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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학교를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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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창섭 작성일17-12-06 16:36 조회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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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사이좋게 오늘도 공부 잘하자.

김메리 작사, 작곡(1948년)

 

우리나라는 철기 시대(기원전 4 세기 경)부터 한자를 도입하여 사용해 왔지만, 이두(단어 같은 것은 한자로 표기하고, 어조사나 한자로 나타낼 수 없었던 우리말 어휘 등은 한자를 빌려서 표현한 것)나 향찰(한자의 뜻과 소리를 빌려 우리말을 적는 방식. 삼국유사와 균여전에 실린 향가는 모두 향찰로 쓰였다.)을 만들어 한문의 토착화를 위한 독자적 노력도 기울였다.

 

한자의 보급과 함께 교육 기관이 설립되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 수도에 태학을 세워(372)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가르치고, 지방에는 427년 고구려 평양 천도 이후 설립한 사립 교육 기관인 경당을 세워 청소년에게 한학과 무술(활쏘기)을 가르쳤다. 경당에 대한 기록은 우리 측 문헌에는 없고 중국의 역사서인 「구당서」에 다음의 기록이 남아 있다.

"사람들이 책 읽기를 좋아하며 누추한 시골에서부터 도회지에 이르기까지 큰 집을 짓고 경당이라 하였다. 청소년들이 이곳에서 밤낮으로 글을 읽고 활쏘기를 연습하였다. 이 때 읽는 책에는 「5경」 ․ 「사기」 ․ 「한서」 ․ 「후한서」 ․ 「삼국지」 ․ 「춘추」 ․ 「옥편」 ․ 「자통」 ․ 「자림」등이 있었다. 또 「문선」이 있었는데 이를 가장 중히 여겼다."

 

백제는 5경(유교의 다섯 가지 기본 경전.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 박사(유교 경전)와 의박사(의료), 역박사(천문, 역법) 등을 두어 유교 경전과 기술학 등을 가르쳤다.

 

1934년경에 경주 부근의 석장사터 근처에서 발견된 임신서기석을 보면 신라에서도 청소년들이 유교 경전을 공부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임신서기석에는 이두 형식의 한문이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신년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 하느님 앞에 맹세한다. 만약에 이 서약을 어기면 하느님께 큰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맹세한다. 만일 나라가 편안하지 않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지면 모름지기 충성을 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한 따로 앞서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였다. 즉, 「시경」 ․ 「상서」 ․ 「예기」 ․ 「좌전」을 차례로 습득하기를 맹세하되 3년으로써 하였다"

 

통일 신라에서는 신문왕(681~692) 때 유학 교육 기관인 국학을 설립하고(682) 유교적 교양과 인문학, 산학을 가르침으로써 국가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학문과 기술을 익히게 하였다. 12등급에 해당하는 대사 이하의 하급 귀족에게 입학 자격을 주었다. 그 후, 경덕왕(742~765) 때에는 국학을 태학으로 고치고 박사와 조교를 두어 본격적으로 유학 교육을 시켰다. 필수 과목은 「논어」와 「효경」이었고, 선택 과목은 「시경」 ․ 「서경」 ․ 「역경」 ․ 「좌전」 ․ 「예기」등 5경과 「문선」등이었다. 수업 연한은 9년 이었으나 재주와 가능성이 있으면 9년이 지나도 학업을 계속하게 하였다. 입학 학생은 6두품 출신이 많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충효 일치의 윤리를 강조한 것이었다. 원성왕 때에는 국학의 졸업 시험으로 독서삼품과를 시행하여(788) 성적이 우수한 자에게 관직에 진출할 기회를 주었다.

 

이는 관리 등용의 기준을 유학 공부의 수준에 따라 3등급으로 구분하여 골품보다 실력 본위로 인재를 등용하려는 것이었다. 상품은 「좌전(춘추)」․「예기」․「문선」을 읽고 「논어」․「효경」에 밝은 자를, 중품은 「곡례」․ 「논어」․ 「효경」을 읽은 자를, 그리고 하품은 「곡례」․ 「효경」을 읽은 자를 뽑았다. 이와 같은 독서삼품과는 인문 교양을 시험하여 관리를 등용함으로써 유교 정치 이념을 확립하려는 것과 관계가 있다.

 

골품 제도를 근간으로 하는 신라 사회에서는 진골 귀족의 반발로 성공하기 어려운 제도였다. 골품 제도는 신라의 신분 제도로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으로 나누어져 있다. 왕족은 주로 진골과 성골이고 귀족들은 6두품에서 4두품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3두품에서 1두품까지도 있었지만 이들은 평민화하여 특권 신분으로 구분되지 않게 되었다. 골품 제도는 신라가 연맹 왕국으로 성장할 때 여러 족장 세력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그 세력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신분으로 구분한 것이다. 따라서 법흥왕 시대를 전후로 하여 성립한 것으로 보인다. 각 신분은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길은 물론이고 사회생활에서 장신구나 주거의 크기까지 골품에 의해 규정되어 사회생활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가졌다. 초기에는 성골에서 왕위를 계승했으나 진덕 여왕을 끝으로 성골이 단절되고 태종 무열왕 때부터 진골에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발해에서도 유학 교육을 목적으로 주자감을 설립하여 왕족과 귀족의 자제들에게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이 주자감은 당의 국자감에 해당하는 교육 기관으로 국립대학과 같은 전문기관이었으며 당나라 유학생도 많았다. 「상서」 ․ 「춘추」 ․ 「좌전」 ․ 「시경」 ․ 「예기」 ․ 「논어」등의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가르친 것으로 여겨진다. 발해의 6부 명칭이 충 ․ 인 ․ 의 ․ 지 ․ 예 ․ 신이라는 유교 덕목을 사용한 것을 보면 유학 교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정혜 공주와 정효 공주의 묘지에는 중국의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두루 섭렵하였음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다.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여러 교육 기관이 설립됨에 따라 유학이 보급되어 갔다. 삼국 시대의 유학은 학문적으로 깊이 있게 연구된 것이 아니라, 충, 효, 신 등 도덕규범을 장려하는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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