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수업] 고구려 광개토 대왕릉비

 

 

 

요동지방에서 남한강 일대까지 대제국 건설한 광개토 대왕, 그 역사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1,700여 년 전 만주의 드넓은 초원에서 정착보다 개척을 좋아한 고구려인은 지평선을 질주하고 수평선을 넘나들던 기마민족의 선발대였다.

영락대왕이라고도 불렸다. 본명은 담덕이고, 고국양왕의 아들로 고국양왕 3년(13세, 386)에 태자로 책봉되고, 18세인 391년에 즉위했다. 그는 소수림왕대의 체제 개혁에 힘입어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였다. 그의 비문에 보이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란 긴 시호(왕·왕비를 비롯해 벼슬한 사람이나 학덕이 높은 선비들이 죽은 뒤에 그의 행적에 따라 국왕으로부터 받은 이름)는 그의 영토 확장의 업적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수많은 전쟁을 통해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만주 지방은 물론 한반도 북부 지방에 이르는 동아시아의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광개토 대왕릉의 비는 414년에 광개토 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옛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지금의 지린성<길림성> 지안현<집안현>) 동북쪽 4.5km에 있다. 비의 높이는 6.39m, 각 면의 너비는 약 1.5m, 무게는 약 37톤이나 되며, 불규칙한 장방형(직사각형) 기둥 모양이다. 비의 4면에는 예서체로 된 44행 1,755자에 달하는 글자로 새겨져 있다. 글자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14~15cm이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짜여져 있다. 즉, 서두에는 고구려 건국자인 추모(주몽)의 신이한 출생이야기와 건국이야기, 대무신왕으로부터 광개토 대왕까지의 세계(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계통)와 약력 및 비의 건립 경위가 기록되어 있고, 본문은 광개토 대왕 재위 시의 영토 확장 사업의 주요 내용이 연도별로 새겨져 있으며, 국경지대의 통치권 확인과 왕도 정치를 구현하고자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끝으로 광개토 대왕의 무덤을 수호, 관리하는 묘지기 330호(집)의 출신 지역 이름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광개토 대왕비가 전해주는 사실들은 무엇일까?

첫째, 고대에 왜(일본)가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근거 자료) “변한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마한, 예, 왜인들이 모두 와서 사간다.” (삼국지)

둘째, 고구려와 백제는 굉장히 적대적인 나라였다. (근거 자료) “396년 대왕이 친히 백제의 왕성을 수군작전으로 함락시키고,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회군했다” (광개토 대왕릉비)

셋째, 신라와 왜는 굉장히 적대적인 나라였다. (근거 자료) “신라, 393년 왜의 침략을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의 실성을 볼모로 보내는 한편 …… (광개토 대왕릉비)

넷째, 백제와 왜는 굉장히 우호적인 나라였다. (근거 자료) “399년 백제가 서약을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광개토 대왕릉비)

다섯째,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은 나라다. (근거 자료) “399년,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왕에게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하여 성지를 부수고 …… (광개토 대)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 400년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지나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했다. 고구려군 이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적하여 임나가라(금관가야인 듯)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 ” (광개토 대왕릉비)

 

결론적으로 비문에는 광개토 대왕 일생에 걸친 성과를 정리하여 64개성과 1,400개의 촌을 점령하였다고 한다. 광개토 대왕은 총 7차례의 군사 활동을 통하여 고구려는 요동을 안정적으로 확보하였으며, 동북쪽으로 동부여 지역을 차지하면서 영토를 확대하고, 북방의 숙신도 정복하였다. 남쪽으로는 남한강 유역까지 확보하여 신라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근거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계속된 대외 팽창으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최강자가 되었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정치 제도를 완비한 대제국을 형성하여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서 힘을 겨루게 되었다. 곧 광개토 대왕의 정복활동을 통해서였다.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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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 대왕릉비(중국 길림성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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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 대왕릉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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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고구려 전성기의 세력 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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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린 성(좌)과 몽촌토성(우)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네 귀 달린 항아리 – 백제 의 수도였던 몽촌토성에서도 고구려의 전형적인 토기인 네 귀 달린 항아리가 발견되어 고구려가 위례성을 함락한 뒤 한동안 이 지역을 점령했던 사실을 알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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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명 청동 그릇(경북 경주) - 신라의 무덤인 호우총에서는 “을묘년 국강상 광개토지호태왕 호우십”이란 명문이 새겨진 청동 그릇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413년에 사망한 광개토 대왕의 3년상 행사(을묘년, 415)에 쓰였던 제사 용기로 보인다. 이를 통해 5세기에 고구려가 신라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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