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에서 어린 정조의 마음을 읽다

기사 이미지

[수원 화성의 서쪽 문인 화서문은 반달 모양의 옹성으로 둘러싸여 있다.]


역사통 기자단 3기가 수원 화성으로 마지막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수원은 조선의 22대 왕 정조가 아끼던 도시입니다. 한양과 전국을 잇는 길목에 위치한 장점을 활용해 수원을 상업이 발달한 새 도시로 만들고자 했죠.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수원 화성 성곽에는 개혁을 향한 정조의 노력이 남아 있어요. 백성의 삶을 살피고자 했던 정조의 마음이 담겨 있는 수원 화성을 역사통 기자단이 다녀왔습니다.

 

조선의 장군이 되다 ③ 수원 화성


수원 화성 곳곳에 어린 정조의 마음을 읽다


 

[장안문]


전국의 물자가 드나드는 문, 장안문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왕위에 오른 정조가 외친 첫 마디입니다. 죄인으로 몰려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였죠. 1789년(정조 13년) 정조는 명당으로 꼽히는 수원의 ‘화산’으로 아버지의 묘를 옮기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화산에 살던 주민들을 팔달산 아래로 이주시켜 새로운 도시를 만들기로 하죠. 그곳이 현재의 수원입니다.

수원 화성은 도시가 형성되고 5년 후인 1794년부터 2년 9개월에 걸쳐 완성됐습니다. 읍성에서 살다 전쟁이 나면 산성으로 피해 싸우던 기존 성곽과 달리 생활 공간인 동시에 군사적 기능을 갖춘 5.7㎞의 도시 성곽이죠. 설계부터 동원된 사람·장비 등 건축 과정을 전부 화성성역의궤 란 책으로 기록한 화성은 조선 후기 건축 문화의 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역사통 기자단의 답사는 수원 화성의 정문 ‘장안문’에서 시작됐습니다. 수원화성의 북쪽에 위치한 장안문은 사방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해 유통과 방어 기능을 두루 갖추고 있어요. 단단한 돌 축대 위에 2층 누각을 올려 멀리까지 내다보게 했고, 반달 형태의 옹성으로 성문을 이중으로 막아 적의 접근을 어렵게 했죠. 옹성의 벽은 벽돌의 장점을 강조한 실학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벽돌로 축조되었어요. 벽돌은 당시 새로운 전투 방식으로 등장한 ‘화포’의 공격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고 복구가 쉽습니다. 또 돌에 비해 크기가 작아 다양한 모양으로 건물을 쌓기에 유리하죠.

장안문은 전국으로 물자가 유통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한쪽 모퉁이에 문이 나 있는 남한산성 옹성과 달리 장안문의 옹성 문은 한가운데에 나 있어요. 길이 사방으로 통하고, 팔방으로 닿아있다는 ‘사통팔달’의 의미가 담겨 있죠. 평소에는 옹성 문을 열어 두어 전국에서 올라오는 물자가 드나들 수 있게 했고, 전쟁이 나면 문을 닫아 방어했어요.

 

기사 이미지

[성 밖으로 나와 북서쪽 성벽을 걷고 있는 역사통 기자단.]


군사 도시로 거듭나기 위한 성곽 시설물

기자단은 옹성 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와 북서쪽 성벽을 따라 걸음을 옮겼습니다. 화성의 성벽은 일정한 모양으로 다듬어진 돌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형태예요. 정조는 먼 곳에서 돌을 무겁게 가져오는 것보다 미리 다듬어서 손쉽게 운반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 판단했죠. 화성 근처의 숙지산과 팔달산에서 돌을 캐 다듬은 후 옮기도록 했는데, 운반한 돌의 크기에 따라 품삯을 주었습니다. 일꾼들은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어서 열심히 돌을 날랐고, 짧은 기간 안에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죠.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다양한 군사 방어 시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장안문의 서쪽에 위치한 ‘서북적대’는 성문을 지키는 역할을 합니다. 성벽에서 튀어 나와 적을 앞과 옆에서 동시에 막는 방어시설인 ‘치성’이 변형된 시설이죠. 적대의 벽 곳곳에는 구멍을 뚫어 환기구로 사용하거나 포가 나갈 수 있도록 했어요.

그 옆에는 적대와 비슷한 모양의 ‘북서포루(北西砲樓)’와 ‘북포루(北鋪樓)’가 보입니다. 이름은 같지만 역할은 달라요. 북서포루는 화포를 쏘기 위한 용도이고, 북포루는 병사들이 몸을 숨기기 위한 곳입니다. 가까이서 보면 비슷하게 생겼지만 뒤로 물러서서 보면 그 차이를 비교할 수 있죠. 북서포루는 적의 화포 공격을 막기 위해 성벽을 벽돌로 만들었고, 성벽 아래를 비워 화포를 감출 수 있도록 했어요. 성벽 안쪽 지붕 부분은 잘려나간 맞배지붕 모양으로 길이가 긴 무기를 움직일 때 편리하게 했어요. 반면 북포루의 구조물 아랫부분은 돌, 윗부분은 벽돌로 쌓았고, 성벽 위에는 건물을 지어 병사들이 몸을 숨길 수 있게 했죠.

