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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김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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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창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02-23 08:08 조회9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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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곡 김육의 초상화. <출처 실학박물관>


 

대동법동전 통용책(通用策등 17~18세기 조선 최대의 정책 업적을 이룩한 인물이다일찍이 12세 때부터 경세제민의 뜻을 품었던 김육은 70대에 정승의 자리에 올라 충청도와 전라도에 대동법을 시행하며 그의 오랜 소신을 관철했다무수한 역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학문을 연마하며 정책 이념을 정립했던 김육은 말년까지 자신의 이상을 소신껏 추진하여 조선 후기의 경제와 사회 발전에 밑바탕이 되었다김육은 부국강병의 실패정책 구현 역량의 부족구조적 부정부패 등 조선 왕조의 약점을 극복했다제도 개혁이 절실했던 시대의 부름을 받아 자신의 인생을 바쳐 이상을 실현한 것이다.

 

김육(金堉, 1580~1658)은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이 발발했던 조선 초유의 국난 시기를 살았던 인물로 그의 현실 개혁은 조선이 처해있던 위기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왜란과 호란은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했고정부는 국가 재정을 비롯한 전후 복구 문제가 급박한 실정이었다전란 후 재정복구책이 실시되는 과정에서 가장 영향력을 발휘하였던 인물이 바로 김육이었다당시의 위정자들은 파탄이 난 국가 재정만을 생각했지만김육은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이 첫 번째 일이라 생각했다. 10여 년간 농사꾼으로 살았던 김육이야말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할 최고의 적임자였다.


김육은 1580년 7월 14일 한양(옛 서울마포에 있는 외조부 조신창의 집에서 태어났다자는 백후호는 잠곡 혹은 회정당이다.


김육 대에 와서 그의 가문은 명문 반열에 올라섰지만청풍이 본관인 김육의 집안이 중앙에 알려지게 된 것은 기묘명현(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들을 일컫는 말)의 한 사람인 고조부 김식(1482-1520)이 서울에 세거하면서부터이다김식은 기묘사화 당시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며 사림의 공론을 주도한 인물이다김식이 기묘사화에 연루되면서 증조부부터 부친인 김흥우까지 중앙의 요직을 맡지는 못했지만김육의 집안은 기묘사림의 학풍을 계승하며 사림의 중심부에서 성장하였다성혼과 이이에게 수학한 김육은 김상용김상헌 등과 긴밀한 교유를 맺었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서인의 정통을 이었다고 볼 수 있다그리고 김육의 모친인 한양 조씨는 조광조의 아우 조숭조의 손녀였다.

 

김육은 다섯 살 때 이미 천자문을 외우는 비상한 자질을 갖고 태어난 아이였다. 1588년 조부인 김비가 강동 고을 수령이 되자 부친과 함께 그곳에서 생활하였다여기서 퇴계의 제자인 조호익(1545~1609) 밑에서 공부하였다조호익은 1575년 최황의 모함받아 가족과 함께 변방에 이주해야 하는 전가사변(全家徙邊)의 벌을 받고 이듬해 유배되어 강동 고지산 자락 아래에 살면서 학사를 열어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었다김육은 1589년 강동으로 가서 이듬해 봄까지 안국사에서 학문에 열중했다.

 

김육은 문학 소년이었다. 12세에 [육송처사전]과 [귀산거부]를 지어 글솜씨를 뽐냈고, [소학]을 읽다가는 낮은 벼슬아치라도 진실로 사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두어야지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다는 정자의 글을 읽고 백성 구제의 큰 뜻을 품기도 했다.

 

김육은 13세에 임진왜란(1592)을 경험하였다피난 중에도 옷소매에 항상 책을 지녀 손에서 책이 떨어지지 않았다어린 김육을 고달프게 한 것은 전쟁만이 아니었다부친인 김흥우가 31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임종 당시 부친은 김육을 불러서 가문을 일으킬 것을 명하고 평생 술을 입에 대지 말라고 유언했다부친의 유언을 받은 김육은 평생 청풍 김씨 가문을 일으키는 데 노력했고대동법 등 경세가로 사는 삶을 살았다.

 

