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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한나의 우아한 비행-문학] 불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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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7-10-16 09:47 조회1,45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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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좋은 오후다. 토요일 오전 영어강의를 끝낸 후 누구라도 만나고 싶은데, 누구를 만나야 할지 모르겠는. 나는 불현듯 누구를 만나는 것을 편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주일 앞 정도는 계획을 세워둬야 일상의 안정감을 느낀 달까. 갑자기 연락해 누군가를 불러내는 것이 조심스럽다. 아마 타인의 고유한 순간을 침범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 일 것이다. 그 마음이전에 참견 받고 싶지 않은 내시간의 소중함을 잘 알아서일테다.  그럼에도 채 계획을 세우지 못한 날, 혼자 있기로도 결정하지 않은 날이었다. “혼자인데, 혼자이기 싫을 땐 언제든 연락해요.” 나는 오늘 그 말을 기억했다. 불쑥 그녀를 불러냈다. 한강진 근처에 널따란 서점 안 카페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기꺼이 나와준 그녀가 고마웠다. 돌연히 생긴 만남이 주는 설렘이 좋았다. 

우리는 한 시절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 사진을 찍으러 서울 곳곳을 다녔다. 사진을 통해 서로의 시선을 관찰했다. 내가 본 그녀의 시선은 선이 분명하고 파스텔 색이 났다. 서로 눈을 떼지 못하고 대화하다 그녀가 내 글의 주인공이기도 했다는 걸 떠올렸다. 지금도 성실하게 삶을 사랑하는 그녀가 고마웠다. 내 글을 보며 힘을 내곤 한다는 말에 으쓱해졌다. 만나기 잘했다. 가을바람이 불어오니 ‘불현듯 한 만남'을 이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이 떠올랐다. 안부를 묻자 내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기차로 몇 시간씩 가야 만날 수 있었는데, 이제 지하철로 십오 분도 안 되는 곳에 있다. 얼굴은 한번 봐야 하지 않을까. 지난번 길지 않게 만났을 때도 기차시간으로 헤어짐이 조급했었다. 그가 있는 곳으로 불쑥 찾아갔다. 그 사람 얼굴은 지난 겨울보다 야위었고 나는 까매졌다며 지난 내 여름의 소식을 물었다.

우리 대화는 종종 어긋났다. 그럼에도 우리가 다시 닿는 것이 궁금했다. 불현듯 다시 만난 그 사람의 등을 물끄러미 보다 쓰다듬으며 알게 되었다. 그 동안 서로가 가진 슬픔을 알아 본 것이었구나. “내 우울함이 전해질까 두려워요.” 아픔을 쏟아내니 꼿꼿했던 그가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우리가 함께 할 때 각자의 상처는 지워지기 보단 더 도드라졌던 것이다. 처음이었다. 그 사람 마음이 어긋나지 않고 전해졌다. 불현듯 생긴 이 만남은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A는 간혹 한 소리씩 한다. 늘 스케줄이 빼곡히 차있는 것 같아 불쑥 보고 싶을 때 만나기 어렵다며 서운해한다. 연인 사이도 아닌 동성 친구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니 교실 창문에 낯익은 얼굴이 서있다. A였다. 끝날 시간에 맞춰 학교 정문으로 온다 길래 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일찍 왔다. 내내 수업하는 것을 지켜 보았단다. 반갑고도 수줍은 마음이었다. 하루 중 가장 성실한 시간이었으니 평소의 내 모습과는 달랐을 것이다. 처음 보는 나의 '어른스런' 모습과 큰 목소리에 놀랐다는 말에 웃음이 났다. 가까운 이들은 본적 없는 교실에서 내 모습. 내가 일하는 곳과 나의 작은 사람들을 보고 싶었다는 애정은 친구의 갑작스런 방문을 통해 전해졌다.  

모든 틀에 짜여야 안정감을 느끼는 생활 속에서 어쩌다 한번씩 아니 종종 고정된 만남의 코드를 깨보는 것은 새로운 몸짓이다. 기계적인 삶을 잠시 미뤄놓고 얻는 헐렁헐렁함. 바르고 세련됨으로 얻는 ‘예측 가능한' 만남 너머에는 촘촘한 일상을 반짝거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어떤 일상도 내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요즘. 이 건조한 마음에 물을 주고 말랑말랑 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불현듯'한 만남을 통해서 아닐까. 누군가 내가 필요할 때 기꺼이 달려가 넉넉한 ‘곁'이 되고, 누군가를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 내 삶에 불현듯을 허락해야겠다. 가을과 함께 온 익어가는 마음이다.7c43f00d45307e91bad8a06df05816bb_1508176547_972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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