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을 위한 화해와 상생의 정신 -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중심으로 > 칼럼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칼럼

시사 | 평화통일을 위한 화해와 상생의 정신 -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중심으로

페이지 정보

작성자 오강남 박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12-23 07:59 조회1,952회 댓글0건

본문

758783364_hYG6Cco4_cffabfa44080d1c24a3c787c006cb64086be5035.jpg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명예교수/종교학)


들어가는 말 


먼저 이런 뜻있는 자리에 초대해 주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밴쿠버 협의회 정기봉 회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통일 전문가가 아니라 사양을 했는데도 재차 부탁을 하셔서 수락을 했습니다만 이런 자리에 제가 평소 생각하던 것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통일문제를 전문으로 탐구하는 정치학자나 경제학자도 아닙니다.  동양 사상에 관심을 가진 종교학자입니다. 오늘 이 기회에 통일 문제를 우리가 늘상 받들어오던 통념을 깨고, 지정학이나 경제적, 군사적 견지에서가 아니라 사상 차원에서 생각해 보는 자리라는 것이 제게는 특별한 기회라 여겨져 이 자리에 임했습니다.  통일문제에 대해 정치, 경제, 군사 문제를 포함하여 폭넓게 연구하시는 전문가 분들이 계시는데 이런 식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송구스럽기 그지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왕 불러주셨으니 제가 평소 생각하던 동양사상 중에서 통일과 평화 화해 협력에 관련된다고 생각되는 것을 중심으로 몇 가지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어디까지나 비전물가로서의 접근이라 이해하시고 가볍게 들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통일에의 염원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한국 사람치고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한국 사람이라면 이런 통일의 염원을 다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요즘 젊은이들 중에는 통일비용 때문에 통일을 반기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고 있습니다. 통일비용보다 통일효과가 훨씬 크다는 사실을 묵과한 결과라 생각합니다.  아무튼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반세기가 훌쩍 넘도록 이런 노래를 계속 부르며 통일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남북이 통일되기를 바라는 것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통일을 좋아하는 백성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은 좀 달라졌습니다만, 제가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여럿이 모여 식당에 가서 음식을 주문하게 될 경우, 주로 "냉면으로 통일하지" 혹은 "비빕밥으로 통일할까?" 하는 것이 예사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학교에서 교복을 통일하고, 머리 길이, 줄지어 서는 것, 교실에 앉는 것 등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통일"이 되는 것을 좋아 했습니다.  직장에서도 무슨 "단합대회"니 해서 직장 동료들 간의 "통일"과 결속을 공고히 하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나 정치계에서도 "국론통일"이나 "국민총화"라고 해서 모두 "통일"된 의견과 견해를 갖자고 했습니다.  해외 동포 사회에서도 어디 가나 교민들의 단결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일에 통일되기를 좋아하는 나라에서 왜 통일을 못하고 남북이 서로 갈라져 살아야 하는 것일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북 간은 물론 사회집단이나 종교 단체 사이에서도 사분오열. 불화와 불협화음이 크게, 그리고 자주 들리는 사례가 왜 그렇게 많은지 이해하기 곤란합니다.


통일을 저해하는 통일에의 염원


저의 생각을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통일을 그렇게도 좋아하고, 무엇이나 통일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직선적이고 저돌적인 태도가 바로 아이러니컬하게도 진정한 의미의 통일을 저해하는 가장 결정적 요인 중 하나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덮어놓고 통일을 좋아하는 그것이 바로 통일에의 걸림돌이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아이러니나 역설로 들립니다만 이런 이상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배경을 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통일"이라고 할 때, 우리는 이 말을 크게 두 가지 종류로 사용합니다.  하나는 여럿이 어느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뭉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두 무조건 단색적으로 똑 같이 한 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영어로 하면 "unity"와 "uniformity"의 구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자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서로 보완관계, 상생관계를 가지고 "화합"하는 것을 의미하고, 후자는 누구나 무슨 일이 있든 한 색깔, 한 모양, 한 생각, 한 행동으로 똑 같아야 한다는 "획일성(劃一性)"을 뜻합니다.  