기사 이미지

[서북 공심돈]


북서쪽 성벽 끝에는 수원화성의 서북·남·동북 3곳에만 있는 ‘공심돈’이 자리합니다. ‘속이 비어 있는 돈대’라는 뜻의 공심돈은 지대가 높고, 튀어나온 곳에 설치되어 있죠. 3층 높이의 건물 속을 비우고, 각 층마다 화포를 감춰 둔 후 공격할 때 쏘도록 했어요. 성벽 높이까지는 탄탄한 돌로 쌓고 맨 위쪽에는 벽을 만들었어요. 꼭대기 층에는 지붕을 씌워 병사들이 망을 보고, 몸을 감출 수 있게 했습니다.

 

기사 이미지

[화서문]


한양의 관문 역할을 한 수원 화성

화성의 서쪽에는 ‘화서문’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정문인 장안문에 비해 규모가 작죠. 수원 화성의 서쪽 지역 땅은 소금기가 많고, 산이 가까워 사람의 왕래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소박한 화서문에도 옹성을 둬 전략적으로 적을 방어할 수 있게 했어요. 화서문의 옹성은 장안문의 옹성과 달리 한쪽 귀퉁이가 열려 있는 모양입니다. 귀퉁이를 통해 들어온 적군을 옹성 위에서 집중적으로 공격해 ‘독 안에 든 쥐’로 만들 수 있죠.

화서문을 통해 다시 성 안으로 들어와 서쪽 정상에 오르면 장군이 지휘를 내리는 ‘서장대’에 도착합니다. 서장대는 수원 화성의 가장 높은 곳인 팔달산 정상에 위치해 아군의 움직임과 적군의 동태를 동시에 파악할 수 있는 곳이에요. 이곳에서 큰 전쟁을 치른 적은 없지만, 전투 훈련은 정기적으로 했습니다. 서장대 2층 누각 꼭대기에서 장군이 명령을 내리면 아래층의 병사가 깃발을 흔들고, 깃발 신호에 따라 화포를 쏘는 훈련이었어요. 야간 훈련이 장관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서장대에 걸린 ‘화성장대’란 편액(현판)은 정조가 직접 썼다고 해요.

 

기사 이미지

[서장대]


서장대에서 수원 시내를 내려다 보면 전국 각지와 연결되어 있는 교통로가 보입니다. 한양의 남쪽에 위치한 수원은 경상도·전라도·충청도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요. 수원에서 한양까지 하루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기 때문에 한양의 관문 구실을 했죠.

정조는 수원이 가진 지리적 장점을 활용해 변화를 주도하는 경제 도시를 만들 계획을 세웁니다. 청나라를 통해 외국의 신문물이 들어오고, 농업이 아닌 상공업 중심의 사회가 등장하던 시대적 변화를 미리 읽었던 거예요. 개혁을 꿈꿨던 정조는 수원이 교통의 중심지로써 상공업을 이끌 수 있다고 판단했고, 조선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정조는 전국 8도의 부자들과 상인들을 수원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어 집을 짓게 하고, 우시장을 활성화시켰어요. 상업 활동을 하기에 좋은 위치에 든든한 경제 정책까지 지원되니 전국의 부유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5년 만에 5000여 명 인구가 사는 도시가 됐죠. 조선시대에 5000명 이상 사는 도시는 31곳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니 꽤 성공적이라 할 수 있죠. 지금도 수원은 남북과 동서를 잇는 고속도로와 호남선, 경부선 등 전국으로 향하는 열차가 지나는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어요. 200년 앞을 내다본 정조의 도시 계획의 힘이 얼마나 큰 일이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기사 이미지


김민형 역사통 기자단 3기

“수원 화성 성벽 길을 걷다 보면 일정한 간격으로 꽂혀 있는 깃발을 볼 수 있어요. 북쪽에서는 검은색 깃발을, 서쪽에서는 흰색 깃발을 찾을 수 있죠. 깃발 색이 다른 이유는 성벽의 구역을 깃발의 색깔로 표시했기 때문이에요. 오방색으로 방향을 표시해 남쪽의 팔달
위는 붉은색, 북쪽의 장안위는 검정색, 동쪽의 창룡위는 청색, 서쪽의 화서위는 흰색 깃발을 꽂아 두었어요.”

 

기사 이미지

김태민 역사통 기자단 3기


“정조는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린 왕이었어요. 성곽을 축조할 때 백성의 입장을 고려해 많은 혜택을 주었죠 더운 여름날에는 휴가를 주었고, 건강을 염려해 약·모자·무명·음식 등을 내려 성곽 공사에 참여한 백성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어요. 백성들은 적절한 보상과 공정한 평가에 힘을 받아 성실하게 공사에 참여했고, 10년을 계획한 성곽공사를 2년 9개
월 만에 끝마칠 수 있었어요.”


글=이민정 기자 lee.minjung01@joong ang.co.kr, 동행취재=역사통 기자단 3기(서울 한산초), 사진=우상조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