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토정 이지함(1517 ~ 1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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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창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1-06-01 22:12 조회1,01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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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비결
본관은 한산, 자는 형백, 형중. 호는 수산, 토정이며, 시호는 문강이다. 서울 마포대교 북단 마포동과 합정동 사이에는 약 3.3킬로미터의 토정로가 있다. 토정로가 지나는 오늘날의 용강동에 토정 이지함(1517~1578)이 ‘흙으로 언덕을 쌓아 아래로는 굴을 파고 위로는 정사를 지어 스스로 토정이라 이름 하였기’(선조 수정 실록) 때문이다. 조선 시대 마포는 서해에서 한강 하구를 거쳐 한양으로 들어오는 각종 물산이 모이는 수운 물류의 중심지였다. 소금과 젓갈이 거래되고 그것을 담기 위한 옹기가 생산되는 민초들의 활기 넘치면서도 고단한 삶의 현장 한 가운데에 살았던 선비. 오늘날 염리동 일대에 소금 창고가 있었고 소금장수들이 많이 살았으며, 오늘날 용강동 일대에는 옹기 만드는 독막이 있었다.
“배 타기를 좋아하여 큰 바다를 마치 평지처럼 밟고 다녔다. 나라 안 산천을 멀다고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험하다고 건너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간혹 여러 차례 추위와 더위가 지나도록 정처 없이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이산해. ‘숙부 묘갈명’ 중에서
이산해가 숙부를 추모하며 쓴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지함은 한 곳에 얽매이거나 구속되는 것을 싫어했다. 정홍명도 『기옹만필』에서 ‘그가 강해를 떠돌아다니며 방랑 행각을 한 것은 세상을 싫어해서만이 아니라 구속받는 것을 피하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고 기록했다. ‘그와 함께 이야기하면 기발하여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지만, 때로는 수수께끼 같은 농담을 하며 점잖지 못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헤아리기 힘들었다.’는 <선조 수정 실록>의 기록은 또 어떤가? 이른바 ‘행실이 발라 타의 모범이 되는 도학군자 선비’의 모습과는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산수 이정랑의 딸과 혼인하여 산두, 산휘, 산룡과 서자인 산겸 등 네 아들을 두었는데, 산휘는 호랑이에게 물려 죽고, 산룡은 역질에 걸려 죽었다. 산겸은 장성하여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싸웠으나 역모죄를 받게 되었다.
장인 이정랑은 1547년 윤원형이 꾸민 정미사화(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장형을 당하고 능지처사되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충주 일대의 많은 선비들이 연루된 이 사건으로 충주는 현으로 강등되고 충청도라는 이름에서도 빠져 충청도는 청홍도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지함은 그 전에 과거를 몇 번 보기는 했지만, 처가가 역적 집안이 되고만 이 사건 이후 주로 마포와 서해안 일대를 오가며 다른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생활을 했다.
“사람의 도리가 궁해지지 않습니다. 재물 생산에도 본과 말이 있으니, 농사가 본이고 염철(산업 생산)은 말입니다. 포천의 실정은 본이 이미 부족하니 말을 취해 보충해야 합니다.… 고기잡이와 소금 굽는 일에서 지원자를 모집해 그 이익을 백성과 나누면, 국가는 한 섬의 곡식도 소비하지 않고 한 사람의 인력도 번거롭게 하지 않고서도 만 사람의 삶을 건질 수 있으며, 현은 백 년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 포천 현감 때 올린 위의 상소문
포천 현감 때 올린 위의 상소문에서 볼 수 있듯이, 지방 수령으로서 이지함이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첫째도 민생, 둘째도 민생이었다. 물론 민생을 지극히 돌보고자 하는 뜻을 품고 나름대로 실천한 수령은 그 말고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지함의 다른 점은 민생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에 있었다. 단순히 농사만을 독려하거나 일시적인 대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농사 외의 산업 생산을 통해 일종의 지속가능한 민생 정책을 펼치고자 했고, 군역 제도를 혁신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덜고자 했다.
아산 현감으로 있던 윤춘수가 백성들에게 온갖 행패를 부려 원성이 높자 1578년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아산 현감이 되어서는 걸인 수용소를 만들어 관내 걸인의 수용과 노약자의 구호에 힘쓰는 등 민생 문제의 해결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지함은 유민들이 해진 옷을 입고 걸식하는 것을 가엾게 여겨 큰 집을 지어 그들을 수용하고, 사, 농, 공, 상 중 하나를 업으로 삼아 살도록 했는데 직접 가르치며 이끌어 각자 의식을 자급할 수 있게 하였다. 가장 능력이 떨어지는 이에게는 볏짚을 주어 미투리를 만들게 했는데, 그 일을 친히 감독하여 하루 10짝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게 했다. 남은 이익을 축적하니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의식이 모두 풍족해졌다.”