 Unity는 음양이 서로 다르면서 둘 다 함께 "태극"이라는 변증법적 종합으로서의 하나를 이루는 것이고, Uniformity는 음양이 한 가지로 음이 되든지 양이 되든지 둘 중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전자는 이것'도' 살리고 저것'도' 살린다는 뜻에서 이른바 "도도주의"라고 할 수 있고, 후자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둘 중 하나로 하나가 된다는 이항대립(移項對立)이나 양자택일(兩者擇一)의 의미에서 "냐냐주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어로 하면 전자는 "both/and"요, 후자는 "either/or"입니다.  사실 동양사상은 물론 세계 종교의 심층을 보면 모두 이렇게 다름이 화합을 이루는 both/and를 이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가로 세로의 조화를 나타내는 기독교의 십자가나 동그라미 둘을 일부 겹치게 해서 겹쳐지는 부분을 나타내고 있는 물고기, 삼각형 둘을 겹치게 한 유대교의 다윗의 별, 불교의 만(卍)자 등이 그 양극이 상생 관계를 가진 다는 양극의 조화라는 진리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냉면으로 통일하자"고 하거나 "교복을 통일한다"고 할 때의 통일은 이 두 가지 통일 중 후자에서 말하는 "냐냐주의"적 획일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획일주의적 통일은 요즘 같은 복합적이고 다원적인 사회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고, 설령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결코 바람직한 것이 못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통일, 참된 의미의 통일은 이런 것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획일화된 단세포적, 단색적 통일을 염원한다면 이런 통일에의 염원이야 말로 다양성과 개성을 존중하고 서로 모여 화합을 이룬다는 의미의 참된 통일을 불가능하게 하는 모든 말썽과 불화의 근본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이런 식의 통일은 "이 겨레 살리는 통일"이 아니라 이 겨레를 비롯하여 어느 집단이든 그 집단을 죽이는 일이라 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모두가 한 가지로 통일되기를 바라는 획일주의적 사회는 무엇보다 생명이 없는 싸늘한 사회입니다.  모두가 주어진 하나의 윤리 강령, 하나의 가치 체계를 가지고 그것만이 세상에 유일한 무엇인 것처럼 떠받들고 살아가도록 강요당하는 사회입니다.  지극히 권위주의적이고 독재적인 사회로서 개인의 자유스런 사고나 독립적 행위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모두가 하나의 권위나 체제에 복종해야 한다고 믿는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내가 남과 같지 않아도 못 견디고, 남이 우리와 같지 않은 것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개인의 창의성이나 독창성이 나타날 여지가 없습니다.  로봇처럼 명령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는 금속성 정확성만이, 그리고 죽은 듯 싸늘한 일사불란(一絲不亂), 모방과 눈치의 순응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말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다르다(different)"와 "틀리다(wrong)"가 동의어로 쓰인다는 것입니다.  사과가 오렌지와 "다르다"고 해도 되고 "틀리다"고 해도 됩니다.  다시 말하면 "너는 뭔가 다르다"고 하는 것은 곧 "너는 뭔가 틀리다"가 되는 셈인데, 이것은 나아가 "너는 뭔가 글러먹었다"와 통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나하고 다른 것은 모두 다 틀린 것, 글러먹은 것이라는 독선에 이르기가 십상입니다.


진정한 통일을 원한다면 이런 그릇된 의미의 "획일성으로서의 통일"에 대한 환상을 청산하고 서로 다름을 포용할 수 있는 정신 구조와 마음가짐을 다짐해야 하리라고 봅니다.  서로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만사가 똑 같아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사이좋게 지내려면 모든 면에서 꼭 맞아 떨어져야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서로 달라도 "틀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서로 다르면 어느 한 쪽이 틀려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계속 통일하자고 주장하는데, 실생활에서 감옥 같은 특수 목적을 위해 프로그램된 사회가 아닌 이상,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모두 통일되어야 한다는 고집이 있는 한 그야말로 융화와 화합으로서의 통일을 기대하기는 곤란한 일입니다.


오케스트라와 같은 혼잡한 음악을 집어치우고 한 가지 악기, 한 가지 음으로 통일된 음악(?)으로 뜯어고쳐야 좋겠다는 생각, 무지개의 여러 가지 복잡한 색깔을 단색으로 통일해야 시원하겠다는 생각, 모자이크의 다양한 돌멩이들을 모두 한 가지 모양, 한 가지 색깔로 통일해야만 더욱 아름다워지리라는 생각, 들판에 핀 온갖 종류의 풀, 꽃들을 모두 한 가지로만 통일해야만 그럴듯하겠다는 생각, 모든 학교를 모두 하나처럼 판판하게 되도록 평준화시켜야 발전이 있겠다는 생각, 도시에 있는 집 모양이나 지붕 색깔을 한 가지로 해야만 좋겠다는 생각, 국론을 통일해야 통일이 오겠다는 생각, 뭐니 뭐니 해도 남의 생각을 내 생각과 하나 되도록 통일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생각 등등은 모두 통일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된 것이고, 참된 의미의 통일을 방해하는 고질적 "통일에의 염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해답은 공자님이 말한 “화이부동”입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