전쟁의 발발과 갑작스러운 부친의 죽음연이은 흉년으로 김육은 모친을 모시고 청주에 살던 이모부 남익수의 집으로 가서 의탁했다그러나 그곳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연안 지봉촌이라는 곳으로 이주했지만모친마저 세상을 떴다당시 21세 청년이었던 김육은 평구(현재 남양주 삼패동)에 부친과 모친의 묘를 합장하였는데인부를 부를 돈이 없어 본인이 직접 흙과 잔디를 날라 묘역을 만들었다고 한다부모를 모두 잃은 뒤에는 서울에 사는 고모 댁에 얹혀살았는데 삼년상 동안 새벽마다 묘소까지 걸어가서 곡을 하고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부모를 일찍 여읜 슬픔 속에서도 김육은 열심히 과거를 준비하였다. 1604년 한성에서 열린 사마초시와 회시에 급제하고 성균관시에서 수석을 차지하였다소과를 통과한 후에는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나가기 위해 대과인 문과 시험을 준비하였다그러나 당시는 광해군 대로 정인홍 등 대북파가 득세하던 시기였다서인의 정통을 계승한 김육으로는 조정에서 벼슬하고 싶지도 않았고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김육은 1611년 별시 초시와 증광별시 등에 합격하였지만조정에 나갈 뜻을 접고 1613년 가평의 잠곡 청덕동 화개산 아래에서 가족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안빈낙도의 생활을 시작했다처음에는 거처할 집이 없어 굴을 파고 헛가래를 얽어 살았고 낮에는 나무하고 저녁에는 송진으로 불을 밝혀 책을 읽었다김육은 잠곡에서 그야말로 잠거하였다세상이 어려우면 몸을 숨겨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경세에 뜻을 둔 탓인지 산골짜기에 몸을 숨기고 평생을 살아야 할 운명은 아니었다잠곡에 은신한 지 10년 만인 1623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곧바로 6품직의 벼슬을 받아 의금부도사가 되었다마흔넷의 나이에 처음 얻은 벼슬이었고 인조반정 세력이 가장 먼저 찾은 인물이기도 했다김육이 빠르게 벼슬길에 나간 것은 광해군 대에 과거 응시의 뜻을 접고 산골짜기에서 몸소 농사를 지은 그의 행실이 크게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그러나 음직(과거를 치르지 않고조상의 혜택으로 얻던 관직)이 싫었는지 벼슬을 그만두고, 1624(인조 2) 과거시험 문과에 합격하여 정식으로 충청 관찰사로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세자시강원(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관청)으로 있었던 김육은 세자를 따라 피난을 갔고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자신의 소신을 밝힌 시무책(급히 해결하여야 할 사안을 논하여 국왕에게 건의한 글)을 올리기도 했다김육의 강직한 성품은 왕을 능멸하는 것으로도 비쳤다인조의 오해를 받아 1629년에 관직을 삭탈 당하자 한강을 바라보는 경기도 양근 소천에서 우거하며 때를 기다렸다.

 

김육이 중앙으로 다시 진출한 것은 1632년 5월이었다홍문관(궁중의 경서사적과 문서의 관리하고 왕을 자문하던 관청부수찬이조정랑사간원( 왕에게 충고나 비판하는 업무를 담당한 관청사건 등을 지냈고 인조의 깊은 신임을 받아 승정원(국왕의 비서기관)에서 근무하기도 했다중앙에서의 관직도 화려했지만목민관(백성을 다스리는 벼슬아치라는 뜻으로고을의 원이나 수령 등의 외직 문관을 통틀어 이르는 말)으로서의 치적도 탁월했다. 1635년 안변도호부사 시절에는 안변 관아의 무기고를 정비했고관북 지역 유생들의 학풍을 진작하고 병사들을 조련했다이 시기에 생활이 안정되자 그는 자기 집안 문적을 정리하여 [청풍세고]를 엮었다.

 

1636년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김육은 그해 6월 동지사(명나라와 청나라에 정기적으로 파견한 사신대체로 동지 절기를 전후하여 보냈으므로 동지사라 하였다)로 명나라에 갔다이 시기 중국은 명이 쇠퇴하고 요동 지역의 후금이 강성해진 시기였다김육은 요동을 통해 북경으로 가는 육로가 막히자 해로를 이용하여 북경으로 들어갔다. 6월에 떠난 사행은 12월이 되어서야 북경에 도착하였다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북경에서 병자호란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명나라에 지원병을 요청할 생각으로 동분서주했지만이미 명은 지원병을 보낼 형편이 못 되었다김육은 무거운 마음으로 귀국길에 올랐고산해관을 나와 영원장산도석다산을 경유하여 이듬해 5월 14일 평양에 도착하였다김육은 사행길의 여정을 일기로 쓴 [조경일록]을 남겼다.

 

