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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한나의 우아한 비행] 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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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한나 작성일17-06-19 08:17 조회1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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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을 오르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며칠 동안 내 머릿속을 할퀴던 생각이 발톱을 더 뾰족이 세웠다. 혼자 뒤에 쳐져 생각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머릿속은 시근거렸고, 발걸음은 무거웠다. 빗방울이 떨어지자 이제 그만 멈추고 싶었다. 일행은 아랑곳하지 않고 인왕의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지나 북한산 비봉으로 향했다. 등산은 내가 가장 즐기는 일인데 도무지 힘이 나지 않았다. 그와의 대화 때문이었다.

어느 빛 좋은 토요일 오후였다. 그와 나는 사이좋게 마주 앉았다. 어떻게 시작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데, 대화는 우리가 얼마나 다른 사람들 인가로 흘러갔다. 내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를 확인받는 시간이었다. 뒤늦게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는 그가 현실이 바라보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누군가 필요하다면 열일 제쳐놓고 달려가는 그에게 자신을 더 챙겼으면 좋겠다는 충고를 했다. 그는 자신에게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또박또박 설명했다. 부드러운 언어였지만 결국 나를 향한 비난이었다. 그는 내게 자신과는 생각이 다른 사람, 불평이 많은 사람" 이라는 평가를 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날도 아직 훤한데 홀로 남겨졌다

멀리 보였던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가 점점 내 앞으로 다가온다. 작은 폭의 단조로운 걸음이 모여 만든 거리의 변화는 지루하지 않다. 비봉 정상은 여러 겹의 바위로 쌓여 보는 것만으로 아찔했다. 가파른 정상을 오르려면 거침없이 올라야 한다. 주저하면 공포가 더 크게 밀려와 발이 얼어붙을 것만 같다. 의지할 줄도 없이 맨손으로 바위를 낮게 기대어 빠르게 올랐다. 흐린 구름 밑으로 한양이 널따랗게 펼쳐졌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떨어져 나갔으면 하는 생각들을 떼는 의식이었다.

신앙을 갖고, 책을 읽고, 여행하고, 글을 써 남기는 모든 행위는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다듬는 일이었다. 허튼 가치를 붙잡고 살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그의 지적에 내 민낯을 보았다. 내가 되고 싶은 나와 지금의 나 사이의 괴리감에 머리를 흔들었다. 생각과 삶은 따로 떨어져 닿을 것 같지 않고, 이중적인 모습은 유쾌하지 않다. 이내 우습게도 내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보여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비봉 꼭대기에 올라서자 일행은 환호했다. 비봉 가장 높은 곳에는 진흥왕 순수비가 우뚝 서있다. 일행은 순수비 곁에서 사진을 찍겠다고 세찬 바람을 맞으며 아슬아슬한 순간을 즐겼다. 나도 떠밀려 나의 오늘을 남겼다. 산에 오길 잘했다. 높은 곳에 힘들게 오르니 짜릿함으로 우울함을 조금이나마 떨쳐 낼 수 있었다. 비록 흔들리며 잇는 나의 좌표를 인정하기로 했다. 들쑥날쑥한 삶도 부딪히고 깎일 때마다 다듬어 지리라. 비봉을 내려와 사모 바위를 거쳐 북한산을 떠날 때 바람이 생겼다. 부단히 산을 오르고 내릴 때마다 자기 부인과 자기 갱신을 감행해본 자들이 가닿는 깊음이 한 뼘씩 더해 졌으면 하는. 이젠 볼 수 없는 그가 문득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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