참된 의미의 통일이란 물에 물 탄 것처럼 싱겁게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가지 목표, 한 가지 이상, 한 가지 구심점을 향해 서로 다른 것이 모여서 새로운 차원의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체의 독특성을 인정하면서 뭉치는 화합(和合)입니다.  『논어』에서 공자님이 말씀한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그 화(和)입니다.  오케스트라와 같이 조화된 음을 내는 것입니다.  모자이크처럼 조화된 모양을 내는 것입니다.  김치에 들어간 온갖 종류의 재료들이 어울려 조화스런 제3의 맛을 내는 것입니다. "다양성 속의 일치(unity in diversity)", 서로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권리를 존중하면서 하나 더 높은 차원의 무엇을 위해 공동의 노력을 경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화적으로 의견을 달리할 수 있다는 데 합의한다(We agree to peacefully disagree.)"의 태도입니다.  "같지 않지만 어울린다"는  의미에서는 "부동이화(不同而和)"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조화스런 관계가 이루어지려면 먼저 서로 달라야 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서로 다른 것은 조화를 이루는 방해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필수 요건"이라는 사실입니다.  서로 다른 것이 없는 데는 조화라는 것을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무조건 상대방의 개성이나 의견을 짓누르거나 그 생각을 억누르고 꺾어버리려는 전체주의적, 권위주의적, 획일주의적 사회, 그런 마음 바탕에서는 서로 어울려 하나가 된다는 참된 의미의 통일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통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보다 진정으로 남의 의견을 존중하고 거기에 귀를 기울이는 열려진 마음, 상호 존중과 신뢰의 분위기가 선행되어야 할 줄로 압니다.  특히 힘있는 쪽에서 먼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노자님의『도덕경』제61장에 보면 "큰 나라는 작은 나라 아래로 스스로를 낮춤으로 작은 나라를 얻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향해 내려감으로 큰 나라를 얻습니다."고 했습니다.  남북 관계에서 남쪽이 스스로를 낮추는 일이 먼저라 생각합니다.  큰 강이 되려면 다른 지류들보다 낮은 데 위치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껏 한 말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일종의 "다원주의적 시각"을 함양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동양사상은 다원주의적 시각을 강조한 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교적 용어로 하면 7세기 통일신라시대 원효대사가 한 "화쟁(和諍)" 사상입니다.  원효는 그의 유명한 “화쟁론”에서 일종의 다원주의적 시각을 강조합니다. 그는 실재에 대한 논의에서 우리가 당면하는 여러 가지 상충되는 범주들, 예를 들어 있음(有)과 없음(無), 빔(空)과 몸(體) 등을 다룰 때, ‘어느 한 쪽의 견해에만 집착하면’ 우리는 결국 실재를 분명히 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어느 한 면을 절대화하는 우를 범하지 말고 양쪽을 보완적으로 보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화엄(華嚴)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과 함께, 원효가 제창한 이런 다원주의적 시각이 통일을 염원하는 모든 이들의 정신적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얼마전에 Youtube에서 ‘황순원 학’이라는 검색어를 통해서 알버타주 남서쪽 조그만 도시 Lundbrek의 한 고등학교 Alan TheFriesen이라는 선생님이 황순원의 ????학鶴????이라는 단편소설을 해설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남으로 피란 갔다가 치안대원으로 돌아온 성삼과 삼팔선 부근 북한에 남아 있던 빈농 덕재라는 두 친구 어떻게 서로 돕게 되는가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두세 마리 학이 멀리 하늘로 날아가는 마지막 장면처럼 서로 돕는 “한국 정신은 계속 살아있어야 한다(Korean spirit must live on.)”라고 강조하였습니다.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공동의 목표


