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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 루저의 일상: 열등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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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온라인중앙일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6-04-28 11:45 조회3,0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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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이 노는 놀이터는 ‘내 안’과 ‘나의 밖’ 두 군데]
[열등감은 세 가지 양상으로 드러나]
[열등감을 극복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직시와 참여]



트러블 있는 부부(연인)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의외의 괴물과 자주 만난다. 열등감이라는 괴물이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무슨 열등감인가 싶겠지만, 자신도 인지하지 못할 만큼 만성이 되어버린 열등감 때문에 짝을 괴롭히는 경우가 많다.

오늘은 문명인 부부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지만, 열등감이 특별히 좋아하는 커플이 바로 꼬치꼬치 따지고 드는 문명인 부부라서, 먼저 이 괴물이 어떤 놈인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부터 알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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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저loser의 일상 ⓒmaydian.deviantart.com


유인원과 자선가, 광대에게는 쪼매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차근차근 잘 따라가 보자. 정 어려워서 머리가 핑글핑글 돌면, 마지막 결론부만 읽어도 좋다. 꼬치꼬치 따지고 드는 문명인 패턴을 가진 분에게는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문사철文史哲의 기억을 가진 분들은 어쩌면 오랜만에 학창시절 향수에 빠져들지도 모르겠다.



주관과 객관

열등감이 뭔지 모르는 성인은 거의 없다. 그러나 어떻게 다독여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도 거의 없다. 느낌으로야 너무도 명확한 감정이지만,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저마다 열등감을 피하거나 이겨보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그 과정에 거짓말과 사실 왜곡, 자기기만과 같은 잘못된 방식들을 동원해 삶과 관계의 물줄기를 원치 않는 방향으로 비틀어 놓는다. 특히 지난날의 상처나 고통과 연결되어 있는 열등감일수록 잘못된 방식들이 드러내는 부정의 파괴력은 커진다.

열등감을 이해하려면 내 안에서 일어나는 열등의 메커니즘을 꽤 깊숙이 들여다봐야 한다. 주변에는 늘 나보다 나은 사람이 있다. 열등감은 그런 사람들과의 직⋅간접적인 비교에 의해 촉발되고, 보여주려는 가면이나 욕심의 두께에 따라 정도와 심각성이 달라진다. 그리고 거기에는 객관客觀, object과 주관主觀, subject이라는 흥미로운 두 가지 개념이 개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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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쪽팔려... ⓒriawinters.com


으아, 벌써부터 어려운 냄새가 진동한다. 하지만 차근차근 생각의 근육을 세워서! 엄청 간단히 말하면, 주관은 ‘나’, 객관은 ‘나 이외의 다른 거’ 쯤으로 생각하고 가보자.



관념론과 유물론

관념론은 정신이 먼저라고 주장하는 입장이고, 유물론은 이 세계가 먼저라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객관이란, 넓은 의미에서 인식되는 대상對象을 말하는데, 입장에 따라 관점이 다르다. 관념론자들은 객관적 관념론과 주관적 관념론을 불문하고, 주관이 객관에 선행하며, 객관을 주관이 만들어내는 이차적인 현상으로 본다.

먼저, 객관적 관념론은 서양의 플라톤 철학에서 완성되었으며, 인간이나 의식 밖의 절대적 신 또는 이성理性을 전제하는 기독교 사상으로 대표된다. 동양에서는 주자朱子의 이학理學에 해당한다.

그리고 주관적 관념론은 18세기 들어 흄David Hume, 버클리George Berkeley 등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실증주의, 생철학, 실용주의, 실존주의로 대표된다. 동양에서는 왕양명王陽明의 심학心學에 해당하며, 모든 것은 마음, 즉 주관이 만들어낸다는 불교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맥이 통하는 관점이다.
 

