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최초의 한국 철도 – 경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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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창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10-02 11:38 조회2,68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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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선 개통식(1899)
경인 철도는 고종 34년(1897) 3월 29일 기공되어 광무 3년(1899) 9월 18일 개통된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이다. 경인 철도의 완공으로 육로로 12시간이 걸리던 서울과 인천 간의 거리가 1시간 안팎으로 대폭 줄어들면서 서울과 인천이 일일생활권이 되었다. 경인 철도 이전까지 서울과 인천 간의 교통, 운수는 경인 도로와 인천, 용산 간 항로를 이용하는 등 두 가지 길이 있었다.
경인 철도부설권이 미국인 노오스에게 특허받은 것은 1896년 3월 29일이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청일전쟁 개전 직후인 1894녀 8월 20일에 「조일 잠정합동 조관」이 체결되어 경부, 경인 철도부설권을 일본이 잠정적으로 확보한 바가 있었다. 일본은 이미 1880년대 이후부터 군사적, 경제적 목적에서 서울과 부산 간에 철도를 건설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철도 건설 구상은 한반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산에서 출발해 서울, 의주를 거쳐 만주로 연결되고 이것을 다시 일본 철도 및 시베리아 철도와 연결하며 보다 멀리는 인도까지 확장한다는 대륙 침략 구상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본은 잠정합동조관의 체결 직후 이를 기정사실로 아래를 위하여 1895년 1월 15일 「경부, 경인 철도 세목 협정 교섭안」을 작성해 한국 정부에 제출하였다. 이 교섭안의 골자는 전 선로 개통 후 모든 건설비용을 상환할 때까지 일본이 운수 영업에 대한 권리를 최소한 50년간 장악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조일잠정합동조관」 자체가 잠정적 조약에 불과하며, 철도부설권의 양도는 의병투쟁을 격화시킬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이 세목 협정안의 체결을 거부하였으며, 더구나 같은 해 10월 일본이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1896년 3월, 경인 철도부설권을 미국인 노오스에게 양도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7월에는 경의철도부설권을 프랑스인에게 인도하여 일본은 경부철도부설권의 확보조차 어렵게 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종은 경인, 경의 철도부설권을 허가한 직후, 1896년 11월부터 향후 1년간은 외국인에게 철도부설권을 넘겨줌을 불허한다는 칙령을 반포하였다.
아메리카 무역 상사(America Trading Co)의 사장인 모오스는 「조일잠정합동조관」이 성립되기 이전부터 미국 공사 앨런을 통하여 한국 전토에 걸친 간선철도 건설공사에 관한 청부를 맡기려고 운동을 전개한 바 있는데 명성황후시해사건 후 조선 관민의 대일 감정이 악화하자 앨런의 교섭을 통해 마침내 경인철도부설권을 획득하기에 이른 것이다.
모오스는 경인철도부설권을 넘겨주고 받은 직후, 인천에 거주하는 같은 미국인 타운센드와 함께 한국개발공사를 설립하고 콜브란을 기사장으로 하여 경인간 노선을 실측하였다. 그 결과, 용산에 정차장을 설치하며 공사는 인천과 서울 양쪽에서 동시에 착공하기로 결정하여 총연장 10.4km의 노선공사를 시작했다. 모오스는 부설공사가 결정되는 것과 동시에 본국으로 돌아가 자금조달에 동분서주하였으나 한국 사정에 어두운 미국의 자본가들이 선뜻 투자에 응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오스는 약간의 자금을 손에 넣고 돌아와서 1897년 3월 27일에 인천 우각현(쇠뿔고개, 지금의 도원고게)에서 기공식을 거행하고 공사에 착수하였다.
철도 부설공사는 인천역의 위치 문제로 지연되었다. 처음 예정은 밀물 때에 바다가 되는 근포(신포동)를 메워 이곳에 인천역을 설치할 계획으로 공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철도 용지에 포함되는 일본인 지주들과의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 전환국과 응봉산(자유공원) 뒤를 우회하여 현재의 인천역으로 선로를 변경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경부철도발기위원회를 구성하고 경부철도 부설문제를 추진하다가 모오스의 자금조달이 어려운 형편에 있는 것을 알고, 그의 의사를 타진한 후 경인철도인수조합을 조직하여 철도를 넘겨받았다.
