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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안경'의 전파 따라 삼만리...1만킬로의 문명교류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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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중앙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1-12-31 11:34 조회6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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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은 필수품이지만 천덕꾸러기 신세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거추장스럽기 때문이다. 안경을 꼈는데도 교정시력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도수를 높여줘야 한다. 그래서 라식·라섹 같은 보다 근본적인 수술 처방으로 사람들이 몰린다.


800년 전 세계화의 최신상품 '안경'

 가령 800년 전에는? 달랐다. 당대의 혁신 상품이었다. 지금의 스마트폰, 인터넷망 같은 존재였다는 거다. 별처럼 총기 많았던 옛 시력을 되찾아주는 기이하고 참으로 아름다운 물건이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그런 단편적인 관찰에 만족하지 않는다. 안경을 800년 전 세계화의 메타포(13세기에도 세계화 현상이 발생했다는 거다!), 그런 세계화를 가능케 했던 네트워크 공간이 존재했다는 증거로 본다. 안경과 안경의 재료인 유리가 어떻게 처음 만들어졌는지, 그것들이 어떤 경로를 거쳐 세계적으로 확산됐는지를 방대한 자료를 넘나들며 끈질기게 추적했다. 그래서 책 제목이 실크로드를 연상시키는 '글래시스 로드(Glasses Road)', 안경의 길이다.

중국에서 사용한 접이식 안경. 중국은 명나라 때 안경 수입이 본격화됐다. [사진 위즈덤하우스]중국에서 사용한 접이식 안경. 중국은 명나라 때 안경 수입이 본격화됐다. [사진 위즈덤하우스] 

여기서 네트워크 공간에 주목하자. 안경의 길은 선명한, 그러나 밋밋한 몇 개의 길들로 이뤄진 동서교역로 수준이 아니었다. 면적이나 최장 거리가 지중해(296만9000㎢, 4000㎞)는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인도양(7344만㎢, 1만㎞)이 안경 교류 네트워크의 배경 무대다.


이 거대한 공간에는 저자가 매듭, 접합부라고 표현한 도시들이 골고루 흩어져 있다.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자바·예멘·잔지바르·사마르칸트·호르무즈, 그리고 송·원대의 중국 동남 연해 도시들이다. 일일이 위치를 확인해보지 않아도 서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도시들인지 짐작이 된다.


이 도시들을 연결하는 최단 경로는 존재했겠지만 저자는 그보다는 이 도시들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교역 양상에 주목했다. 각 도시가 소속 "국가 밖에서 작동하는 법적 기제를 창출할 수 있는 자율 경쟁 상태" 아래 놓여 "수평적 확장성과 개방성"을 갖춘 공간을 형성했다는 거다. 프랑스의 중국 경제 전문가 프랑수아 지푸루의 네트워크 개념을 참조했다. 어쨌든 이런 수백 년 전 네트워크 공간을 자유롭게 오간 당대 세계화의 첨단 상품이 안경이었다는 거다.


 이런 뼈대 안에 저자는 장기를 채우고 살을 입힌다. 빼어난 유리 제작 기술이 어떻게 아랍에서 싹틀 수 있었는지, 중국과 조선·일본에는 안경이 언제 처음 전파됐는지, 당시 동아시아인들의 눈에 안경이 얼마나 신기한 물건으로 비쳤는지, 근대를 바라볼 때 우리가 느끼는 아련한 심정까지 자극하는 흥미로운 장면들을 치밀한 고증을 거쳐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신윤복 풍속화의 안경 쓴 선비. 조선의 안경 수입은 17세기 들어 급증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신윤복 풍속화의 안경 쓴 선비. 조선의 안경 수입은 17세기 들어 급증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박물지(博物誌)나 미시사의 성격을 뛰어넘는 넓은 시야도 펼쳐 보인다. 13세기 세계화는 지금보다는 느릿한 것이었을 텐데, 당대의 패권국가는 어떤 나라였는지, 국경과 바닷길을 틀어막는 쇄국정책을 폈던 명·청의 중국은 어떻게 세계화의 흐름에서 소외되지 않을 수 있었는지도 살폈다.


그런 작업 끝에 저자는 16세기 이후 대항해시대를 열어젖힌 유럽 국가들의 본격적인 세계 경영조차 유라시아 교역 네트워크에는 부분적인 영향력만을 끼칠 수 있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서구 일변도의 근대화 가설에 대한 반론으로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책은 학술서적의 흔적을 완전히 벗지 못한 듯하다. 일반인이 읽기에는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인내 한도를 초과하는 오자(誤字)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작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역작에는 사연도 있기 마련이다. 이름 없는 지방대 연구자에게 출간 제안을 해준 출판사가 고마웠던 것도 집필 이유라고 밝혔다. 5년 넘게 200권이 넘는 관련 서적을 파헤친 결과물이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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