밖에 있나, 안에 있나? ⓒmambre.wordpress.com/pictureofbuddha.blogspot.kr


반면 유물론자들은 객관을 주관 밖에 따로 존재하는 실재實在로 본다. 나의 출생 이전에 객관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실존적 관점이다. 이는 마르크스K. Marx의 동료이자 후원자였던 엥겔스F. Engels의 저서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에 다음과 같이 잘 나타나 있다.
 

정신이 자연보다 먼저 존재했다고 주장한 사람들, 따라서 결국 어떤 종류이든지 우주의 창조를 승인한 사람들은 관념론의 진영을 형성했다. 이와는 반대로 자연을 근원적인 것으로 본 사람들은 유물론의 각종 학파에 속했다. 관념론이니 유물론이니 하는 표현은 본래 위에서 말한 이외의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서 오렴. 여기가 객관이란다... ⓒtaringa.net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주관을 정신이나 영혼 또는 자아와 구분하지 않았다. 이후, 주관을 경험의 요소에 기초한 심리학적 주관과 선험(경험 이전에 이미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의 요소에 기초한 인식론적 주관으로 나눈 칸트Immanuel Kant의 해석을 비롯해 다양한 해석이 첨가되어왔다.

그중 열등감을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철학적 해석은 유물론의 장자인 마르크스에 의해 제시되었다. 그는 주관이란 객관, 즉 대상을 그저 인식하는 상태에 머물지 않고, 객관에 가하는 실천적인 활동을 통해 변화하는 객관을 지속적으로 반영하는 나의 능동적인 의식이라 했다.



열등감의 놀이터

관념론을 따르건 유물론을 따르건, 내가 느끼는 열등감은 당연히 주관의 영역에 속한다. 그런데 나는 객관을 벗어나 존재할 수 없다. 제아무리 부처님이라 해도 존재의 형태가 물질物質, material인 이상, 가상의 객관(진제眞諦와 구별되는 속제俗諦)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객관의 십자가형을 당한 예수님도 마찬가지다. 이런 존재론적 당위에서 문제가 시작된다.

주관의 존재가 객관의 마당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나의 열등감이 노는 놀이터는 두 군데다. 내 안, 즉 주관에도 놀이터가 있고, 나의 바깥, 즉 객관에도 놀이터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주관의 놀이터에서 노는 내 열등감에는 비교적 너그러운 반면, 객관의 놀이터에서 노는 내 열등감에는 매우 예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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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의 두 놀이터 ⓒlovethispic.com


그래서 마르크스가 설명한 대로, 나는 나의 열등감을 인식하는 상태, 즉 주관적인 입장에만 머무르지 않고, 나를 바라보는, 또는 내가 비춰지는 객관에 실천적⋅의지적으로 관여하려 한다. 자신의 열등감을 보상compensation해서 보다 그럴 듯한 사람처럼 보이려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실제로 심리학자 아들러Alfred Adler는 자신이 체계를 수립한 ‘개인심리학’에서, 모든 인간은 타인보다 우월해지려는 선천적인 욕구를 갖고 있기 때문에 보상을 통해 열등감을 극복하려 한다고 했다.



열등감의 세 가지 양상

주관과 객관의 관계 속에서, 열등감은 크게 세 가지 양상으로 자신의 실체를 드러낸다.

첫 번째 양상은 주관의 놀이터, 즉 속으로 밀어 넣어 객관에 전혀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런 나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다시 말해 객관으로 인해 열등감에 휩싸이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객관(세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삶을 살아간다. 객관과의 거리두기가 심해질 경우, 결국 열등감에 점령당한 ‘기죽은 사람’이 될 수 있다.

