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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집 | [맛대맛 라이벌] 설렁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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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redbear300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5-12 06:09 조회1,8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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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견지동 이문설농탕, 2위 대치동 외고집설렁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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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한식재단이 50년 이상 된 한식당을 조사해 ‘한국인이 사랑한 오래된 한식당 100선’을 발표했습니다. 서울에선 28곳이 이름을 올렸는데, 그 중 설렁탕집이 4곳이나 포함됐습니다. 설렁탕이 그만큼 대표적인 서울 음식이라는 얘기입니다. 江南通新 독자가 뽑은 서울 최고의 설렁탕집 두 곳을 소개합니다. 오랜 전통, 그리고 맛 등 모든 면에서 라이벌로 불리는 식당입니다.
 
이문설농탕의 설렁탕엔 다른 곳에 흔히 없는 혀밑이나 만하도 맛 볼 수 있다.(가장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머릿고기, 혀밑, 만하, 양지. 한 가운데가 7000원짜리 설농탕)
 
1위 견지동 이문설농탕
30년 단골은 단골 축에도 못 끼는, 100년 전통 원조집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집권 당시 혼·분식 장려 정책을 펼쳤잖아요. 그 땐 참 장사하기 어려웠어요. 매주 수요일, 토요일엔 오후 5시까지 모든 식당에서 밀가루 음식만 팔아야 했거든요. 우리는 밥집이고, 게다가 점심에 손님이 더 많은데. 그래도 별 수 있나. 국물에 면만 담아 줬더니 손님이 거의 떨어졌어요. 참, 종로는 예부터 서울의 중심이잖아요. 데모같은 걸 다 종로통에서 했죠. 데모 한번 하면 최루탄 냄새 때문에 손님 발길이 끊어졌다니까요.”

 서울 종로구 견지동 이문설농탕 전성근(66) 사장의 말을 듣고 있자니 이 식당의 역사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문설농탕은 20세기초 문을 열었다.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진 않다. 하지만 전 사장은 “1904년 이문옥이란 이름으로 설렁탕을 팔기 시작했다”고 전해줬다.

 그는 “이문옥이란 이름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이문설농탕으로 바뀌었다”며 “60년 우리 어머니가 인수했을 때 이미 이문설농탕으로 바뀐 상태였고, 난 80년에 물려받았다”고 말했다.

 이문이라는 이름은 마을을 드나드는 작은 문이자 초소역할을 했던 이문(里門)에서 딴 것이다. 식당이 이문 근처에 있었던 거다. 때문에 이 일대엔 예부터 이문이란 이름을 단 식당이 많았다. 전 사장은 “요 근처에 이문고개집이란 밥집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전 사장 어머니인 고(故) 유원석씨가 장사를 시작한 데는 역사의 아픔이 있다고 한다. 바로 6·25다.

 함경도 해주에 살던 전씨 가족은 1948년 서울에 정착했다. 그러나 2년 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가족 모두 부산으로 피란 가게 됐다. 그 피란길에서 어머니 유씨의 이화여전 동기인 고(故) 이원숙 여사를 만났다고 한다.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씨, 아니 천재 음악가 삼남매인 정 트리오(정명화·정경화·정명훈)의 어머니 말이다.

 “피란 가서 뭐 먹고 살까 고민하면서 원래는 학교 선생님 자리를 알아봤대요. 그런데 자식이 4명이나 되니 그 월급 갖고는 안 되겠다 싶었다죠. 그런던 차에 동기인 이원숙을 만난 거지요. 의기투합해 남포동에 ‘고려정’이란 냉면집을 차렸다는군요. 그렇게 거기서 3~4년 장사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울로 돌아와서 설렁탕 장사를 시작했답니다.”

 전엔 냉면장사를 했는데 왜 설렁탕을 선택한 걸까. 전 사장은 “솔직히 어머니가 자세히 말씀해 주시진 않았다”며 “아마 서울 토박이 음식에다가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온 국민이 먹는 대중적인 음식이라 택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전 사장은 마치 옛날 이야기같은 흥미로운 얘기를 계속 풀어 놓았다. 다음은 그 중 하나.

 어머니 유씨가 막 장사를 시작했을 무렵 설렁탕은 가마솥 아래 장작을 때서 끓였다. 그 때 맛을 기억하는 단골손님은 장작불에 만든 설렁탕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다 60년대 중반 연탄불로 바꿨다. 사골을 하루 13~14시간씩 끓여야 했기 때문에 하루에 연탄을 100장 넘게 썼다.