그러면 우리 한민족은 무슨 목표, 무슨 이상, 무슨 구심점을 두고 서로 화합하고 뭉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물론 제일 먼저 떠오르는 목표로 한반도의 평화와 한(韓) 민족의 공동 번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남북이 통일 내지 협력 관계를 수립한다면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문화적으로나 경제적, 국제적으로 훨씬 평화스럽고 번영된 조국을 실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남한만 가지고도 세계 10대 무역국이 되고 군사적으로도 상위 몇째 가는 위치에 있습니다.  또 문화적으로도 지금 한류로 K-drama, K-pop, K-movie, K-food, K-방역의 물결이 세계를 휩쓸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북이 화해 협력하면 여러 면에서 그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사소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공동체 EU가 하나의 목표를 위해 뭉친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하나의 민족 공동체인 남북이 지금과 같은 대치상태에서 서로 으르렁거리며 살 이유가 무엇인가 다시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급한 인간화 과정


저는 종교학, 특히 동양종교를 전공한 배경 때문에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제도 결국은 더 깊은 종교적, 철학적, 형이상학적 원리에 기초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저는 지금 한국이 안고 있는 제일 큰 문제가 "비인간화(非人間化)"와 "소인배(小人輩) 공화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이런 현상을 타개하는 데에 우리 모두가 힘을 합해야 진정한 의미의 통일도 가능해지고, 또 인간답게 사는 통일 조국이 탄생될 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공자(孔子)님은 인간으로서 해야 마땅한 올바른 일, 곧 의(義)를 위해 사는 사람을 군자(君子)라고 하고, 자기의 사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 곧 이(利)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을 소인(小人)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세계가 거의 의(義)보다는 이(利)를 좇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경제적으로 부하다는 나라에서 경제적 가치를 최고의 가치로 떠받들고 경제지수(GNP)에만 신경을 쓸 뿐 이른바 "행복지수(GNH)" 같은 것은 거의 무시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세계적 추세이기는 하지만, 지금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하려고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한국에서 이렇게 경제적 이(利)를 추구하려는 의욕이 더욱 극심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주위를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람은 사랑하고 물질은 이용하라는 기본 원칙과 반대로 물질은 사랑하고 사람은 이용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경제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 경제를 위해 있는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경제라는 신을 섬기며 그 신의 표정 하나하나에 따라 희비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공자님의 시각에서 보면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의(義)를 위해 사는 군자나 대인의 나라이기 보다 모두 이(利)에 올인하는 "소인배 공화국"인 셈입니다. 


맹자(孟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맹자님이 양나라 혜왕을 찾아갔더니 왕은 “선생께서 이렇게 불원천리하고 오셨으니 우리나라에 이(利)를 주시겠지요.”라고 했습니다. 이에 맹자님은 왕을 향해 왕이 이를 말하면, 지금 말로 해서, 장관·공무원·국민들이 모두 이를 좇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하면서, 왕은 어찌하여 인의(仁義)를 말씀하지 않고 “하필 이(利)를 말씀하십니까(何必曰利)?”라 했습니다. 


맹자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인간은 모두 ‘네 가지 실마리(四端)’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입니다. 맹자님은 우리에게서 이 네 가지가 우리 속에 있어야 하는데, 이 중 하나라도 결하게 되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非人也)!”고 단언했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지금 남의 아픔을 보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됩니까? 저를 포함하여 일반인들은 물론 정치인, 종교인, 경제인, 사회지도자들 중 진정으로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고 “함께 아파함”(compassion)의 마음을 지닌 이들이 몇이나 될까 모르겠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싫어하는 마음, 겸손하고 양보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분간하는 마음은 또 어떻습니까? 위장전입을 하고 부동산 투기를 했지만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싫어하는 태도를 보이는 이도 별로 없고, 그것이 옳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어느 면에서는 그렇게 반칙이나 편법으로 사는 것을 ‘능력’이라 과시하기까지 합니다. 


서울에서 자동차를 타고 가보면, 거의 모두 “양보는 곧 죽음이다.”하는 식으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끼어들고, 이런 신념을 아침저녁 출·퇴근하면서 실천하고 확인합니다. 이런 운전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에 사양의 마음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런 물음을 놓고 우리 스스로를 냉철히 돌이켜보면 우리는 지금 모두 비인간화(非人間化)된 사회에 살아가고 있는 ‘인간 아닌 인간들’인 셈입니다. 


