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사림 문화의 산실, 누정(누각과 정자)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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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창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10-16 12:44 조회2,05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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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앙정
건물 자체는 간소하지만, 역사적 의의가 크기에 1972년에 전라남도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었다. 면앙정은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규모인데, 가운데 한 칸짜리 방이 있고 빙 둘러 사방에 마루가 깔려 있어 주변의 자연을 안아 들인다. 여기서 바라보는 전망의 중심은 정자 뒤편에 있다. 저 멀리 아련히 이어지는 산줄기들과 언덕 아래에 뚝 떨어져 깔린 평야, 그 위로 시원하게 트인 하늘이, 내다보는 사람의 마음을 활달하게 한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국문학사(가사 문학)에서 빼어난 발자국을 남긴 면앙정 송순(1493~1582)이 고향 마을인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 뒷산 제월봉 언덕 위에 지은 정자이다. 면앙정은 정자의 이름이면서 송순의 호이기도 하다. 면앙이란 땅을 내려다보고 하늘을 쳐다본다는 뜻으로, 아무런 사심이나 꾸밈이 없는 너르고 당당한 경지를 바라는 송순의 마음을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
“굽어보니 땅이요 우러르니 하늘이라. 그 사이에 정자를 짓고 호연지기를 키우며 인생을 보내리라” 그의 호방한 기품이 엿보이는 면앙정을 지은 것은 송순의 나이 41세 되던 조선 중종 28년(1533)에 해당한다.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던 그는 당시 조정에서 훈구파 김안로 일파가 세력을 잡자 고향으로 돌아와 뒷산에 소박한 정자를 짓고 시를 읊으며 지냈다. 3년여 은거하던 송순은 김안로 일파가 실각하자 다시 조정에 나아가, 몇 차례의 부침을 겪으면서도 77세에 의정부 우참찬에 이르기까지 관직 생활을 했다. 마침내 관직을 은퇴한 그는 9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온전히 면앙정에 머물며 유유자적하는 가운데 많은 가사를 남겼다. 또한, 이황, 백광훈, 김인후, 임형수, 박우, 정만종, 송세형, 임억령, 고경명, 정철, 임제, 김성원, 기대승, 박순, 소세양, 윤두수, 양산보(송순의 외종형), 노진 등이 좋은 경치와 노학자를 찾아 이곳을 드나들며 시 짓기를 배우고 즐겨, 이곳은 호남 제일의 가단(노래를 잘 부르거나 잘 짓는 사람들의 모임)을 이루었다.
원래 이 면앙정 터에는 곽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았다. 어느 날 금붕어와 옥대(벼슬아치들이 허리에 두르는 대)를 두른 선비들이 제월봉의 언덕에서 노니는 꿈을 꾼다. 그는 자기 아들이 벼슬을 할 것이라 여겨 공부를 시켰지만, 뜻대로 되지도 않고 집안마저 가난해졌다. 곽 씨는 결국, 자신의 꿈이 헛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이곳의 나무를 다 베어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였고, 송순이 그 터를 사 놓았다가 나중에 정자를 지었다. 뒷날 이곳이 소위 면앙정가 단을 이루어 허다한 학자, 가객, 시인들의 창작 산실이자 휴식처가 된 것을 보면, 곽씨가 해몽은 틀렸지만 꿈은 제대로 꾸었던가 보다.
면앙정 송순은 욕심이 없고 관대하며 유순한 학자로 기록된다. 벼슬살이를 한 전 생애 동안 그 수많았던 정쟁의 와중에도 연루되지 않고 순탄하게 관직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그렇다. 그가 과거에 급제한 27살부터 60년이 되는 회방 잔치(급제 60주년 기념잔치)에서 당시 내로라하는 학자들인 송강 정철, 백호 임제, 제봉 고경명 등이 그를 가마에 태우고 집으로 모셔다드린 것은 정말 당시 선비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훗날 정조대왕은 호남지역을 대상으로 한 과거시험에서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쓰라는 문제를 과거시험 문제로 내었을 정도였다. 그 자랑스러운 일이 면앙정의 오른편 현판에 정조대왕 어제로 걸려 있다.
정자 안에는 퇴계 이황과 하서 김인후의 시, 고봉 기대승의 「면앙정기」, 백호 임제의 「면앙정부」, 석천 임억령이 면앙정에서 바라보는 30가지 좋은 경치를 노래한 「면앙정 30영」, 그리고 송순 자신의 「면앙정 삼언시」 등이 판각되어 걸려 있다. 송순은 60세 때 정자를 증축하고는 “하늘을 쳐다보기도 하고 땅을 내려다보기도 하며 바람을 쐬면서 남은 생애를 보내게 되었으니 나의 본래 원하던 바가 이제야 이루어졌다”라고 기뻐하며 기대승과 임제에 「면앙정기」와 「면앙정부」를 부탁했었다.
* 임제(1549~1587) :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술을 한잔 부어놓고 읊은 시조 한 수로 파직당한 방외인으로 풍류가객이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가? 누었는가?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가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백호 임제>
송순의 「면앙정가」는 정극인의 「상춘곡」과 더불어 호남 가사 문학의 원류가 될뿐더러 내용, 형식, 가풍 등에서 정철의 「성산별곡」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정자 앞과 뒤에 선 큰 참나무 두 그루는 송순이 정자를 지은 후 기념으로 심은 것이라 전해지며, 제월봉 정상 쪽으로 100m쯤 간 곳에는 송순의 무덤이 있다.
“10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내니 달 한 칸, 나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송순이 만년에 면앙정을 두고 읊었다고 전해지는 이 시에는 우리 민족의 자연주의적 정원관이 잘 나타나 있다.
“굽어보니 땅이요
우러르니 하늘이라
그 가운데 정자를 지었으니
호언 지기의 흥이 나는구나!
바람과 달을 맞아들이고
산빛과 냇물도 맞아들이자
지팡이 짚은들 무슨 흠이 되겠는가?
한 세상 멋지게 보내면 그만이지!”
<면앙정 삼언시>
“꽃이 진다고 새들아 슬허마라
바람에 흩 날리는 꽃의 탓 아니로다
가느라 희짓는 봄을 새와 무삼하리오.“
*을사사화에 많은 선비들이 죽어간 것을 슬퍼하여 지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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