 “연탄 갈고 계속 불을 봐야 했기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잤어요. 편하게 가스불 쓰는 지금과 비교하면 참 많이 고생했지.”

 설렁탕 가격은 생각보다 많이 변하지 않았다. 전 사장이 가게를 이어받기 직전인 1979년 1500원 하던 가격이 30여년이 지난 지금은 약 5000원 오른 7000원이다. 하지만 그는 이 가격 올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고 한다.

 “우린 마음대로 가격도 못 올려요. 워낙 오랜 세월 드나 든 단골이 많아서 가격 올리면 누구 마음대로 값 올리냐고 호통 쳐요. 한번은 10여 년 만에 온 손님이 10년 전 가격만 내고 간 적도 있어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전 사장은 인터뷰 중에도 가게로 들어서는 노신사들과 연신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30년 정도의 단골은 단골이라고 자신있게 말도 못 꺼낸다고 하니 이곳 단골은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람들이리라.

 
2011년 이전 전의 이문설농탕 모습. 2층 한옥집이 특색있다.
 단순히 역사가 오래됐다고 손님이 찾을 리는 없다. 계속 손님이 찾는 건 이문설농탕이 오랜 세월에도 변치 않은 맛을 지켜오고 있기 때문이다. 인공조미료를 넣지 않는 건 기본이고 손질이 어려워 다른 설렁탕집에선 흔히 볼 수없는 혀밑(혀 아랫부분)과 만하(소 비장)도 여전히 넣는다.

 만하는 단골손님이 특히 좋아하는 부위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도 살아 생전 만하 먹으러 자주 찾았다고 한다. 전 사장이 인수 하기 전엔 김두한도 단골이었다. 요즘은 일본이나 중국 등 해외에도 알려져 외국 손님도 많다.

 전 사장은 “일본·중국 관광 책자에 소개돼 많이들 온다”며 “설렁탕 한 그릇 먹으러 여기까지 일부러 찾는 손님을 보면 고맙다”고 말했다.

 인터뷰 말미에 맛의 비결을 물었다. 그는 “그저 처음 맛 그대로만 유지하면 된다”고 답했다.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진짜 비법은 알려줄 수 없다는 걸 연륜있게 표현한 것 같기도 했다.

 “조미료가 안 들어가서 맛 없다는 사람도 많아요. 이 맛이 익숙한 사람들은 좋다고 하는 거고. 어머니가 가게를 인수할 때부터 조미료를 안 썼기 때문에 나도 그대로 하는 것뿐이예요.”

 
외고집설렁탕은 소 한마리 전체를 다 삶아낸 것이나 다름없다. 소 한마리 각 부위의 비율에 맞춰 국물을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물색이 투명한 편이다.
 
2위 대치동 외고집설렁탕
광우병 파동 때 승부수 던지다, 투뿔 한우로


‘내가 최고’라고 목소리 높이는 시대다. 골목마다 꽉꽉 들어찬 음식점도 저마다 ‘원조’ ‘3대째 내려온’ 등의 문구를 내세우며 자랑하기 바쁘다.

 그런 점에서 강남구 대치동 외고집설렁탕은 더 돋보인다. 좋은 식재료를 사용하는 식당을 찾아 소개하는 한 TV 프로그램에서 지난해 2월 ‘착한 가게’로 선정했지만 이곳은 촬영을 거부했다.

 “가게마다 각자 음식에 대한 기준과 맛의 지향점이 다르잖아요. 우리집은 그 기준이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는 것, 그리고 횡성 한우 2플러스(++) 등급을 쓰는 것이죠. 사실 꼭 ++ 한우를 쓰지 않아도 설렁탕을 만들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 우리는 조미료 안쓴다, ++한우만 쓴다, 그런 얘기를 하면 괜히 저로 인해 다른 가게가 피해 입지 않을까, 생각했었죠.”

 방송도 거부했으니 오죽 고집이 셀까 걱정했는데 막상 만나보니 외고집설렁탕 강병선(46) 사장은 차분하고 조용조용했다.

 그는 “음식장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은 재료로 장사하고 싶어한다”며 “난 가게가 지하에 있어 임대료가 상대적으로 싼 데다 구이 같은 종업원 많이 필요한 업종이 아니라 재료에 좀 더 투자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게 방송 출연하면서 유난 떨고 싶지 않았던 이유라는 거다. 하지만 방송을 거부했다는 게 알려지면서 손님은 더 많아졌다고 한다.

