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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 선풍기 한 대 놓인 독방서 … 『논어』 통째 외우기 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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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온라인중앙일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7-26 18:44 조회1,6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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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보은 ‘선병국 가옥’ 안채 마루에 모여앉은 제36기 학생과 교수진. 오른쪽부터 안소연·정성학 학생, 김만일 소장, 최광현 연구원, 이승연·이동규·이현정·최민규·이창우·김원혁 학생.
 

 

안소연 학생이 『논어』 총강을 앞두고 글 외우기에 삼복 더위를 잊었다. 10명 학생이 각기 배정받은 행랑채 방은 작은 책상 하나를 놓고 나면 몸 누일 공간뿐이라 ‘암송 감옥’이라 불린다.

“자왈(子曰), 도지이정(道之以政) 제지이형(齊之以刑) 민면이무치(民免而無恥), 도지이덕(道之以德) 제지이례(齊之以禮) 유치차격(有恥且格).”

 방문 밖으로 흘러나오는 목청이 또랑또랑하다. 법과 형벌로 백성을 다스리기보다 덕치와 예로 나라를 이끌라는 『논어』 ‘위정(爲政)’편의 한 구절이다. 집 구경하러 들어서던 외국인 두 명이 신기한 표정으로 기웃거린다. 지난 24일 오전 충북 보은군 장안면 개안리 ‘선병국 가옥’ 안채는 빗소리와 어우러진 암송 소리가 낭랑했다. 이달 초 시작한 ‘태동고전연구소 『논어』 총강’이 마무리에 접어들어 시험을 앞둔 학생들 마음이 급해졌기 때문이다. 

총강(總講)은 『논어(論語)』 제1장 학이(學而) 편부터 제20장 요일(堯日) 편까지 죽 외워 바치는 배송(背誦)으로 일종의 학기말 고사다. 각기 배정받은 행랑채 방 한 칸에 들어앉아 소리 내 외우고 또 외우며 7월 한 달을 난 10명 학생들은 “참선이 따로 없다”고 입을 모았다. 사람 따라 차이는 있지만 평균 암송 시간이 『논어』는 1~2시간, 『맹자』는 4시간이 넘는 까닭에 배송을 끝낼 무렵 쯤 되면 몸이 공중에 붕 뜨는 신기한 경지에 들 때도 있다. 엉덩이가 무거워야 하고 체력전 성격이 짙어 몸과 마음을 함께 다스려야 한다. 

 태동고전연구소(소장 김만일)는 청명(靑溟) 임창순(1914~99)이 민족문화의 발굴과 재발견, 비판적이며 창조적 계승을 위해 한문을 꼭 알아야 할 젊은 국학자들을 가르치려 만든 사숙(私塾)이다. 금석학과 서지학에 밝았던 한학자이자 역사학자이며 서예가였던 청명은 멀리 남북통일시대까지를 내다보며 ‘바탕학’으로서의 한문 교육을 충실히 했다. 그는 1978년 지곡서당(芝谷書堂) 상량문에 “이곳이 멀지 않은 장래에 남북의 젊은 학자들이 무릎을 맞대고 민족의 앞날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논의하고 설계하는 자리가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하고 기대합니다”라고 썼다.

 김만일 소장은 “1983년 5기로 들어온 뒤 10년 넘게 스승을 모시며 사람을 키우는 일에 그토록 실천적인 분을 보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3년 동안 먹이고 재우며 오로지 공부만 할 수 있도록 주머닛돈을 털어 장학금까지 마련해준 청명은 대신 암송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면 “나가보게” 한마디로 보따리 싸서 내보냈다는 것이다.

 지난해부터 한림대학의 지원이 끊기며 전원 기숙사 생활이 힘들어지자 지곡서당 졸업생들은 긴급 총회를 열어 십시일반 후원금을 모았다. 이런 난관을 뚫고 36기로 입학한 학생들은 1학기를 서울 낙원동 강의실에서 배우고 7월 한 달 합숙 과정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청명이 14세부터 20세까지 한학을 배웠던 관선정(觀善亭) 서당 터가 있는 선병국 가옥에서 이들은 얼굴도 보지 못한 옛 스승의 정신을 기리며 촌음을 다퉈 글을 외웠다.

 국사학 석사과정인 안소연씨는 “조선시대 과거를 전공하기에 선비정신의 요체인 유교 경전을 깊이 읽는 이 훈련은 소중하다”고 말했다. 사학 석사과정인 이창우씨는 “어지간한 교육과 비교가 안 될 만큼 집중력이 높다”고 했다. 사학 박사과정인 최민규씨는 “사상사 저작을 읽을 때 관련 구절을 바로 알아챌 수 있다”고 암송의 장점을 비유했다.

 김 소장은 “청명이 사람을 키워 일구려 했던 민족문화의 계승과 창달은 지금 우리의 임무”라며 “태동고전연구소가 길이 살 수 있도록 뜻을 모아 달라”고 부탁했다.

보은(충북)=글·사진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태동고전연구소=청명 임창순 선생이 1963년 서울 수표동에 일반인을 위해 개설한 한문강좌에 뿌리를 둔 한문교육기관이다. 79년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지둔리에 세운 지곡서당으로 맥을 이으며 3년 연한의 한문연수생을 매년 10명 안팎으로 뽑아 35기까지 230여 명을 길러냈다. 1학년 사서(四書), 2학년 삼경(三經) 암송이 필수이고 3학년 때 주역과 초서, 번역 연습 등을 선택으로 배운다. 85년 한림대가 청명의 기증을 받아들여 인수한 뒤 부설기관으로 운영해오다 2013년부터 예산을 삭감해 지원을 중단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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