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하와이 노동 이민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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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창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9-18 12:04 조회2,81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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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노동 이민 - 1
황성신문 1902년 12월 27일 자 2면, 하와이 이민에 관한 기사
최초로 하와이를 찾은 사진 신부(1910년)
1902년 12월 22일, 이 날 인천항에서는 인천내리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하와이 이민 121명이 고국산천을 등진 채 미국 상선 게릭 호에 오르고 있었다.
전년에 큰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사람이 많았던 데다가 국제 정세가 나날이 암울해져만 가는 상황이었다.
월미도 해상의 칼날 같은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게릭 호에 몸을 실었던 인천 사람들. 그들을 전송하러 부둣가에 나온 친지와 인척들은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서도 억장을 누르고 있었다.
마침내 출항의 뱃고동 소리가 바닷바람을 가르자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어쩌면 쇠망해가는 대한제국의 운명을 슬퍼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민을 떠나게 된 전말이야 어떻든 게릭 호가 인천항을 출발함으로써 한국은 공식적인 이민사의 첫 장을 열게 되었고, 인천으로서는 시민들이 대거 해외를 향해 첫 발을 내디뎠던 역사적인 사건을 기록하게 되었다.
‘하와이 군도로 누구든지 일신(자기 한 몸)이나 혹은 권속(한집안 식구)을 데리고 와서 주접(한때 머물러 삶)하고자 간절히 원하는 자에게는 편리케 주선함을 공고하노라.’
궁내부 안에 설치돼 이민 사무를 전담했던 수민원(총재 민영환)과 이민의 모집과 수송을 담당했으나, 사실은 하와이 사탕수수 재배자 협회 한국 대리점에 지나지 않았던 동아개발회사(지배인 데쉴러. 인천부 대리)가 합동으로 내건 이민 공고문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기후는 온화하여 심한 더위가 없음으로 각인의 기질에 합당하며 월급은 미국 돈으로 매월 15달러(일본 돈으로 30엔, 한국 돈으로 57원 가량) 씩이요, 일하는 시간은 매일 10시간 이며, 일요일에는 휴식함.’
1일 노동 시간을 10시간이라고 밝힌 이민 공고문은 ‘농부의 유숙하는 집과 나무와 식수와 병을 치료하는 경비는 고용주가 지급하고 농부에게는 받지 아니함’이라며 겉보기에는 좋은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인천, 서울, 부산, 원산 등지에 나붙었던 이민 공고문을 보고 선뜻 이에 응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기후가 좋고 일거리도 늘 있으며, 학비를 내지 않고도 자녀 교육을 시킬 수 있다고 선전해도 일찍이 서구 문물을 접해본 적이 없는 서민층으로서는 결단을 내리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전통적 유교주의 도덕관념에 젖어있던 이들에게는 돌아올 기약도 없는 머나 먼 타국 땅으로 훌쩍 떠난다는 것은 곧 조상에 대해 큰 죄를 저지르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반면에 일부 계층에게는 갑자기 몰아닥친 하와이 열풍이 새로운 신식 삶을 약속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비춰지기도 하였다. ‘신체 건강하고 단정한 사람은 여일(앞날)하고 장구한 직업 얻기가 더욱 무난하고 법률의 제반 보호를 받게 한다.’는 공고문의 내용을 쉽사리 뇌리에서 지워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인천내리교회 담임 목사 존스(George Heber Jones. 조원시)는 1902년 11월경 이민을 망설이는 사람들을 직접 설득하고 나섰다. 동양광산회사 인천 주재 사원으로 대시라은행을 경영하다가 동아개발회사를 발족시킨 데쉴러의 협조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존스 목사는 우선 교회의 유능한 청년들을 동아개발회사에서 일할 수 있도록 주선하는 한편 교인들을 설득해 이민의 길로 나서도록 권고하였다. 그는 당장에 교인 50명과 인천항 노무자 20여 명을 이민선에 오르게 할 수 있었다. 이민을 신청한 사람들은 전체의 65%가 문맹자였지만, 내리교회의 중진들이 이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은 특기할 일이다.
이 같은 현상은 존스 목사의 권유와 함께 당시 동아개발회사의 총무였던 내리교회 전도사 장경화의 활동에도 큰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교회가 안정수 권사와 홍승하 전도사를 최초로 해외 선교사로 파송해 이들과 동행케 했을 만큼 교회로서도 하와이 이민에 큰 관심을 가졌던 영향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1902년 12월 22일, 인천항을 떠난 이민 121명은 일본 고베 항에 도착해 까다로운 신체검사를 받았다. 이 신체검사에서 일행 중 20명이 탈락해 인천으로 돌아왔고, 남자 55명, 여자 21명, 어린이 25명 등 모두 101명만이 다시 게릭 호에 몸을 싣고 하와이로 향할 수 있었다. 1903년 1월 13일, 3주 만의 항해 끝에 게릭 호는 태평양의 고도 하와이 섬 호놀룰루 이민국 검역관의 신체검사를 받게 되고, 안질을 앓고 있던 15명은 끝내 상륙허가를 받지 못해 다시 인천항으로 되돌아오고, 남자 48명, 여자 16명, 어린이 22명 등 86명만이 항구에 오를 수 있었다.
한국 최초의 이민 86명, 인천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던 첫 이민자들은 그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파란만장하게 펼쳐질 미래를 향해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Oahu 섬 서북쪽 waialua 지역 Mokuleea 농장으로 향했다. 이들은 하와이 군도에 흩어져 있는 40여개의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에 적게는 30여 명, 많게는 2 ~ 3백여 명씩 집단을 이루며 살았다. 이들의 거처인 농막은 대개 사병들의 막사 같이 생긴 판잣집들이었다. 안에는 나무로 난간을 만들어 칸을 정해 침실로 썼고, 벽에는 석회를 칠했다. 말이 농막이었지 이들이 기거했던 곳은 짐승우리와 다를 바가 없었고, 하루 10시간의 중노동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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