 사실 강 사장도 처음부터 최고 등급 한우만 사용한 건 아니였다. 성수동에서 30년간 장사하던 장모에게 기술을 전수받아 2005년 대치동에 처음 가게를 열 때는 한 단계 아래 등급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다 2008년 광우병 파동으로 설렁탕 매출이 뚝 떨어지며 최고 등급으로 바꿨다. 보통 가게가 어려워지면 한푼이라도 더 싼 식재료를 쓰기 마련이겠지만 강 사장은 다르게 생각했다.

 “장모님 솜씨가 좋아 워낙 장사가 잘 되니 딴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그런데 손님이 떨어져 조금 한가해지니까 이것저것 생각할 여유가 생기더군요. 그때 하동관 등 다른 음식점에 많이 가서 음식 맛을 봤어요. 그러던 중 더 좋은 등급을 쓰자고 결심했죠. 장모님께 설렁탕을 배우면서 꿈이 생겼거든요. 하동관처럼 누구나 최고라고 꼽을 수 있는 설렁탕집을 만들겠다는. 그럼 맛으로 승부를 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 생각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다. 그는 지금도 새벽 4시면 벌떡 일어나 가게로 나온다. 전날 3분의 2 가량 준비한 재료를 아침에 마저 손질해 그날의 장사준비를 하기 위해서다. 직원을 시킬 수도 있지만 강 사장은 스스로 해야 똑같은 맛이 난다고 믿기에 매일 직접 한다.

 “설탕·프림·물 양을 다 알려줘도 커피 타는 사람에 따라 맛이 다 달라요. 장사를 해 보니 한식은 더해요. 감으로 결정하는 부분이 참 많거든요. 설렁탕만 해도 고기 두께 1mm 차이에 따라 조금 더 끓이고 덜 끓이고를 결정해야 하니까요. 그 모든 걸 일일이 다 설명할 수가 없어요.”

 입소문이 나면서 프랜차이즈나 분점을 내자는 문의가 끊이지 않지만 다 거절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맛에 대해 이렇게 까다로운 그는 설렁탕을 어떤 음식이라고 정의할까. 그는 “소 한 마리가 다 들어간 탕”이라고 답했다.

 “물론 정말 소 한 마리를 매일매일 다 끓일 순 없겠지만 그 비율이 들어가야 해요. 뼈만 해도 머리뼈·등뼈·꼬리뼈 등, 살은 머리고기·양지·도가니 등 쉽게 말해 삼계탕처럼 소 한 마리를 다 먹는다고 생각하면 돼요.”

 그래서인지 외고집설렁탕 국물은 여느 집보다는 조금 투명한 편이다. 흰색의 뽀얀 국물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래서 가끔 “이게 무슨 설렁탕이냐”고 투덜대는 손님도 있다고 한다. 간혹 그런 손님에겐 돈을 받지 않기도 한다.

 강 사장은 “돈 주고 음식 먹으러 온 손님이 맛 없다고 하면 파는 사람 입장에선 일단 죄송한 거다”며 “그 사람 생각을 짧은 시간에 바꾸기는 어렵기 때문에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장모의 30년 노하우를 물려받았지만 그대로 답습만 하지는 않았다. 최고의 설렁탕을 만들기 위해 조리법을 살짝 바꿨다. 장모는 원래 모든 고기를 한 통에 넣고 한꺼번에 끓였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국물맛이 끓일 때마다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후론 매일 똑같은 맛을 내기 위해 각종 재료를 분리해 삶는다. 물론 이런 지식을 얻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장모님께 한 3년 정도 비법을 배웠어요. 매일 다음날 판매할 양만 끓이니까 하루 한 번씩 설렁탕을 끓인 셈이에요. 수천 번은 끓였을 걸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터득한 것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 어떤 설렁탕집에 가면 약간 노릿한 냄새가 나잖아요. 그건 재료의 피를 덜 빼거나 뼈를 좀 과하게 삶아서죠.”

 강 사장은 요즘 재료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했다. 무항생제 소를 쓴다. 아직은 물량이 부족해서 전체 재료의 40% 정도다. 그런데도 가격은 9000원이다.

 강남, 더욱이 최상급 고기만 쓰는데 한그릇 9000원이면 싼 편이다. 그런데 같은 값 받으며 더 비싼 식재료를 쓸 계획이란다.

 
 
글=심영주 기자 <yjshim@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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