경인철도를 넘겨받자 인수조합을 경인철도합자회사로 바꾸고 삽택영일을 사장으로 하여 공사를 속행하게 되었다. 이때 모오스가 완료한 공사는 토목공사가 반 정도 끝이 나 있었고 한강철교도 축조 중이었다. 인수조합은 인수를 끝낸 후 4월 4일 인천에 사무소를 개설하여 모오스의 설계에 변경을 가하여 4월 23일 인천역에서 새로 제2차 기공식을 거행하고 본격적으로 공사를 진행하였다.
9월 13일에는 인천역에서 개통식을 거행하고 인천과 노량진 사이에 임시로 영업을 시작하였다. 운행기관차는 미국 브룩스사에서 만든 기관차였다. 그 후 우리나라 최초의 철교로 당시로써는 가장 긴 다리였던 한강교량의 준공과 동시에 경인선은 노량진에서 서울역까지 연장되고, 1900년 11월 12일에는 서대문에서 경인철도 전 구간 개업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인천, 노량진 간 철도 개통 당시는 2왕복 운행이었으나 전 구간 개통과 동시에 5왕복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초기 이용객은 그리 많지 않아 경인철도회사에서 광고문까지 내 승객유치에 애썼었다고 한다.
1901년 8월 21일에 경부철도가 기공되자 경인철도는 1903년 10월 30일에 경부철도주식회사로 합병되어 경부철도주식회사 경인선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1906년 2월에 통감부가 설치되자 이해 7월 1일을 기하여 경인, 경부 양 철도는 경부철도매수법에 따라 통감부철도관리국으로 넘어갔고 1910년에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자 경인철도는 조선총독부철도국으로 이관되었다.
이런 가운데 조선인들도 차츰 철도의 편리함을 인식하면서 여객수가 급증하고 화물도 개통 당시보다 3~4배 늘어나는 등 철도 수요는 계속 증가했다. 경인 철도의 호황을 반영이라도 하듯, 1910년대에는 신식유행창가로 ‘경인 철도가’란 노래가 나오기도 했다. 특히 일제는 1937년 인천-수원-이천-여주를 잇는 수인, 수여선(협궤열차)을 완공함으로써 끊임없이 내륙에서 생산되는 쌀 등 갖가지 농산물을 자국으로 실어 나르는 등 자본축적을 위해 경인철도를 최대한 이용했다. 여기에 일본이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경인철도는 화물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에 이르렀다. 자연히 철도시설은 노후화를 면치 못했고 이로 말미암아 한때 복선 및 전철화 문제가 거론되기도 했다.
이어 해방 이후 경인철도는 개통 60년 만에 운행을 중단하는 비운을 맞는다. 한국 전쟁이 터지면서 연합군이 인천지역의 역과 철로를 집중적으로 폭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60년대 들어 본격화하기 시작한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에 발맞춰 경인철도도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정부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에 따라 인천지역에 대규모 공단이 들어섬으로써 경인 철도는 인력과 물류수송의 핵심역할을 다시 맡게 된 것이다. 정부는 폭주하는 수송량을 감당하지 못하자 결국 1962년 5월 19일 경인복선화공사를 시작했다. 그리하여 1965년 1월 12일엔 동인천~주안역(4.5km), 그해 9월 18일엔 주안~영등포(23.3km) 간의 공사를 끝내고 한국철도 65년 만에 복선화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공사로 서울과 인천 간에는 30분마다 열차를 운행하면서 수출을 위한 화물 수요는 물론 시민들의 통근과 통학난을 덜어 주었다. 그런데도 계속 늘어나는 수송량을 견딜 수 없게 되자 1971년 4월 7일 수도권 전철화 계획에 따라 전철 공사에 들어갔다. 기존 철도의 효율성을 훨씬 뛰어넘은 전철을 도입함으로써 새로운 한국 철도의 장을 연 이날 기공식은 인천공설운동장에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1974년 8월 15일 전철개통 후 경인 철도는 1980년대로 접어들어서 화물수요가 대폭 줄어드는 대신 여객수요가 급증하면서 도시철도로 자리 잡았다. 이용객들은 그러나 한동안 여객수요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몸살을 앓는 경인전철을 가리켜 ‘지옥철’이라 불렀다. 아울러 출근길 객차에 한사람이라도 더 밀어 넣기 위해 ‘푸시맨’도 등장하는 등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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