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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 [한나의 우아한 비행] 우리의 소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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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온라인중앙일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11-30 11:56 조회1,3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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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할머니가 자꾸 신경 쓰였다. 가하 할머니는 매일 느지막이 등교하신다. 가하의 마지막 수업이 끝나도록 기다리시다가, 손자를 데리고 집에 가신다. 예전에는 학교 어딘가에 머무신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언제부턴가 내 교실 바로 앞, 구멍 뚫린 우산꽂이 위에 불편하게 앉아 계신다. 여든쯤 되 보이는 노모를 밖에 둔다는 게 마음에 쓰였다.

 

할머님이 교실 앞에서 가하를 기다리기 시작한 그쯤부터, 나는 이 아이를 유심히 보았다. 가하 얼굴은 하얗게 질린듯한 색이다. 체구는 작지 않은데 얼굴색이 그런가 연약해 보인다. 동그란 하얀 얼굴의 콧등에 주근깨가 촘촘히 앙증맞게 모여있다. 그런 가하를 볼 때 내 시선은 자주 그 콧등에 머문다. 남자아이 치곤 하이톤 목소리라 어디서든 가하의 목소리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틀린 음정으로 팝송을 크게 따라 부르고, 특유의 발음으로 영어 책을 읽을 때 다른 아이들의 목소리와 섞이지 못한다. 하지만 매번 이 작은 사람의 열심은 교실 밖을 넘어간다. 할머니는 분명 손자의 영어말을 흐뭇하게 듣고 계실 것이다. 어쩌면 이 소리가 듣고 싶어서 교실 앞 우산꽂이를 떠나지 못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더 어린 학생들도 혼자 잘 다니는데, 3학년이나 된 가하를 꼭 할머니가 동행해야 하는 이유가 무얼까. 물어도 가하는 대답이 없다. 애 궂은 아이들만이 자기는 가하보다 집이 더 멀어도 혼자 다닌다고 자랑 할 뿐이다.

 

날이 쌀쌀해지고 싸늘한 복도의 기운이 내 어깨도 움츠리게 하는데, 더 이상 할머니를 교실 밖에 둘 수 없었다. 남은 의자 하나를 내드려야 하나 고민하다 할머니를 교실 안으로 모시기로 했다. 처음에는 거절하시더니 못이기는 척 들어오신다. 할머니 입가의 미소를 보았다. 맨 뒤, 남는 자리를 내드렸다. 할머니는 수업내용에 집중도 하고, 졸기도 하다, 때론 선생님 말 잘 들으라 아이들에게 한 소리씩 거들기도 하셨다. 며칠 함께 한 수업에, 할머니가 계셔서 불편하다는 아이들 불평도 들렸다. 할머니도 움직이지 않고 수업 내내 교실에 있는 게 불편하셨는지 수업중간에 슬며시 나가신다. 그 후론 할머니는 수업 시작할 때에는 교실 앞 우산꽂이에 오시지 않았다. “할머니, 언제든 교실에 들어 오시고 싶으면 들어오세요.” 수업 후 가하를 데리러 온 할머님께 말씀 드렸다.

 

어느 날, 냉한 복도 공기를 피해 건물 밖 벽에 기대어 볕을 쬐시는 할머니를 뵈었다. 잠깐 인사 드리고 가려다 그 동안 궁금했던, 가하는 왜 할머니와 매일 하교 하여야 하나 여쭸다. 가하가 하교 길에 친구들에게 여러 번 맞은 적이 있어서 혼자 다니기 무서워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한번은 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다며 분노하셨다. 심성 여린 가하는 자꾸 맞았다. 할머니의 작은 눈에 속상함이 흘러나왔다. 

 

 “가하 엄마는요?” 나는 사실 그 동안 궁금했다. 아이들에게 엄마의 부재는 종종 눈에 띄곤 한다. 가하도 그랬다. “가하, 엄마 없어…” 할머니는 그날, 소설 책 몇 권을 써도 모자라 다는 말씀과 함께, 가하네 가족사를 쏟아내셨다. 아이를 낳지 말라는 할머니의 만류에도 엄마는 가하를 낳았다. 하지만 아기 키울 준비가 되지 않았던 엄마는 꿈을 찾아 가하와 아빠를 떠났다. 막내아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껴안은 할머니는 가하를 키우며 속상한 일이 많다. ‘한 순간 빛을 발하기 위해 시종일관 어둠을 보여주어야 하는 소설의 주인공 같다’는 글귀가 떠올랐다. 우리의 삶은 소설을 쓰고 있다. 노모도 그렇고, 나 또한 그렇다. 지금 우리가 서로의 소설 어느 한 챕터에 등장인물로 만나 이 이야기를 쓰고 있는 듯 하다. 이후로 할머니와 다시 긴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내 마음 가까이 할머니와 가하를 이해하고 있다라는 것을 할머니는 알고 계실 것이다. 

 

오늘도 할머니는 영어교실 앞 우산꽂이에 앉아 우리와 수업을 함께 하신다. “할머니, 가하 단어 시험 백점 맞았어요!” 느린 가하가 가방 챙기는 것을 도와주며 고단하게 기다리셨을 할머니께 한마디 건넸다. “아휴, 선생님, 고맙습니다.” 노모가 내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가하와 할머니가 집에 돌아가는걸 뒤에서 지키듯 보곤한다. 가하의 상실, 이 작은 사람에게 일찍 찾아온 슬픔이 길어지는 그림자만큼 쓸쓸하다. 그러나 우리의 소설은 언젠가, 한 순간이라도 빛을 발할 것이다. 그 희망이 우리 삶의 소설을 쓰게 한다.  

 

 

김 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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