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경운궁(덕수궁), 대한제국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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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창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11-07 09:15 조회4,02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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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의 정문 대한문
조선 국초에 태조(이성계)가 왕자의 난으로 정종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게 되자 정종은 개성으로 다시 돌아갔는데, 이때 정종은 상왕인 태조를 위하여 지은 궁궐이 바로 덕수궁이었다.
* 왕자의 난 : 태조의 왕자들 사이에서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두 차례의 난. 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과 세자 방석과 방번이 죽었고, 2차 왕자의 난으로 방간과 박포가 죽임을 당하였다.
태종 5년(1406) 11월에 한양으로 다시 천도를 단행하였고, 이때 창덕궁의 공사와 함께 태조를 위한 덕수궁의 공사를 착수하여 태종 6년(1407) 4월에 끝났다. 신축된 덕수궁에서 태조는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등 말년을 보냈다. 그러나 태종 8년(1409) 5월에 태조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는 빈 궁궐이 되었던 듯 왕조실록에서 별다른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 뒤 경운궁 지역은 덕종(세조의 왕세자 추존)의 원자(아직 세자에 책봉되지 않은, 임금의 맏아들) 월산대군의 사저가 되었다. 덕종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그 아우인 해양대군이 세조의 제2 세자가 되니 이분이 곧 예종이다. 예종이 승하한 후 덕종의 원자인 월산대군에게 왕위를 전하지 아니하고, 덕종의 둘째 아들이요 예종의 양자인 성종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월산대군은 왕의 친형으로 사저에 거처하였다.
임진왜란(1592) 때 의주까지 피난했던 선조가 1년 반 만에 서울로 돌아왔으나,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과 종묘가 병란에 소실된 까닭에 머물 궁이 없었다. 부득이 당시 월산대군의 증손자 이성이 살던 집을 임시 거처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궁궐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좁아 인근에 있던 계림군(성종의 손자) 이류의 집과 주변 민가 등도 행궁으로 편입시켰으며, 선조 28, 29년에 걸쳐 병조판서 이항복이 궁궐을 둘러싼 성벽(궁장)을 만들었고, 길가에다 문을 세움으로써 비로소 궁궐의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이곳을 ‘시어소’ 또는 ‘정릉동 행궁’이라 불렀다. ‘시어소’는 임금이 임시로 거처하는 곳이며, 행궁은 임금이 거동 할 때 머물던 궁궐이다. 이런 이름이 사용된 것을 보면 선조는 이곳을 임시로 쓰다가 다른 궁궐이 마련되면 옮길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국가 재정은 이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으며, 선조 39년에 이르러서야 종묘와 궁궐의 영건도감을 설치하고 이에 따르는 준비를 하였다.
선조 40년(1607)에는 별전을 지어 생활공간이 다소 여유로웠지만, 전각 배치 등이 다소 산만한 느낌을 주었고 전체적인 분위기도 궁궐과는 거리가 있었다. 선조는 생전에 정궁을 지어 돌아가려 하였으나, 나라 형편이 여의치 않아 결국 이곳에서 1608년 2월 초하룻날 승하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1608년 이곳 서청에서 즉위한 후 7년 동안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1611년(광해군 3년)에 창덕궁 복구공사가 마무리되고 그해 10월에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행궁을 ‘경운궁’이라 부르게 하였다. 하지만 광해군은 보름 만에 다시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1615년 4월 창덕궁으로 다시 거처를 옮기기까지 무려 3년 반이라는 기간을 더 이곳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광해군 10년(1618) 인목대비가 대비의 칭호를 박탈당하고 이곳에 유폐되면서 서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광해군 15년(1623), 반정에 성공한 인조가 인목대비의 명을 받들어 경운궁의 별당(즉조당)에서 등극하였으나, 곧 대비와 함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겨 이후 경운궁은 궁궐이라기보다는 옛 행궁 터로서, 즉조당, 석어당과 왕비의 궁방인 ‘명례궁’건물이 몇 채만 유지되고 나머지는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 후로 왕실에서도 경운궁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숙종이 경운궁에 나아가 신하들과 더불어 시를 지어 화답하며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과 1773년 영조가 선조 환도 3주갑(180년) 기념으로 선조의 기일을 맞아 세손과 함께 경운궁에 나아가 즉조당에서 사 배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경운궁이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고종의 환궁 이후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 민 씨가 시해되고 친일적인 관료들과 일본의 압력이 가중되자 고종은 이듬해 2월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아관파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면서 경복궁이나 창덕궁이 아니라 서양 각국의 공사관이 밀집해 있는 정동의 경운궁으로 들어갈 생각을 가졌다. 따라서 왕태후와 왕태자비가 머물고 있던 경운궁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게 하는 한편 경복궁에 있던 빈전과 역시 경복궁 집옥재에 보관되어 있던 선왕들의 어진(임금의 초상화)을 옮겨왔다. 이처럼 ‘수리’라기보다는 ‘신축’이라 해야 할 정도의 경운궁 영건(집이나 건물을 지음) 공사가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렇게 준비를 한 끝에 1897년(건양 2년) 2월 20일 고종과 왕태자는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정사를 보기 시작하여 이제 경운궁은 근대사의 주 무대가 되었다.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온 것을 환궁이라고는 하지만 둘은 경계가 잇닿아 있었으므로 공간적으로는 위치를 조금 옮겨 앉은 데 지나지 않았지만 이로써 경운궁은 국왕이 머무는 궁궐이 되었다. 경운궁으로 환궁한 뒤 8월 고종은 연호를 건양에서 광무로 고치고, 오늘날의 조선호텔 자리에 하늘에 제사 지내는 원구단을 쌓았다. 10월에 가서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정하고 그 이튿날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고종은 재위 13년(1876)에 경운궁을 수리하고, 즉조당에 나아가 임진왜란의 곤경을 겪었던 선조의 정사를 반추하였으며 선조의 환도 5주갑(300년)이 되던 1893년에도 즉조당에서 배례하고 주변 노인들에게 몸소 쌀을 나누어 준 적이 있다. 또한, 경운궁 서쪽에 미국공사관을 북쪽에 영국공사관을 그리고 서북쪽에 러시아공사관이 각각 있었고 각 공사관과 경운궁 사이에는 일종의 비밀 통로가 있어서 일본의 내정간섭을 방어하기에 좋은 위치였다.