오늘 한반도에 사는 한민족이라면 모두 힘을 합해 이런 소인배공화국을 군자공화국 내지 대인공화국으로 바꾸는 작업, 비인간화된 우리 스스로를 다시 인간이 되게 하는 인간화(人間化) 작업에 힘을 합해야 하리라 믿습니다. 그야말로 “공자왈 맹자왈”, 너무 고답적이고 추상적인 이상이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이보다 더 근본적이고 시급한 과업이 어디 있겠는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게 될 수 있을까? 저는 이 문제가 지금 이 방송을 듣고 계신 분들을 비롯하여 의식 있고 양심이 있는 모든 이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연구해야 할 공동의 과제라 생각합니다.


심층을 보다


제가 그동안 비교종교학을 연구하면서 얻은 결론 중 하나는 모든 종교에 표층과 심층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표층과 심층의 차이를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표층 종교가 지금의 나, 욕심과 미움과 어리석음의 탐진치(貪嗔痴) 삼독(三毒)으로 찌든 이기적인 나를 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라면, 심층 종교는 지금의 나를 비우고 진정한 나, 참나를 찾는 종교입니다.  모든 종교 밑바닥에 흐르는 심층에는, 다석 류영모 선생님의 용어를 빌리면, 지금의 '제나'에서 벗어나 '얼나'를 찾으려는 노력이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얼나가 바로 신성(神性)이요 불성(佛性)이요 하늘입니다.  우리 나라 종교인 동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내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요, 내 속에 있는 한울님이 곧 진정한 의미의 '나'라는 인내천(人乃天)입니다.


내 속에 있는 참나만 신성이나 불성인가?  물론 이웃 속에 있는 이웃의 참나도 신성이고 불성입니다.  따라서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 같이 할 수 있고, 이웃 섬기기를 하늘 섬기 듯하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이 가능해집니다.  이런 가르침은 동학(東學)에서 가장 명쾌하게 나타나지만 거의 모든 심층 종교의 기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고, 공자님도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대학』과 통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유교 경전 『대학』에 보면 대학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여덟 가지 단계가 나옵니다.  격물(格物, 사물을 궁구함), 치지(致知, 앎의 정도를 극대화함), 성의(誠意, 뜻을 성실히 함), 정심(正心, 마음을 바르게 함), 수신(修身, 인격을 도야함), 제가(齊家, 집안을 꾸림), 치국(治國, 사회를 지도함), 평천하(平天下, 세계에 평화를 가져옴)입니다.


지금 대학이 거의 취직을 위한 준비 기관처럼 전락한 현실과 너무나 대조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유교 경전 『대학』과 지금의 "대학(university)"이 같다고 할 수 없지만,『대학』에 나오는 이 말은 적어도 고등 교육을 받는 목적이 취직이라는 것보다는 더 높고 원대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을 일깨우기에 족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다음 세대를 지도할 때 큰 배움의 궁극 목표는 남북통일을 포함하여 세계에 평화를 가져오는 데 일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시킬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통일 문제에 관해 오피니언 리더들인 평통 위원 여러분들의 책무가 막중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제 말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

주제어: 통일에의 염원, unity vs. uniformity, ‘도도주의’ vs. ‘냐냐주의’, both/and vs. either/or, 화이부동(和而不同), 의(義) vs. 이(利), 공자, 맹자, 노자, 동학, 류영모, 신성, 불성, 심층, 화쟁, 예수, 대학

=================================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칼럼 목록

