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사림 문화의 산실, 누정(누각과 정자)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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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창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10-22 11:03 조회2,25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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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 소재, 사적 304호로 지정된 한국 민간 정원의 원형을 간직한 곳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예의가 가장 탁월하게 드러난 문화유산의 보배라고 불리는 곳이다.
전체 면적은 1400여 평의 공간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주인의 의도에서 조성된 물이나 돌, 나무나 꽃등은 각각의 의미와 상징성을 뛰어넘어 그 시대와의 대화를 연결하는 끈의 역할을 한다.
소쇄원이 지어진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김인후가 “소쇄정 즉사”를 쓴 것이 1528년인데, 정철이 지은 “소쇄원 제초성”이란 시에서 자신이 태어난 해에 이 정자가 조성되었다 하여 1536년으로 혼돈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송순의 “종제 양언진 소쇄정”이 1534년에 만들어진 것을 보면 1520년 중반 소쇄원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1536년경 일차적 완성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소쇄라는 말의 의미는 물 맑을 소, 씻을 쇄. 즉, 맑고 깨끗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옛 어른들이 흔히 세수하라는 말을 고어를 써서 “소쇄하라”라고 말했음을 볼 때 소쇄의 의미는 “몸과 마음의 기운을 맑고 깨끗이 하여라.”라는 뜻을 간직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 소쇄원을 만든 주인은 후손에게 “어느 언덕이나 골짜기를 막론하고 나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양도하지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 것이며, 후손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유훈을 남긴다.
하지만 아쉽게도 정유재란(1597) 때 왜적들의 집중적인 공략을 받은 이 지역은 불에 타버렸다. 이것을 주인의 손자인 양천운이 다시 중건하였으며, 그 후 5대손인 양경지가 완전복구하였다.
소쇄원을 만든 사람은 양산보라는 사람으로 1503년에 태어나 1557년 생을 마감한 이다. 15살에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는데 스승이 바른 정치를 구현하다 기묘사화(조선 중종 14년, 1519년에 일어난 사화. 남곤·심정 등의 수구파가 이상 정치를 주장하던 조광조·김정 등의 신진사림파를 죽이거나 귀양 보낸 사건)에 연루되어 화순 능주에서 귀양을 살다 사약을 받고 죽게 되자, 17살에 고향으로 돌아와 평생 세상에 나가지 않고 처사(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조용히 살던 선비)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다.
소쇄공의 행적을 기록한 글을 보면 “본래 덕성이 높은 데다 또한 조용한 곳에서 오랫동안 학식을 함양했으니 알차고 참된 인격자로서 호남에서 위대한 선비로 존경받는 인물이 된 것이다. 안에서는 부모에 대해 효성이 지극하여 언제든지 부모 곁에 있으면서 환한 얼굴로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조석으로 인사드리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있겠는가?」, 「사람의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 자를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할 정도였다. 특히 그는 수백 마디로 된 효부를 지어 효에 대한 근본정신과 사상을 밝혔다. 더욱이 순 한문에 밝지 않은 일반인들의 이해를 위해 한글을 새기어 적는 등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퍽 감동적인 책이라 아니할 수 없다. 라고 후학인 이민서는 소쇄공을 얘기하고 있다.
그의 부인은 광산 김씨로 정랑 김후의 따님이며 환벽당 주인인 사촌 김윤제의 누이였다. 결혼을 한 해는 언제인지 확실치 않지만 19세에 첫아들을 낳고, 21세에 둘째 아들, 25세에 셋째 아들을 낳았으며 그해에 부인이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양산보의 생애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503년부터 1517년까지의 성장기, 1517년부터 1519년까지의 수학기, 그리고 1519년부터 1557년까지의 낙향하여 은거하는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중 은거하는 시기인 20대에는 이미 결혼을 했고, 자식을 낳았으며, 소쇄원에 대한 일단의 공사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30대에는 송순, 김인후, 임억령, 기대승, 고경명, 김성원, 정철 등과의 학문적 교류와 더불어 구체적인 소쇄원의 조영(집 따위를 지음)에 들어갔으며, 40대 초반에 완결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40대 중반에는 벼슬길에 천거를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며 부친에게 효성을 다하였고, 50대에는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소쇄원은 결국 은둔을 위한 정자이지만 그의 곧은 뜻을 알게 된 사림들은 소쇄원을 중요한 공간으로 인식하고 주인과 교류를 함으로써 열린 공간으로 호남 사림의 명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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