따라서 경운궁으로 옮기고자 한 것은 오래전부터 계획되어 있었으며, 고종의 아관파천은 경운궁 이어의 한 과정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아관파천 때 왕 태후(헌종의 계비 홍씨)와 태자비를 경운궁으로 옮기도록 조처했으며, 민비의 빈전과 역대 임금들의 어진도 경운궁으로 옮기도록 한 조치들도 이를 뒷받침한다.
고종이 경운궁으로 옮긴 뒤에도 궁궐의 전각 건립은 계속되어 역대 임금들의 영정을 모시는 선원전이 세워졌다. 아울러 러시아 사람인 사바틴이 설계한 정관헌, 돈덕전 등의 서양식 건물도 이 무렵에 세워졌다. 1900년(광무 4년) 1월 궁궐 담장공사를 마치고, 1902년 2월에는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에 견줄 만한 법전인 중화전까지 완공됨으로써 경운궁은 이제 국왕이 머무는 궁궐로써 필요한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하여 경운궁 중건 공사의 준공식이 1902년 10월에 거행되었다. 그렇지만 1880년대 경운궁이 비어 있을 당시 그 터를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의 공사관 터로 잘라 주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경운궁 부지는 외국 공사관부지와 섞이게 되었다. 따라서 경복궁처럼 정연한 공간구조를 갖추지는 못하였다.
한·일의정서가 교환되고 불과 두 달 뒤 1904년 4월 14일 경운궁에 큰불이 났다. 침전인 함녕전의 온돌을 수리하다, 난 불로 바람을 타고 연속적으로 번지는 바람에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등 대부분의 건물과 거기에 비치되거나 소장되었던 집기와 문물들이 한꺼번에 사라지게 된 큰 화재였다.
고종은 그날로 수옥헌(중명전)으로 거처를 옮기고 러·일전쟁으로 국내외가 혼란스럽고 재정이 궁핍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이 궁궐을 중건해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이튿날에는 ‘경운궁중건도감’을 설치하라는 명을 내렸다. 많은 비용을 들여 경운궁을 중건하기보다는 경복궁이나 창덕궁으로 이어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고종은 단호히 경운궁 중건을 고집하였다.
중건사업이 고종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기는 하였지만, 당시에는 재정 형편이 어려웠고, 또 고문제도가 실시되면서 1904년 10월부터는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다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어 고종의 뜻이 완전히 관철되기는 어려웠다. 그 결과 중건된 건물들 가운데는 옛 모습을 잃은 경우가 적지 않아 정전인 중화전도 원래 이층지붕이었으나 단층으로 중건되었다. 개개 건물들만이 아니라 경운궁의 공간구조 자체도 변경되었다.
1905년 11월 초에는 중화전이 완공되는 등 거의 중건 사업이 완료되엇다. 이듬해에는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준명당, 흠문각, 함녕전 등이 완공되었으며, 조원문, 중화문 등도 세워졌다. 1906년에는 대안문도 수리되어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꿈으로써 경운궁의 중건이 매듭을 짓게 되었다.
1905년 일제는 경운궁의 수옥헌(중명전)에서 이른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1907년 6월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위종, 이준을 특사로 파견하여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케 한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일제는 고종에게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그리하여 1907년 8월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이름을 바꿨다. 순종은 8월에 돈덕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즉조당에 임어(임금이 그 자리에 옴)하였다. 10월에 순종은 일제의 책략에 의해 창덕궁을 수리한 뒤 11월에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순종 2년(1908) 3월에는 조선왕조의 정식 궁궐인 경복궁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덕수궁도 마찬가지였다. 왕실의 권위를 낮추려는 일제의 계략이 개재되었음은 물론이다. 경운궁의 축소화, 공원화 작업이 진행되었고 궁궐의 상징적인 의미는 퇴색되어 갔다. 현재 그나마 남아 있는 경운궁의 궁역은 원래의 70% 정도가 사라질 만큼 훼손되어 옛 모습을 짐작하기 어렵다.
한편 1945년 광복 이후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한반도 문제가 논의되었으며, 1947년 국제연합 한국위원회가 이곳에 자리 잡으면서 경운궁은 또 다른 역사의 현장으로 남게 되었다. 그렇지만 덕수궁은 창덕궁이나 경복궁의 규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파란만장 했던 대한제국의 역사 현장으로서 커다란 의의를 지닌 궁궐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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