반대로 모든 객관에 동의를 표하며 자신을 합리화rationalization 하고 스스로를 칭찬하기에 급급한 루쉰의 아큐阿Q가 될 수도 있고, 반동형성reaction formation을 발휘해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베풀고 봉사하는, 흔히 말하는 그다지 좋지 않은 의미의 ‘법 없이도 살 사람’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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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으로부터의 도피 ⓒlearnfitness.com


무엇이 되건 간에 내 안에 있는 열등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기는커녕 객관과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담아 놓은 솔잎주의 향취가 깊어지듯 오히려 더 숙성될 뿐이다. 이런 나에게 아무런 신경병리학적인 증세도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두 번째 양상은 객관(세상)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가면을 쓰려는 욕구에 휘둘리는 것이다. 이런 나는 자신이 설정해 놓은 객관에 맞추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삶을 살아간다. 나는 내 모든 의식을 동원해 자신의 행위를 통제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채찍질을 하도록 종용하는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 객관이라는 게 문제다. 내가 발휘하는 주관의 주인이 객관이라는 역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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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역설 ⓒnonnetta.deviantart.com


이런 현상이 심화될 경우, 객관을 비대하게 키움으로써 내 주관의 놀이터에 있는 열등감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려 할 수 있으며, 비대해진 객관을 만족시키기 위해 거짓과 왜곡을 동원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게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심리기제를 허세 또는 가면놀이라 부른다.

세 번째 양상은 주관의 놀이터에서 노는 열등감과 객관(세상)이 보는 현실을 되도록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열등감을 긍정적인 삶의 비료나 성공의 동력으로 삼았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곤 하는데, 그들이 여기에 속한다.

나는 이미 느낀 열등감을 해소할 속셈으로 전치displacement를 동원해 자신이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공간에서 폭군이 될 수 있다. 열등감의 근원을 피하기 위해 나보다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상황에만 머무름으로써 반복적으로 우월감을 경험할 수도 있다. 마치 일당 7만 원짜리 잡부가 목수들의 술자리에 끼이는 대신 신출내기 잡부들에게 현장의 무용담을 들려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열등감에 휩싸인 ‘내 안의 나’는 그런 방식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유치한 발버둥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며, 틈나는 대로 ‘이놈아, 그래봐야 별로 도움 되는 거 없거든.’ 하고 속삭인다. 아마도 이런 내면의 속삭임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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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 피하지 말고 직시直視! ⓒaurorasblog.com




열등감을 극복하려면?

열등감은 해소되지 않는 한 끝까지 살아남아 일상에 부정의 영향을 미치며,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행동을 잘 조절하리라 아무리 다짐한다 해도, 언젠가는 삶의 리듬을 흐트러뜨리는 요인으로 돌출되게 마련이다.

열등감에 지배당하지 않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내 안에서 열등감을 안고 살아가는 ‘내 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만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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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의 나’ 만나기 ⓒscoopnest.com


이때 필요한 자세는 있는 그대로 만나되, 만남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나에게 무엇을 요구했던가. 그저 열등감을 인식하는 상태에만 머물지 않고, 실천적인 의지를 갖고 객관(세상)에 능동적으로, 또 지속적으로 참여해야 하며, 그 결과를 다시 주관에 반영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열등감을 부정하려거나 회피하려거나 이기려 하거나 지나온 환경 탓으로 돌리는 대신 인정하고 직시하려 할 때, 열등감은 상황을 호전시킬 재료가 된다. 주관의 무책임한 들썩임을 지그시 누르며 객관(세상)에 진솔하게 참여할 마음을 낼 때, 비로소 구체적인 방향을 모색할 용기가 생겨난다. 열등감이 나를 더 나은 나로, 더 편안한 나로 이끄는 동력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공부에 열등감이 있는 사람은 검정고시든 뭐든 준비할 수 있고, 성격에 결함이 있는 사람은 성격개조에 나설 수 있다.

‘내 안의 나’가 어떤 종류의 열등감을 가졌건, 이 단계에 이른 사람이라면 주관의 놀이터와 객관의 놀이터 사이에 조화를 불어넣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객관의 시선도, 내면에 있는 ‘내 안의 나’의 불안도 함께 지니고 가야 할 책임이 오로지 자신에게 있음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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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 까짓 거... 날려버려!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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