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하와이 노동 이민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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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창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9-25 11:59 조회3,76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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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수수 노동자(하와이 주 자료보관소 소장 사진)
이렇듯 인천 출신의 이민 1세대들은 가혹한 노동에 혹사당하고도 하루에 남자가 1불 25센트, 여자가 50센트에서 65센트를 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이 돈을 큰돈으로 여기고 저축하거나 본국으로 송금하면서 망향의 애틋한 심사를 달래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노총각이었던 이민 1세대들은 종일 농장에서 일하다가 밤이 되면 농막에 모여 잠드는 일밖에 달리 정을 붙일 일이 없었다. 개중에는 자연히 향수병에 걸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기도 하고, 술과 노름으로 수중의 돈을 몽땅 날리는가 하면, 심지어는 아편에 탐닉하는 사람까지 나타났다. 점차 사탕수수 농장을 둘러싼 촌락의 풍기가 문란해지고 급기야 사회 문제로까지 대두되었다.
농장주 측이나 하와이 이민국은 풍기 문란의 주요 원인이 결혼 적령기를 넘어선 홀아비들 때문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이들의 결혼을 장려하게 되었다. 또한 사회 각계도 실상을 인식하면서 사진 혼인법을 후원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미국 정부의 동의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소위 사진 신부(picture bride)에게 입국이 허락되고, 영주권이 주어지게 된 것이다. 이 때 최초로 하와이를 찾은 사진 신부는 1910년 11월 28일 호놀룰루에 발을 내디딘 최사라 씨로 그녀는 이래수 씨의 신부가 되었다. 1910년부터 1924년 10월 까지 하와이에 도착한 사진 신부는 951명이었고, 미 본토에서도 151명의 신부가 하와이로 건너왔다. 이들은 사탕수수 농장의 홀아비들과 가정을 이루게 됐고 가정을 가지게 됨에 따라 한인 사회는 점차 안정을 되찾아갔다.
이즈음 한국이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자 이민 1세대들이 분연히 일어나 독립 운동에 투신하였다는 것은 하와이 이민사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대목의 하나다. 비록 초기 미주 한인 사회의 3대 거목이었던 도산 안창호, 우남 이승만, 그리고 박용만 장군의 지도 노선이 각기 달라 분열상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민 1세대들은 독립 정신을 크게 떨쳤다.
하와이를 거점으로 하는 민족 운동이 본격적으로 발흥돼 대한국민회는 그 조직을 미 본토에까지 확산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국민회 중앙 총회를 결성, 회장에 안창호, 부회장에 박용만 장군이 취임했다. 박 장군은 다시 하와이로 건너와 국민보의 주필로서 대한국민회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면서 민족 운동의 싹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승만이 하와이 민족 운동에 투신한 것은 1914년 태평양 잡지사를 창설한 이후의 일이다. 이승만은 3년 뒤 상해임시정부가 발표한 교민단조직령에 따라 하와이교민단을 결성하고 민족 운동 자금을 마련키 위해 노력했으나 미전역을 강타한 경제 공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민 1세대들 역시 경제 사정이 심각해졌다. 이승만은 교민단의 회비 징수가 어려워지자 상해임시정부의 재정을 지원하기 위해 5달러에서 5백 달러에 이르는 공채 증서를 발행했다. 이민 1세대들은 국도의 경제난 속에서도 14,021달러의 자금을 교민단을 위해 내놓았다.
이렇듯 이민 1세대들은 한 푼 한 푼 아껴 하와이와 중국 등지에서 펼쳤던 독립 운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광복이 되자 하와이 이민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이민의 출발지요, 고향인 인천에 대학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수십만 불의 거액을 보내 인하공과대학의 건립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승만이 결정적으로 기여한 점도 있었지만 인천 시민들도 큰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인천과 하와이의 혈연적 유대를 잊지 않기 위하여 그 이름을 ‘인하’라 한 것도 그렇거니와 오로지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여 건립한 민족대학이라는 점에서도 인하공대는 인천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것이다.
하와이 이민은 대한제국의 허가를 받아 공식적으로 시행된 것이지만 이민자의 모집과 수송 등, 초기 하와이 이민을 추진하는 데 있어 인천에 있던 한 기독교회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되고 있지 않았다. 교회의 미국인 목사가 나서서 신도들을 이민 대열에 끌어들인 것은 종교적인 이유도 잇었지만 선교와 무역이 거의 동일시되던 당시 풍토의 산물이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도들의 경우는 이민의 동기가 신앙이라는 종교적인 이유로 돌려지면서 사회경제적 동기는 은폐되지만, 항만 노동자 20여 명의 출항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들은 항만 내 최하층의 노동현장에서조차 중국인 노동자 등에 의해 구축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하와이 땅을 밟은 이민자들의 삶은 고달픈 것이었지만, 그들은 기독교 신앙이라는 정신적 일체감으로 어려움을 이겨갔는데 이 과정에서 인천 내리교회 출신 이민자들의 역할은 특기할만하다. 이들은 최초의 정치적 결사와 현지 교회의 설립을 주도함으로써 초기 하와이 한인사회가 구심점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초석을 놓았다. 정치와 종교를 독점함으로써 그로 야기된 분규에 의해 시련을 겪기는 했지만, 이러한 노력들이 일제하의 민족운동과 해방 후의 조국 재건 운동에 밑거름이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데쉴러 : 당시 주한 미국공사였던 H.N.Allen(알렌)이 조선정부와 하와이농장주협회 사이에서 하와이 이민을 적극적으로 주선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부임했던 그는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민씨 척족의 거두인 민영익을 치료해준 것을 계기로 고종과 친분관계를 맺었는데, 뒤에 인천에서 이민회사를 설립하는 David W. Deshler(데쉴러)의 도움으로 주한 미국공사가 되었다. 데쉬러는 알렌과 같은 오하이오 주 출신으로서 그를 아꼈던 계부 George K. nash(내쉬)는 오하이오 주 대법관을 거쳐 1899년에는 공화당 출신의 주지사로 당선된 정계의 실력자였다. 그리고 역시 1896년에 오하이오 출신의 Mckinley(맥킨리)가 대통령이 되자 내쉬는 알렌의 주한 미국공사 임명 운동에 앞장서서 이를 성공시켰던 것이다. 이 때문에 알렌은 데쉴러가 한국에 와 있는 동안 그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알렌은 데쉴러가 이민 모집과 운송에 권한을 갖게 하여 경제적인 이득을 획득하게 했다. 1902년 10월 초에 하와이 농장주 협회의 E. F. Bishop(비숍)은 농장주협회가 출자한 25,000불을 가지고 인천에 도착하여 알렌과 데쉴러와 이민에 관해 협의했다. 알렌이 1902년 3월 말 미국에서 귀임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을 제의하자 혹심한 기근으로 민생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해 고심하던 대한제국 정부도 적극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정부는 일본의 이민보호법을 참고하여 관계법령을 준비하고 11월 15일에 데쉴러에게 이민의 모집과 운송에 관한 일체의 권한을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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