게시물 검색
권호동
그레이스강
김경태
김양석
민동필
박혜영
서동임
심현섭
아이린
안세정
유상원
이경봉
이용욱
조동욱
조영숙
주호석
최광범
최재동
최주찬
한승탁
Total 78건 1 페이지
칼럼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78 시사 간첩이 어디 있습니까? 심현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7-19 760
77 시사 한인위상 최종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0-19 1137
76 시사 윗물이 맑아야 -국민 상위 시대 오강남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8-17 1556
75 시사 다시 출발하는 밴쿠버 한인회의 발전을 기대한다 심현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7-03 1598
74 시사 [외부투고] Pachinko를 읽고- New York Times bestseller book written … 최종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4-20 2117
73 시사 [늘산의 종교칼럼] 요한 계시록에 있을 것인데---. 늘산 박병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4-06 2836
72 시사 [외부투고] 해외동포 1천만 시대를 위하여 최종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3-08 2587
71 시사 [늘산 종교 칼럼] 손과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늘산 박병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2-26 2935
70 시사 “선교”가 뭐길래 오강남 박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2-16 2614
열람중 시사 평화통일을 위한 화해와 상생의 정신 -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중심으로 오강남 박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23 1953
68 시사 [샌디 리 리포트] WorkBC Assistive Technology Services (영어) 샌디 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17 2328
67 시사 [샌디 리 리포트] 직장인을 위한 : WorkBC 보조 기술 서비스 (한글) 샌디 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17 2189
66 시사 [늘산칼럼] 삼위일체 교라는 성경적인가 늘산 박병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1-18 2729
65 시사 [샌디 리 리포트] 트럼프 대통령은 소송으로 선거 결과를 뒤집을 수 있을까요? 샌디 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1-12 1948
64 시사 [이남규 목사 성경 이해의 기초]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내용의 차이 이남규 목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1-12 5313
63 시사 [샌디 리 리포트] Gordon Shank-Fibreglass to financial freedom: In… 샌디 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1-09 2198
62 시사 [샌디 리 리포트] Chris Chan-A Viral Market: Impact of the Covid-… 샌디 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1-09 1792
61 시사 [늘산 칼럼] 세례에 관하여 늘산 박병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9-30 2534
60 시사 [늘산 칼럼] 마태가 보았을 때와 누가가 보았을 때 늘산 박병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9-08 2254
59 시사 [오강남 박사의 심층종교] 믿음이면 다인가? 오강남 박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9-04 2396
58 시사 [한힘세설] 초콜릿 한힘 심현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5-13 2298
57 시사 [한힘세설] 최명길을 변호한다 2 심현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4-29 2348
56 시사 [김바울 번역가의 영자지와 한국 언론 논조 비교]김바울 번역가의 외국언론과 한국언론 비교분석. 김바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4-23 2361
55 시사 마스크 뒤에 감추어진 것 - Behind The Mask Elie Nessim, K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4-15 2737
54 시사 [한힘세설] 레티샤 최 수녀님 한힘 심현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4-15 2443
53 시사 [부활절 메세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 이흥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4-08 2623
52 시사 [한힘세설] 소록도의 마리안느와 마가렛 우리 곁에 사랑이 머물던 시간 --- 한힘 심현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4-08 2437
51 시사 [한힘세설] 상식의 허실 2 한힘 심현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4-02 2294
50 시사 [한힘세설] 상식의 허실 1 -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은 다 사실일까? 한힘 심현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3-26 2856
49 시사 왕께 다가가기 - Approaching the King Elie Nessim, K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3-12 2752
48 시사 하나님께 다가가기 - Approaching God Elie Nessim, K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2-14 3650
47 시사 엘리에셀의 기도 - Eliezar's Prayer Elie Nessim, K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1-17 3730
46 시사 [엄승용 박사 경제이야기] 2020 년 B.C. 경제 예측과 전망 엄승용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1-09 3227
45 시사 [엄승용 박사 경제이야기] 중국 경제 성장 하락 추세와 전망 (2019 – 2020) 엄승용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1-15 2546
44 시사 나팔절 - The Feast of Trumpets Elie Nessim, K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9-11 4143
43 시사 [엄승용 박사 경제이야기] 미중 관세 분쟁 격화 엄승용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8-27 3013
42 시사 메시아의 승리 - The Triumph of The Messiah Elie Nessim, K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8-14 2986
41 시사 [엄승용 박사 경제이야기] 2019년 하반기 B.C. 경제성장 업데이트 엄승용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8-14 2926
40 시사 [엄승용 박사 경제이야기] 2050년 미래 세계경제의 장기전망 엄승용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7-17 2958
