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힘세설] 한글로 읽는 맹자(8) - 대인의 삶과 소인의 삶

나 혼자만이 아닌 타인을 배려하는 삶을 사는 자세가 중요

 

 

 

 

무엇 때문에 오늘을 사는가? 무엇을 위해서 내일을 살아야 하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모든 질문에는 정답이 없다. 정답이 있다면 이런 질문이 지금도 존재할 이유가 없다. 역사 이래 모든 철학자와 성인과 사상가들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궁리에 궁리를 거듭해 왔다. 그리고 나름대로 답을 내놓았다. 그 답이 세상사람 모두를 설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이 문제를 거듭 성찰하게 된다. 어쩌면 정답이 없다는 것이 다행인지도 모른다. 정답이 있다면 그 한 가지를 외우고 나면 끝인데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게 된다.

혹자는 물었다.

'깊은 산골에서 아들 딸 낳고 농사지으며 평생을 죄 짓는 일 없이 평화롭게 살았다면 그런 인생도 괜찮은 것 아닙니까?'. 은자가 대답했다. '물론 괜찮은 인생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100% 다 그렇게 살았다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인간문화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완전하게 자급자족할 수 있습니까? 입는 옷, 농사짓는 농기구, 집, 가구, 책 등등. 결국은 어딘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힘이 필요하고 사회의 힘이 보태져야 가능한 일입니다.'

나 한 사람이 어떻게 편안하게 살아갈까만을 생각하는 일과 여러 사람이 다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는 것은 사고의 방향과 크기가 다르다.

 

맹자는 말했다.

"큰 것을 따르면 대인이 되고, 작은 것을 따르면 소인이 된다."(從其大體爲大人 從其小體爲小人.)

이 말은 '여러 사람의 행복을 추구하면 대인이 되고, 자기의 행복만을 추구하면 소인이 된다.'는 말과 상통한다. 대인은 넓게 생각하고 소인은 좁게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여기서 말하는 대체(큰 것)와 소체(작은 것)는 무엇인지 맹자는 다음에 이렇게 말했다.

"원래 몸에는 귀한 부분, 천한 부분이 있고 소중한 부분, 쓸데없는 부분이 있다. 쓸데없는 부분을 위해 소중한 부분을 희생해서는 안 되고, 천한 부분을 위해 귀한 부분을 희생해서도 안 된다. 쓸데없는 부분을 키우는 데만 힘을 기울이는 자는 소인小人이 되며, 소중한 부분을 키우는 데만 힘쓰는 자는 대인大人이 된다."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는 "어떤 사람의 미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저녁 8시 이후에 무엇을 하고 있나 알아보면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맹자의 생각대로라면 그 사람이 귀한 부분, 소중한 부분에 시간을 쓰고 있나, 그렇지 않으면 천하고 쓸데없는 부분에 시간을 보내고 있나 보면 된다는 말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오랜 동안 어떤 일을 꾸준히 한다면 그 일의 성격에 따라서 결과도 당연히 달라진다. 카네기는 전보배달원을 하면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가 매일 밤늦게까지 읽었다. 은퇴 후에는 카네기재단을 통해서 미 전국에 약 2500개의 도서관을 지어서 기증했다. 카네기가 저녁마다 책을 읽고 있을 때 바에서 술을 마시거나 도박을 하던 친구들은 그 후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맹자는 큰 것을 키우고 큰 것을 따르라고 말한다. 그래야 대인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과연 맹자가 말하는 큰 것은 무엇인가. 다음 구절을 보자.

"마음이든 귀와 눈이든 다 같이 하늘이 준 것이지만, 이 두 가지 중 큰 것, 즉 마음으로 사물을 판단하면 작은 것, 즉 귀와 눈의 유혹에 끌리지 않게 된다. 그것이 바로 대인인 것이다." 고자장구 상15

마음을 키우고 마음을 따르는 것이 소중하고 큰 것이고, 눈과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즉 오관락五官樂-눈, 귀, 코, 혀, 몸을 즐겁게 하는 일-에 빠지는 것이 천하고 작은 것이라고 했다. 맹자는 소인이 돼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다. 대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대체를 따르고 소체를 따르는 사람은 소인이 될 수밖에 없으니 선택은 각자의 몫인 셈이다. 세상은 대인만으로 이루질 수도 없고 소인만으로 이루어질 수도 없다. 다만 대인은 사람을 부리고 소인은 부림을 당하는 입장에 설뿐이다.

개인의 삶을 통해서 볼 때는 대인의 삶도 소인의 삶도 함께 녹아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온전하게 한 가지만의 삶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두 가지 삶이 공존하면서 어느 삶에 더 가치를 두고 비중을 두느냐의 차이이다. 대인이 되는 것만이 최상이고 소인은 소멸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대인적인 삶과 소인적인 삶은 공존해야 한다. 차지하는 비율이 다를 뿐이다.

 

인삼녹용이 몸에 좋다고 해서 인삼녹용만 먹고 살 수가 없다. 다른 음식도 골고루 먹으면서 때로 인삼녹용을 먹을 때 그 가치가 드러나게 된다. 어느 삶의 가치가 소중하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온통 삶을 채우지 못한다. 삶의 중심 가치는 예로부터 지智 덕德 체體에 있다고 했다. 지금 말로는 지혜(지식과 정보), 마음(인품, 인격), 건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사실 어느 것 하나에만 치우쳐서는 안 된다. 건강이 최상이라고 해서 보약과 운동에만 열중해서는 안 되듯이 책만 보고 수양하는 데만 치중해서도 건전한 삶을 이루기 힘들다.

큰 뜻을 가지고 넓게 생각하며 공동체에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을 대인이라 한다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만족하는 사람은 소인이라고 할만하다. 그리하여 이 두 가지 요소가 자신의 삶 속에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늘 성찰하는 수양의 마음이 필요하다.

 

왕자 점墊이 물었다. "선비는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맹자가 말했다. "뜻을 숭상하는 일입니다." "뜻을 숭상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인의에 뜻을 둘 뿐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죄 없는 자를 죽이는 것은 인이 아닙니다. 자기 것이 아닌 데 빼앗는 것은 의가 아닙니다. 몸을 둘 곳은 어딘가 하면 인입니다. 걷는 길은 무엇인가 하면 의입니다. 인에 몸을 두고 의를 따르면 대인이 해야 할 일을 다 갖추는 것입니다." / 심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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