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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 걷기 여행의 원조 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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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온라인중앙일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6-04-25 06:05 조회2,0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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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수년 전, 난데없는 책 한 권이 세상에 등장했다.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이란 책이었다.


땅끝 마을에서 통일 전망대까지 29일간 걸으며 그 여정을 엮은 것이었다.


당시 국토 종주를 하는 젊은 친구들은 더러 있었다. 이들의 종주는 도전과 극복의 의미였다. 그런데 그녀에겐 ‘걷기 여행’이었다. 그때 나는 여행 담당 사진기자였다.


십 년 이상 두루 여행을 했고 그 여행지를 사진으로 소개해 왔다. 하지만 과정이 아니라 목적지만 사진을 찍었을 뿐이었다.

 

그녀의 여행은 나의 여행과 엄연히 달랐다. 걷는 과정이 목적인 그녀의 여행, 낯설고 새로웠다. 그 후로도 그녀의 ‘걷기 여행’ 책은 시리즈로 계속 나왔다. 두 번째는 산티아고, 세 번째는 중국·라오스·미얀마, 네 번째는 네팔 도보 여행기였다.

그녀의 네 번째 책이 나왔을 즈음 제주 올레길이 처음 만들어졌다. 이후 우리 땅 곳곳에 ‘걷기 여행’의 열풍이 일기 시작했다. 이렇게 따져 보면 그녀가 ‘걷기 여행’의 원조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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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녀의 여행은 내게 로망이었다.


익히 그녀의 명성과 여행을 알면서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었다.
그러다 지난 4월 초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걷기 전문가 3인에게 ‘걷는 이유’를 묻는 인터뷰가 계기였다. 그녀의 집 주변, 종로구 부암동에서 만났다.


오래전 책 표지에 등장했던 여린 모습은 아니었다. 흰 머리카락이 제법 보일 만큼의 시간이 느껴졌다.


서른셋에 전세 보증금과 적금 해지한 돈을 들고 세계일주를 떠났던 그녀, 어느새 마흔여섯이 되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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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함께 걸을 코스를 정했다. 종로구 부암동 백사실 계곡을 통해서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까지의 길이었다.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산책하는 길이라고 했다.
이 근처에 터를 잡고 사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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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초의 백사실 계곡, 개나리 진달래는 이미 한창이었다.


비 온 다음날이라 이런저런 나무에서 물오른 어린 잎이 앞 다투어 돋고 있었다.


맘에 두고도 언감생심 가까이하지 못했던 봄이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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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을 걷다가 계곡 옆 쉼터에 자리를 잡았다. 항상 쉬어가는 자리라고 했다.


그녀가 배낭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딸기, 사과, 맥주였다.


주변의 풍경과 소리에 눈과 귀를 열어놓고 걷다가 이렇게 쉬어 간다고 했다. 그녀가 걷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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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가는 김에 게서 인터뷰가 이루어졌다

.
바람과 숲 향기가 함께하는 봄 숲에서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사람이 위로 하지 못하는 것을 자연이 위로해준다는 것을 지리산에서 처음 알았어요.


물론 사람이 주는 위로도 있지만 저는 자연 속에서 자연스러워 지더라구요.”


‘자연의 위로’, 그녀가 걷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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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는 길치입니다. 그런데 여행가로서 길치인 게 복인 것 같아요. 길치이기 때문에 길을 물을 수 있잖아요.”


그녀에겐 ‘길을 모른 다는 것’이 ‘새로운 길을 물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취재기자가 마지막으로 가장 좋은 길이 무엇인 지 물었다.
망설임 없이 그녀가 답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길이 가장 좋은 길이라 생각합니다.”

그녀의 답에 나를 돌아봤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길, 구태여 걸으려 하지 않았다. 걸을 만한 길은 멀리 있으며, 그곳에 갈 시간과 여유가 없다는 한탄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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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말을 새기며 그녀와 다시 숲길을 걸었다.
길을 따라 개나리 지천인 북악 스카이웨이에 이르자 벤치가 나타났다.


숨이 찼다.
잠깐 쉬어가자고 그녀에게 부탁했다.
쉬며 그녀에게 발을 보여 달라고 했다.


유럽·아시아·아프리카까지 80여 개국을 걸어다닌 그녀의 발이 어떨지 궁금했다.


더구나 걷기 열풍은 그녀의 발에서 비롯된 것이니 그 또한 기록해야 할 역사라 생각되었다.

신발과 양말을 벗으며 그녀가 말했다.


“요즘은 쉬는 기간이라 말끔해요. 한참 다닐 땐 어딜 가든 물집투성이 되죠. 발톱도 빠지고 다시 나고 그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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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발, 기대보다는 멀쩡했다.


그래도 오랜 걸음의 흔적이 보였다. 빠졌다가 다시 난 발톱도 거칠었다. 물집 아문 자리엔 굳은살이 박혔다.


그녀 스스로 말끔하다고 말했지만 적어도 내 눈엔 말끔하게 보이지 않았다.


걸어 온 삶이 밴 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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