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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 50년 전 성전환 수술 '트랜스젠더', 노인된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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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온라인중앙일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11-29 08:16 조회13,7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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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 록 가수의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 `헤드윅`의 한 장면 [사진제공=쇼노트]

 

 

1950~70년대에 성전환한 미국의 트랜스젠더들은 철저히 소외된 채 정체를 숨기고 살아간다

 

태평양 북서부의 한 시골 마을. 가장 가까운 도시로부터 80㎞ 떨어진 이곳엔 자신을 숨기고 싶어 하는 한 남자가 살고 있다. 그는 1950년대에 성인이 됐다. 자신이 잘못된 몸, 예컨대 정체성으론 남자인데 여자의 몸으로 태어났다는 식의 말을 했다간 잘해야 정신병자 취급을 받고 최악의 경우 심각한 학대를 당하던 시절이었다.

  아무런 도움의 손길도 찾지 못한 그는 14세 때 자살을 기도했다. 몸이 여성으로서 성숙하기 시작하면서 우울증에 시달린 탓이었다. 19세 때부터는 남성 호르몬을 복용하며 진짜 자신을 향한 성전환을 시작했다. 가족은 그의 친구들에게 “그녀”가 사라졌다며 그를 새로 이사온 친척 남자라고 소개했다. 그는 결혼해서 양아버지가 됐고, 남자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아무에게도 과거를 털어놓지 않았다. 이제 70대가 된 그는 가족들에게도 성전환 사실을 숨긴 채 철저히 고립된 삶을 살아간다. 아내는 먼저 사망했다.

  심리치료사 리드 밴더부르(60)는 7년 전 그 남자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다. 그 자신도 트랜스젠더인 밴더부르는 500명가량의 성전환을 도왔다. 그는 밴더부르에게 성전환 이력을 남기지 않고 수술해 줄 의사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환자 본인 외엔 열람할 수 없는 병원 기록조차도 그에겐 두려움의 대상인 듯했다. 밴더부르는 그에게 의사를 소개해주고 250㎞나 떨어진 그의 집을 아내와 함께 정기적으로 왕래하며 장을 봐주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밴더부르가 결코 아무에게도 정체를 밝히지 않은 그 남자는 트랜스젠더 인구의 ‘잃어버린 세대’ 중 한 명이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 브루스 제너가 케이틀린 제너로 성전환하고, 은퇴한 대학 교수이자 세 남매의 아버지인 주인공이 트랜스젠더로 커밍아웃하는 드라마 ‘트랜스패런트’가 에미상 5개 부문을 휩쓰는 등 그 어느 때보다 트랜스젠더의 가시화가 진행되는 오늘날에도 이들의 처지엔 변함이 없다.

  콜라 페트병이 처음 출시되고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있었던 1950~1970년대는 성전환 수술이 발달하기 한참 전이었다. 트랜스젠더라는 단어가 영어사전에 존재조차 하지 않던 시기다. 당시 트랜스젠더들은 자신의 정체를 감히 입 밖에 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자신의 과거를 꾸며내고 이사해서 새 직업을 얻었다. 연구자들은 이를 ‘은둔한다(go stealth)’고 표현한다. 그들은 지금도 성 소수자 공동체에서 소외돼 있다. 성 소수자들의 모임이나 퍼레이드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연구 조사나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다.

 보호 시설에서도 거절당해

성전환 수술은 1920년대 유럽에서도 실시됐지만, 미국에선 1950년대에 처음 알려졌다. 육군 참전용사 크리스틴 조겐슨은 미국에서 최초로 널리 알려진 성전환 여성이다. 그녀는 덴마크에서 수술을 받고 돌아와 미국 땅을 밟으면서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1952년 뉴욕 일간지 데일리 뉴스는 ‘금발 미녀가 된 전직 군인’이라는 제목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표지에 실었다. 머지 않아 성 정체성 전문 병원이 미국 각지 병원에서 개설돼 진단과 호르몬 치료, 성전환 수술을 제공했다.

  트랜스젠더를 향한 차별은 그치지 않았다. 성전환 수술을 집도한 의사들조차 이 수술을 성을 바꿔주는 치료라고 설명했다. 행복하고 생산적인 삶을 살고 싶다면 수술을 받은 뒤엔 과거를 버리고 새 몸으로 살아야 한다. 다른 트랜스젠더들과 어울리거나 성전환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권장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기존 사회에 녹아드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당시 성전환 수술을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은 살아가는 내내 ‘은둔’해야 했다.

  자신이 트랜스젠더임을 공개하려 한 사람들은 종종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일하는 임상심리학자 마크(익명)는 20세이던 1979년에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 몇 년 뒤 마크는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의 트랜스젠더 운동가 주드 패튼과 매리 엘리자베스 클락에 이끌려 안정된 사회 생활을 포기하고 정체성을 드러냈다. 그들은 지원단체를 조직하고 트랜스젠더들을 위한 수영장 파티나 바베큐 파티를 열었다.

  그러나 끔찍한 사건이 마크를 재차 사라지도록 만들었다. 1986년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트랜스젠더 남자가 샤워 도중 여자친구의 전 남편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범인은 재판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성기도 고환도 없는데 남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소리를 지르면서 내게 자기 집에서 꺼지라고 나를 위협했다. 내 손엔 샷건이 있었다.”

