빈당 등을 조직하여 반봉건 ․ 반침략 투쟁을 계속 전개하였다. 이들은 을사늑약(을사조약.1905) 체결을 전후하여 다시 의병 부대에 합류하였다.

 

  러 ․ 일 전쟁(1904)을 기점으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이에 맞서 수많은 의병이 항일 투쟁에 나섰다(1905. 을사의병). 이때에는 양반 유생(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뿐만 아니라 평민 출신의 의병장도 등장하였다.

 

  전직 관리였던 민종식은 한때 천여 명에 이르는 의병을 모아 충남 홍주성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세한 장비를 앞세운 일본군의 공격에 패하여 물러났다. 최익현은 임병찬 등과 함께 전북 태인에서 봉기하여 일대를 장악해 나갔다. 그는 일본군과 지방 관군에 맞서 싸우다 순창에서 체포되어 쓰시마 섬에 끌려갔다가 그곳에서 순국하였다. 평민 의병장으로 널리 알려진 신돌석은 경상북도와 강원도 경계의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일본군과 유격전을 펼치며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일제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뒤이어 한 ․ 일신협약을 체결하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에 서울과 지방의 해산 군인 중 일부가 무기를 지닌 채 의병에 대거 가담하였다. 이로써 의병 조직의 전열이 재정비되고 전력이 강화되었다(1907. 정미의병). 정미의병은 유생과 농민, 해산 군인뿐 아니라 노동자, 상인, 교사와 학생 등 전 계층이 참여한 전국적인 항일 구국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전국의 의병 부대들은 13도 연합 의병 부대(13도 창의군)를 결성하고 경기 양주에 집결하였다. 의병 1만여 명은 총대장으로 이인영, 군사장으로 허위를 선출하고 서울 진공 작전을 시도하였다. 이에 앞서 이인영은 외국 영사관에 연락하여 의병 부대를 국제 공법상의 교전 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1908년 1월, 허위의 선봉대 300여 명이 동대문 밖 근처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후속 부대가 도착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후퇴하고 말았다.

 

  서울 진공 작전이 실패한 이후 의병 부대들은 전국 각지에서 지속적으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이강년, 임진강 방면에서 허위, 강원도 지역에서 민긍호, 함경도 지역에서 홍범도 등이 이끄는 부대가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 전국의 의병 부대들은 소규모 부대로 활동하며 유격 전술을 써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1909년 무렵 대부분 지역에서 의병 투쟁이 잦아들었지만, 전라도 지역에서는 여전히 항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전기홍, 안규홍, 심수택 등이 이끄는 의병 부대들은 유격전을 펼치며 일본군에 맞섰다. 의병의 끈질긴 저항에 부딪힌 일제는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호남 의병을 무자비하게 공격한 ‘남한 대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2개월 동안 100명이 넘는 의병장과 수천 명의 의병이 체포되거나 피살되었다. 

 

  살아남은 의병들은 더 이상 국내에서 활동하기가 어렵게 되자 만주나 연해주로 이동하여 장기 항전에 대비하였다. 일부 의병들은 국내에 남아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1910년대 초반까지 항전을 이어 갔다.

 

  항일 의병 운동은 일제의 침략에 격렬하게 저항하며 직접 부딪쳐 싸운 국권 수호 운동이었다. 이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오적들을 벨 것을 청하는 상소

                                                                - 최익현(1833~1906)

 

  저 왜적들은 조금 강성함을 믿고 기세가 교만하여 이웃 나라를 협박하는 것을 능사로 하며, 맹약을 파괴하는 것을 장기로 삼아 이웃의 의리와 각국의 공론도 돌보지 않고 오로지 나라를 빼앗으려는 방자한 짓을 꺼리지 않습니다. (…) 마땅히 먼저 박제순 이하 다섯 역적의 머리를 베어 나라 팔아넘긴 죄를 밝히고, 외부대신을 교체하여 거짓 맹약의 문서를 없애 버리도록 하고, 또 각국 공관에 급히 연락하여 모두 모은 뒤, 일본이 제 강함을 믿고 우리를 겁박한 죄를 성토해야 합니다.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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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1 : 한말 의병 전쟁 당시의 의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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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2 : 의병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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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3 : 체포된 호남 의병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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