<연려실기술>, <어우야담>
구휼이라고 하면 곡식과 물자를 내어 백성들에게 지급하는 것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무한정 곡식과 물자를 내어 줄 수도 없으니 지속가능한 대책은 될 수 없다. 이지함은 백성들이 각자의 힘과 능력에 맞는 생산 활동을 하여 이익을 축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구휼 대책이자 민생 대책이라고 보았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자립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최선이라고 보았던 셈이다. 이지함의 이러한 민생 대책의 밑바탕에는 경제에 대한 당시로는 획기적인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땅과 바다는 백 가지 재용(쓸 수 있는 재물)의 창고이니, 여기에 의존하지 않고 능히 국가를 다스린 이는 없습니다. 진실로 이것을 개발하면 이익이 백성에게 베풀어질 것이니 어찌 그 끝이 있겠습니까. 씨 뿌리고 나무 심는 일은 백성을 살리는 근본입니다. 여기에 은은 주조할 것이며 옥은 채굴할 것이며 고기는 잡을 것이고 소금은 굽는 데 이를 것입니다. 사적인 경영으로 이익을 취하고 남는 것을 탐내며 후한 것에 인색함은 소인들이 유혹하는 바이고 군자가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지만, 마땅히 취할 것을 취하여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 또한 성인이 권도로 할 일입니다.”
<토정유고>, 포천 현감 시절 올린 상소문 중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토정비결>의 저자가 이지함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보다는, 왜 저자가 ‘토정 이지함으로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첫째, 이지함은 민초들의 삶에 늘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하루 앞날을 예측하기 힘든 불안하고 고된 처지에서 살아가는 많은 백성들을 이해하고 돌보고자 했던 그의 삶은, 운세를 점쳐 흉한 것을 피하고 길한 것은 북돋게 해주는 ‘운명 카운셀링’ 책의 저자가 되기에 매우 적합하다. 둘째, 이지함이 서경덕에게 <주역>을 바탕으로 우주의 운행과 시간의 질서를 탐구하는 상수학을 배웠다는 기록으로 볼 때, <주역>에 바탕을 두었다고 할 수 있는 <토정비결>의 저자가 되기에 역시 적합하다. 셋째, 이지함은 사대부 선비라는 신분에 어울려 보이지 않는 기이한 행적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남겼다. 구리로 만든 솥을 머리에 쓰고 다니다가 그 솥을 벗어 밥을 지어 먹었다거나, 직접 배의 키를 잡아 바다 가운데 소금 산을 찾아 소금을 가득 싣고 돌아왔다거나, 처가의 형세를 보니 장차 화가 미칠 것이라 예측하고 처자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떠났는데 정말로 화가 발생했다거나 하는 등,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정형화된 선비의 삶과는 거리가 있는 파격적이면서도 신통하기도 한 그의 행적 이야기 역시 점서의 저자가 되기에 적합하다.
민생이 극도로 피폐해지고 정치가 부패하며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진 19세기 조선의 앞날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의지할 곳 없는 많은 백성들의 마음속에 ‘토정 이지함’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공간은 점점 커졌을 것이다. 그 마음 속 공간에 자리 잡은 <토정비결>은 많은 사람들이 널리 찾는 대표적인 점서가 될 수 있었고, 그와 함께 토정 이지함의 이미지도 그러한 방향으로 더욱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이지함은 <토정비결>의 저자 아닌 저자인 셈이다.
“사람들은 안으로는 똑똑하고 강하기를, 밖으로는 부유하고 귀하기를 바란다. 벼슬하지 않는 것보다 귀한 것이 없고, 욕심 내지 않는 것보다 부유한 것이 없으며, 다투지 않는 것보다 강한 것은 없고, 알지 못하는 것보다 똑똑한 것은 없다.… 알지 못하면서 똑똑하고, 다투지 않으면서 강하고, 욕심 내지 않으면서 부유하고, 벼슬하지 않으면서 존귀한 것은 실로 대인만이 할 수 있다.”
<토정유고>의 ‘대인설’ 중에서
부유하고 높고 귀하며 강하고 똑똑한 사람.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이지함은 진정한 큰 사람, ‘대인’은 무지의 지, 무쟁의 강, 무욕의 부, 무관의 귀를 갖춘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지함의 이러한 역설적인 ‘대인설’은 바로 이지함 자신에게 적용될 수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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