  큰 충격에 빠진 마크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물러나 10년 이상을 숨어지냈다. 1990년대 후반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는 알려진 사람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트랜스젠더가 돼 있었다. 노인 트랜스젠더의 건강 문제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난 몇 년 간 그는 성 소수자 의료인들에게 그 문제를 교육했다. 그들이 처한 특수한 현실을 환기시키고 요양시설에서 마주치는 학대와 무시의 위험을 알렸다. “트랜스젠더에겐 가족도, 배우자도, 자식도 없다”고 그는 말했다. “보호자가 없으면 보호 시설에서도 학대에 더 쉽게 노출된다.”

  이처럼 극도로 소외된 계층에 노인 요양 시설은 악몽이다. 미셸 에반스(59)는 성전환한 직후 요양시설에서 끔찍한 일을 겪었다. 오렌지카운티 출신 성전환 여성인 에반스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신체와 정신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완전히 성전환을 하기까지는 50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그로부터 1년 뒤 그녀는 사고로 다리가 부러졌고, 수술 뒤 강제로 양료원에 보내지게 됐다. 문제는 그 어떤 시설도 그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겨우 찾아낸 한 시설은 그녀를 남자 병동에 넣겠다고 주장했다. 에반스는 반발한 끝에 겨우 자기 방을 얻었지만, 담당 의사는 그녀에게 자신을 여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의사는 결국 에반스의 호르몬 치료를 중단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수술 후 복용이 필요한 혈액희석제조차 빼앗았다. 곧 에반스의 다리에서 혈전이 발생했다. 친구 1명이 개입해 그녀를 병원에 데려갔지만 그곳에서 24시간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 혈전이 폐까지 침투한 것이었다.

  에반스는 살아남았지만 그 경험은 그녀에게 큰 상처로 남았다. “의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다. [치료 시설을] 더이상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곳은 나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격리시키고 자신들 마음대로 대우하기 위한 장소다.” 에반스는 그 의사를 의료 과실로 고소해 합의를 받아냈다.

  2013년 버지니아커먼월스대학 생물다양성연구센터의 태린 위튼 교수는 베이비부머 트랜스젠더의 만성질환과 임종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39%는 임종 시에 의료인으로부터 존중받으며 치료받으리라는 자신감이 전혀 없거나 거의 없다고 답했다. “나 같은 신체를 다뤄본 적 없는 타인에게 의존하고 싶지 않다”고 한 조사 대상자는 응답했다. “간병인이 필요한 시기가 오면 자살 계획을 세우겠다.” 또 다른 조사 대상자는 선언했다. “그들은 학대를 받아왔기 때문에 의료시설에 아주 회의적이다. 의료인은 학대를 가하는 주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라고 말했다. 그는 1990년대에 성전환했다. “폭력과 학대는 우리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일종의 방사능이다.”

 트랜스젠더 71% 자살 생각해

그뿐만이 아니다. 의료인을 피하는 탓에 이런 사람들은 고혈압이나 당뇨병처럼 일반적인 경우라면 생명 유지가 가능한 질병에도 목숨을 크게 위협받는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나이 든 트랜스젠더들은 우울증이나 장애, 외로움으로 트랜스젠더가 아닌 사람보다 훨씬 많은 고통을 받는다. 노인 트랜스젠더 71%는 자살을 고려한 적이 있다. 미국 전체 인구 중에 그런 사람은 3.7%에 불과하다.

  지원단체와 연구자들은 노인 트랜스젠더가 겪는 특수한 어려움을 갈수록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 유일하게 고령화에 초점을 맞추는 성소수자지원협회는 2012년 노인 트랜스젠더 삶의 질 개선에 대한 보고서를 발행했다. 위튼은 트랜스젠더 약물 치료에 대한 강의를 버지니아커먼웰스대학에 개설해 다음 학기부터 수업을 시작한다. 성 소수자 건강구상의 공동이사인 월터 박팅 컬럼비아대학 의료심리학과 교수는 트랜스젠더 인구의 노년 생활이 성공할 가능성은 공동체 구성원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증가한다고 말했다. “보다 많은 지원 속에서 다른 트랜스젠더 사람들과 연결된 사람들이 더 잘 해낸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 사람들은 편견과 차별을 더 잘 이겨낸다.”

  에반스는 현재 시련을 거의 다 극복했지만 다리에 영구적인 피해를 입었다. 그녀는 이 중요한 공동체를 활성화하려 시도한다. 매달 셋째 주 금요일마다 TG레인보우라는 단체를 주도한다. 오렌지카운티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인 샌타애나의 풋힐교회에서 모임을 갖는 단체다.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둘러 앉아서 직접 구워온 과자를 나눠먹고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여러 단계의 트랜스젠더들이 모임에 참여한다. 미국 중서부 지방에서 자란 한 남자는 58년 동안 자신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가 70세가 돼서야 성전환했다. 스스로가 여성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모임을 제외하면 여성복을 입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자리한 20대 대학생은 자신이 마침내 성전환을 위해 병원을 예약했다고 밝혔다. “여러분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 자신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에반스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부터 거의 1600㎞ 떨어진 곳에서 밴더부르는 은둔한 트랜스젠더 남자를 방문할 채비를 한다. 그 남자 대신 장을 봐주기 시작한 지가 벌써 근 10년째다. 그와 같은 트랜스젠더를 더 많이 만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다. 잡지에 광고를 낼까 고려 중이다. 하지만 친구를 찾아가는 지금으로선 그보다 더 단순하고 긴박한 물음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장바구니를 들고 친구 집 현관문을 두드렸는데 아무런 답이 없다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 LIANA AGHAJANIAN NEWSWEEK 기자 / 번역 이기준

[ 이 기사는 뉴아메리카미디어·미국노인학회·실버센추리재단의 지원을 받아 작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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