39 시사 메시아의 빛 - The Light of The Messiah Elie Nessim, K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7-11 2874
38 시사 오순절 - Shavuot(샤부오트) Elie Nessim, K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6-14 3157
37 시사 [김바울 번역가의 영자지와 한국 언론 논조 비교] 2003년 이라크 2019년 이란? 북한? 김바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5-24 2888
36 시사 [엄승용 박사 경제이야기] 최근 미중 관세 분쟁 의 경제적 배경과 분석 엄승용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5-23 2968
35 시사 유월절 - The Passover (2/2) Elie Nessim, K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5-21 2579
34 시사 [김바울 번역가의 영자지와 한국 언론 논조 비교] 한미정상회담 인가 한북미정상회담인가 김바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4-19 4062
33 시사 유월절 - The Passover-1 Elie Nessim, K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4-17 2310
32 시사 [엄승용 박사 경제 이야기] B.C. 경제와 경기 전망 ( 2019 -2020) 엄승용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4-12 2971
31 시사 [김바울 번역가의 영자지와 한국 언론 논조 비교]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후. 배드딜보다는 노딜. 김바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3-21 3106
30 시사 [한힘세설] 감사하는 마음 - 감사란 무엇인가? 심현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3-08 5240
29 시사 [김바울 번역가의 영자지와 한국 언론 논조 비교] 하노이의 아침에서 맞이하는 제2차 북미정상회담. 김바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2-27 2827
28 시사 [한힘세설] 3∙1운동 100주년을 생각한다 심현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2-27 3155
27 시사 [한힘세설] 한국문화의 특징 : 山水文化 한힘 심현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2-07 2776
26 시사 [한힘세설] 국어사랑 나라사랑-어떻게 지켜낸 우리말인데.. 한힘 심현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1-31 2764
25 시사 [김바울 번역가의 영자지와 한국 언론 논조 비교] 한일 초계기 갈등 김바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1-31 2664
24 시사 [김바울 번역가의 영자지와 한국 언론 논조 비교] 2019년 ‘한국, 미국, 북한, 캐나다’ 새해 신년사 전… 김바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1-10 3044
23 시사 [김바울 번역가의 영자지와 한국 언론 논조 비교]제목: ‘멍’ 잡으려다 멍든 캐나다 김바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20 3115
22 시사 [김바울 번역가의 영자지와 한국 언론 논조 비교] 섬이 아닌 반도로 김바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1-26 2983
21 시사 [김바울 번역가의 영자지와 한국 언론 논조 비교]한미전작권합의(Wartime Operational Contr… 김바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1-08 2471
20 시사 [김바울 번역가의 영자지와 한국 언론 논조 비교] ‘승인’ 논란 답변 뒤에 감추어진 질문 김바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0-17 3537
19 시사 [김바울 번역가의 영자지와 한국 언론 논조 비교] 남북정상회담에서 한미정상회담까지 김바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0-04 3663
18 시사 [김바울 번역가의 영자지와 한국 언론 논조 비교] 비핵화와 종전선언 사이에서 말보단 행동을 외치다. 김바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9-28 3916
17 시사 [김바울 번역가의 영자지와 한국 언론 논조 비교] OFF the Record로 인해 캐-미에 NAFTA는 O… 김바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9-20 2966
16 시사 구원에 이르는 길 (1/4) Elie Nessim, Ke…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9-20 2749
15 시사 [김바울 번역가의 영자지와 한국 언론 논조 비교] 트럼프의 발언과 언론매체들의 냉탕과 온탕사이 김바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9-13 3312
14 시사 [주호석 칼럼] 누가 한인사회의 불신을 조장하는가 주호석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5-04 3665
13 시사 [주호석 칼럼] 노블레스 오블리주 주호석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4-20 3249
12 시사 [주호석 칼럼] 머슴이 어떻게 압니까 주호석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3-29 3937
11 시사 [주호석 칼럼] 전(前) 대통령 구속 유감 주호석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3-22 3903
10 시사 [주호석 칼럼] 이민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 보여주는 것 주호석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3-08 4572
9 시사 [한힘 세설] 한국의 세계 문화유산 - 백제역사 유적지구 심현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3-06 2723
8 시사 [한힘세설] 한글로 읽는 대학 심현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3-06 2455
7 시사 [주호석 칼럼] 두 얼굴을 가진 사람들 주호석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2-16 2506
6 시사 [주호석 칼럼] 아즈텍 제국 몰락의 교훈 주호석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1-19 3400
5 시사 [주호석 칼럼] 공(公)과 사(私)는 철저히 구별돼야 주호석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1-12 3180
4 시사 [주호석 칼럼] 한국도 선진국이 될수 있을까 주호석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01-05 3416
3 시사 [주호석 칼럼] 청설모와의 신경전을 끝내며 주호석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21 2975
2 시사 [주호석 칼럼] 재외 한국인 그리고 일본인 주호석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15 3330
1 시사 [주호석 칼럼] 캐나다 가치와 이민자 주호석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05 3311
회사소개 신문광고 & 온라인 광고: 604.544.5155 미디어킷 안내 개인정보처리방침 서비스이용약관 상단으로
주소 (Address) #338-4501 North Rd.Burnaby B.C V3N 4R7
Tel: 604 544 5155, E-mail: info@joongang.ca
Copyright © 밴쿠버 중앙일보 All rights reserved.
Developed by Vanple Netwroks Inc.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