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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동필 박사와의 일문일답] - ‘독립된 삶’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가장 큰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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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동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12-17 09:41 조회6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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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동필 박사와의 일문일답] - ‘독립된 삶’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가장 큰 욕망


◆ 사실 종속되어 살아가는 삶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뭔가 부정적인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살아가는 삶이 일반적이지 않나요? 예를 들면 직장에 의지해서 월급을 받고 살아가는 모습이라던가, 부모나 자식에게 기대서 살아가는 모습, 또는 종교나 종교인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모습들은 쉽게 볼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종속되어 살아가는 삶이라고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 먼저 예들 중에서 종교는 빼도록 하죠? 사실 종교에 사람들이 매달리는 것이 종교자체가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이 기록해놓은 기록물이잖아요? 불교의 경우 석가모니가 설법했다는 내용을 제자들이 적은 것이고 또 기독교의 예수에 관한 이야기들도 그 제자들을 통해 전해지는 내용이니까 실제로 석가모니나 예수의 이야기라고 볼 수 없잖아요. 학교에서 배우는 학생들이 아무리 요약을 잘 해도 빠지는 것도 있고 잘못 적는 경우도 있듯, 석가모니나 예수의 제자들이 아무리 기록을 정확하게 하려해도 그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러니까 종교에 매달린다는 의미가 실제로는 대부분 기록에 의존하거나 아니면 그 기록을 해석한 내용에 의존하는 경우이니까 종교가 아닌 사람들이 남긴 기록에 의지한다고 봐야죠. 


◆ 그러면 민 박사님은 종교를 부정하시나요? 석가모니나 예수의 존재도요? 


-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석가모니와 예수는 실존했던 인물들로 생각해요. 그리고 이 두 사람이 했던 일이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홀로 서서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보이고요. 종교단체의 광고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잖아요. 불교나 기독교 등 대부분의 종교에서 내세우는 것이 ‘홀로 설 수 있다!’ 또는 ‘독립된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다!’이니까요.  


◆ 그런 내용의 광고를 저도 본 적이 있어요. 그러면 결국 인간이 바라는 것이 독립된 삶이라는 뜻인데 독립된 삶이 도대체 뭘까요? 왜 이렇게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 이야기가 조금 옆으로 흐르는데 우선 간단하게 짚어보고 주제를 이어갈게요. 병아리가 알에서 깨기 전에 바깥 세상에 대해 알 수 있을까요? 바깥세상에 무엇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뚜렷하게 볼 수 있을까요? 


◆ 당연히 아니겠죠. 알껍질에 쌓여있는데 세상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겠죠. 감각 기관이 발달하면서 조금은 듣기도 하고 희미한 불빛 같은 것도 느낄 수는 있을지 몰라도요. 


- 정확하게 설명해 주셨네요. 이와 비슷하게 독립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독립된 삶이 어떤 것인지 조금 느낄 수는 있겠지만 뚜렷하게 볼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독립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겠다는 사람들 또는 기록에 의지해서 따라가죠. 예를 들면 승려, 목사, 또는 신부 등의 성직자를 따르며 배우려하고 성경 또는 불경의 내용을 익히려하죠. 독립된 삶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볼 수 있다면 굳이 이런 것들이 필요가 없잖아요. 자신이 볼 수 있는데 무엇에 의지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것 같네요. 그러면 원 주제로 돌아가서 질문을 드릴게요. 타인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삶을 굳이 벗어나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 어떻게 하다 보니 종교의 내용이 타인에게 의지하는 내용으로 연결이 됐는데, 같은 맥락에서 풀어볼게요.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처음에 직장을 잡았을 때 그 직장에서 최선을 다해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다른 직장을 알아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 부모나 자식에게 의지했다가도 서로 의견이 갈리면 오히려 타인만 못한 관계가 되는 경우도 있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 이 세 가지는 각각 다 다른 상황인데 하나씩 제 생각을 이야기해야 하나요? 


- 다르게 보여도 모두 하나의 뿌리에 그 근원을 두고 있어요. 


◆ 혹시 독립된 삶이 그 뿌리인가요? 


- 맞아요. 종교는 앞서 이야기했으니까 넘어가고 직장도 마찬가지죠. 내가 취업한 회사를 떠나 새로운 직장을 잡으려한다는 것 자체가 현재의 직장에 매달리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잠재되어 있다고 봐야죠. 또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도 서로 갈등이 생긴다는 것은 서로 살아가는 삶의 방향이 다르다는 뜻이니까 독립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고 봐야죠. 


◆ 꼭 ‘천상천하 유아독존’ 또는 ‘모든 사람은 고유하다!’라는 말과 비슷하게 들리네요. 


- 맞아요. 이 세상에 숨 쉬며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자신만의 고유함을 가지고 있어요. 같은 사과나무라도 똑 같지는 않으니까요. 마트 쌓여있는 사과들을 한 번 보세요. 똑 같은 사과가 존재하는지요. 무게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고 꼭지 모양도 다르잖아요. 


◆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야기를 ‘사람들은 종속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 잠재의식 속에는 독립된 삶을 꿈꾸고 있는 욕망이 있다!’라고 정리할 수 있나요? 


- 예. 말 그대로 알 속에 있으면서 껍질 밖에 어떤 세상이 기다리는지 직접 보고 듣고 맛보고자 하는 욕망을 품고 있죠. 하지만 가끔은 두려움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 혹시 두려움이 성직자와 일반인을 나누는 기준이 되나요? 성직자는 그 길을 가겠다고 용기를 내서 나섰지만 일반인을 그렇지 않으니까요. 


-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성직자라는 위치가 직업과 성인들의 가르침을 찾아나가려는 의지 사이 어디쯤 있다고 보이기 때문에 기준을 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어떤 생각으로 성직자의 길을 선택했는지는 당사자만이 알 수 있겠죠. 물론 그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짐작은 할 수 있겠지만요. 


◆ 성직자의 행동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고요? 어떻게요?


- 이야기가 또 옆으로 새는데, 간단한 예를 들자면 돈을 모으는데 초점을 맞추어 성인들이 남긴 이야기를 해석한다던가 아니면 성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사람들을 설득하는 방향으로 문구를 해석하는 것 등이라고 볼 수 있죠. 기록에 있는 성인들의 삶은 돈에 의지하지도 또 성적인 쾌락에 의지하지도 않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반대로 행동하니까 시작이 어디인지 짐작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 그렇게 볼 수 있겠네요. 그렇다면 다시 되돌아가서 종속되어 살아가는 삶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 나쁘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다만 종속되어 있으면 두 가지 극과 극의 삶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 중에 어떤 삶이 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의 여지가 당사자에게 있지 않을 뿐이죠.  


◆ 두 가지 극과 극의 삶이 어떤 삶이죠? 또 선택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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