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쉽게 풀어 보는 한국사 수업] 공주 석장리 유적

 

한반도 문화, 구석기 이전 시대까지 증명한 공주 석장리 유적

문명의 보고 공주 유적, 무령왕릉 포함해 왕과 왕족들 무덤 많아

 

 

공주(웅진)는 여러 번 탐방을 한 곳이다. 수학 여행단을 이끌고, 지인들과 함께, 가족들과 함께 다녀 온 곳이기 때문에 공주는 왠지 친근감이 든다.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백제 시대에는 두 번째로 도읍(475~538)을 정한 곳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문명의 고속도로’와 같다. 공주에는 우리나라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공주 공산성(사적12)과 공주 송산리 고분군(사적 13)이 있다. 공산성은 웅진에 도읍하였던 475년부터 부여로 천도한 538년까지 백제의 왕성이었다. 송산리 고분군에는 무령왕릉을 포함하여 웅진 도읍기에 재위하였던 왕과 왕족들의 무덤 7기가 모여 있다. 아마 여러분들은 무령왕릉 때문에 공주를 기억할 것이다.

석기 시대는 구석기와 중석기, 신석기 시대로 나누는데, 돌을 가공하여 생활을 영위하는 시대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 세 시기에 있어서 돌은 석기 시대 사람들에게 신체적 결함을 보강하는 재료(또는 도구 및 무기)로 사용되었으며 직립보행을 하게 됨으로써 자유로워진 두 팔을 이용하여 돌을 가공ㆍ사용함으로써 인류의 문화가 탄생하게 된다. 충남 공주 석장리 유적은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 중에 한 곳이다. 유적에서는 석기와 함께 사람과 동물의 뼈 화석, 동물 뼈로 만든 도구 등이 출토되어 구석기 시대의 생활상이 밝혀지게 되었다.

 

구석기 시대 생활은 주로 채집과 수렵에 의존하였다. 특히, 동물을 사냥하기 위해서는 집단적인 협동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일정 규모의 공동체 생활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실은 석장리의 집자리 유적이 8~10명 정도의 인원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 되고 있는 점을 통해 증명되고 있다. 그리고 소박하지만 사람이나 동 물을 조각한 유물이 보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구석기인들의 예술 활동을 추측할 수 있는데, 이러한 활동은 주로 주술적인 신앙과 관련 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적의 존재는 1964년 5월 홍수에 의해 강둑이 무너짐으로써 확인되었다.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는 1964년 11월에 처음 이루어진 이후 1974년까지 10년 간에 걸쳐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1990년과 1992년에 조사가 추가로 실시되었다. 그 결과, 불모지와 같았던 우리나라 구석기 문화의 체계를 세워 놓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를 구석기 시대까지 올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석장리 유적은 제1·2지구로 나뉘는데, 1지구에서는 후기 집터 층에서 2만 8천 년 전과 그 아래층에서 3만 6백 년 전의 연대가 밝혀졌다. 2지구에서는 절대 연대가 밝혀진 것은 없으나 여러 층위에서 사람이 살았으며, 그들의 석기 제작 기술은 외날 찍개, 양날 찍개, 이른 주먹도끼, 발달된 주먹도끼 및 격지, 긁개, 돌날석기, 새기개, 좀돌날 등의 단계를 거쳐 발달하였다. 

 

조사 결과, 석장리 유적은 전기 구석기부터 후기 구석기까지 형성된 문화층으로 밝혀졌다. 중기구석기 성격을 지닌 자갈돌 찍개 문화층은 따뜻한 기후 아래 이루어진 것으로 그 아래쪽의 찰흙층에서 산화철이 굳어서 이루어진 뿌리테가 나왔다. 이 층 의 석기들은 아슐리앙 전통의 주먹 도끼, 돌려떼기 수법의 몸 돌, 격지돌이 있어, 7만~6만 년 전 쯤으로 추정된다.

석장리 선사 유적에서 발굴된 석기는 전기, 중기, 후기 등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사용한 석기가 각 시기별로 고르게 발굴되어 그때의 석기문화를 짐작케 한다. 그러면 석장리에서 발굴 된 석기를 중심으로 구석기 시대의 유물과 석기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자.

 

구석기 시대는 유인원에서 사람이 진화되어 연모를 만들어 쓴 때부터 농경이나 목축 또는 토기 제작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문화단계로 약 250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 사이에 해당된다. 이 기간은 지질 시대 구분으로는 제4기 홍적세로 온 세계에 걸쳐 적어도 4번의 얼음강 시대(빙하기)와 그 사이 3번의 따뜻한 시대(간빙기, 또는 빙온기)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지역은 얼음강 시대에도 그다지 춥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유적에서 발굴되는 짐승 화석과 토양에 남아 있는 꽃가루 화석의 연구 결과로 알 수 있다. 한편 얼음강 시대에는 바닷물 수위가 낮아져 중국이나 일본 지역도 걸어서 오갈 수 있었다.

구석기 시대의 오랜 기간 동안 누가 주인공이었는가에 따라 곧선사람(Homo erectus)의 전기 구석기, 슬기 사람(Homo sapiens)의 중기 구석기, 슬기 슬기 사람(Homo sapiens sapiens)의 후기 구석기 시대로 나뉜다.

전기에는 자작돌의 한 면만 떼어 날을 세운 외날 찍개, 양면을 뗀 안팎날 찍개, 거의 전체를 다듬어 사용 효과를 크게 한 주먹도끼류와 긁개, 찌르개 등의 석기들이 쓰였다.

중기에는 석기 제작 기술이 보다 발달하였다. 석기의 크기나 모양에 알맞은 격지를 쉽게 떼어내는 방법이 개발 되었다. 그리고 앞 시기보다 더 세련된 주먹도끼와 사냥돌, 긁개, 뚜르개, 톱날, 새기개 등이 사용 되었다.

후기에 이르면 뿔이나 뼈로 된 쐐기를 몸돌에 대고 힘을 주어 돌날을 떼어 내는 대고 떼기 수법과 이 방법으로 얻은 긴 돌날을 반듯하게 다듬는 수법이 발달한다. 후기 구석기 시대에는 이러한 돌날을 기본으로 삼아서 석기의 크기는 더 작아지고 정교해진다. 또 밀개, 새기개 같은 전문화 된 석기들이 만들어진다.

 

공주 석장리 유적이 지닌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가?

첫째, 우리나라의 문화 형성시기를 구석기 시대 전기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 둘째, 동북아시아 구석기 문화의 이해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셋째, 남한에서 조사된 최초의 구석기 시대 유적일 뿐만 아니라 문화층이 구석기 전기-중기-후기로 이어지는 연속성을 지니고 있어, 우리나라 구석기 문화의 연구에 기준을 제시해 주고 있다. 넷째, 석기 제작 방법을 통해 석기 용도와 당시의 생활상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였다. 다섯째, 연대 추정에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법을 비롯한 꽃가루 분석, 지층과 지질구조에 대한 해석 등 다양한 인접 과학을 활용함으로써, 합리적인 해석을 도출하고자 노력하였다는 점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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