김육은 아마도 임진왜란 때 명이 조선을 도와준 것처럼 도와줄 것이라 믿었던 것 같다그러나 더 이상 과거 중원을 호령하던 명나라가 아니었다더 이상 기댈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한 김육은 조선 내부의 개혁에 온 정력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김육은 평생 4번을 중국에 갔다. 3번에 걸쳐 북경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한번은 심양에서 장기간 체류하였다첫 사행 때인 1636그의 나이는 57세 때였다당시 관직은 정3품 당상관으로 안변도호부사 임기를 마친 뒤였다보통 동지사는 정2품 이상의 고관을 파견하는 것이 관례였으나위험한 해로로 가는 것이어서 기피하는 사람이 많았다김육은 정기 사행인 동지·성절·천추진하사에 임명되어 해로로 명조의 북경을 왕래했는데그의 사행은 명나라로 간 마지막 사행이었다. 1643년에는 소현세자가 선양에 볼모로 잡혀가자보양관으로 수행을 하였다. 1646년에는 사은사로, 1650년에는 대신 자격으로 북경을 왕래했다김육은 17세기 중반 동아시아 역사의 가장 중요한 고비에 중국에 있었다그는 중국에서 많은 것을 배우며 느꼈고선진적인 중국 문물이나 제도를 조선에 도입하고자 했다이러한 경험들이 그가 다른 관념적인 성리학자들보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사회개혁 정책을 추진하게 된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병자호란 와중에 귀국한 김육은 1638년 7월 정태화의 후임으로 충청도관찰사가 되자 대동법공물<특산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납세제도)과 균역법(백성들의 군역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마련한 세금 제도군대에 직접 가지 않는 대신 내던 군포 2필의 의무를 1필로 줄였다)의 시행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다이어서 [구황촬요(흉년에 대비한 내용의 책)]와 [벽온방]을 간행하고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수차를 만들어서 관개에 쓰게 하는 등 부국을 위해 힘썼다임기를 마친 뒤에는 서울에 올라와 홍문관 부제학호조참의한성부 우윤 등 두루 고위직을 거쳤고 청렴한 성품으로 인조의 총애를 받았다.

 

김육의 생애는 광해군 대로 10년간의 은거 생활과 인조·효종 때 중국 사행 체험이 그의 경세적 학풍에 큰 영향을 끼쳤다. 1613년부터 1623년 인조반정 직전까지 10년 동안 경기도 가평의 잠곡에서 주경야독하던 생활을 통해 백성들의 어려움을 몸소 체험하였고네 차례에 걸친 중국 사행을 통해 중국 문물을 접할 수 있었던 경험이 대동법과 용전론(상평통보의 주조를 건의하여 유통하게 했다)에 바탕을 둔 경세학(정치적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을 탄생시켰다.

 

대동법은 조선 후기 시행되었던 가장 합리적인 세법(稅法)이었다대동법은 토지 1결당 백미 12두만을 내는 세법으로 그간 공물·진상 등 각종 명목으로 잡다하게 거둬들여 균등하지 못했던 조세를 형평에 맞게 만든 것이다.

 

대동법은 이미 이원익과 한백겸의 건의로 1608(광해군 원년경기도에 실시한 적이 있었지만전국적으로 확대되지는 못하고 있었다이러한 상황에서 1638(인조 16김육이 충청감사로 제수되면서 대동법 시행을 강력하게 건의하였다김육은 대동법의 시행이 백성을 구제하는 방편이면서 국가 재정확보에도 도움이 되는 시책이라 생각하였다그러나 대동법이 국가 재정을 부족하게 만드는 세법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 실제 운영에는 진전이 없었다그러나 효종의 등극과 함께 김육이 우의정에 제수되면서 전기가 마련되었다김육은 효종에게 충청도와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고 대동법이야말로 곤궁에 빠진 백성을 구제할 구민 책이라 주장하였다결국 김집(1574-1656) 등 산림 출신들과 불화를 낳기도 했지만 결국 효종 2년 호서지방에서도 대동법이 시행되었다김육은 호서대동법에 만족하지 않고 호남으로 확대하였고호서대동법의 성공적인 시행에 힘을 얻어 1658(효종 9)에 호남지역에도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대동법은 조세 제도를 공평하고 효율적으로 만든 획기적인 개혁이었다이는 토지 결 수에 따라 정량의 쌀로 조세를 내는 방식으로기존에 공물을 내던 방식의 여러 문제점을 해결했다지방 관청의 불법적인 징세방납인과 관리에 의한 중간 수탈 등을 해결했다농지 소득에 따른 조세 기준을 확립함에 따라 조세 징수가 공평해졌고납세자들의 부담 또한 덜해졌으며조세 부과 기준이 명확해지고재정은 충실해졌다대동법은 민생 안정재정 충실화그리고 시장 발달을 통해 왕조의 부흥에 이바지한 최대 사업이었다고 할 만하다.


대동법은 토산물의 수탈을 막아 생산을 촉진했다물품 화폐금속 화폐로 납부된 대동세로 공물을 조달하게 되면서 시장 또한 성장했다김육이 끊임없이 건의하고 추진했던 동전 통용책은 대동법의 확대 시행과 맞물려 조선 후기의 경제 성장에 밑거름이 되었다이렇듯 조선의 경제 발전 과정에서 김육의 공로는 빼놓을 수 없다.


김육은 대동법 외에도 상평통보의 주조마차 및 수차의 제조와 보급새로운 역법(曆法)인 시헌력(時憲曆)의 사용 등 혁신적인 제도개혁을 주장하였고이 가운데서도 특히 대동법의 전국적인 시행을 필생의 사업으로 심혈을 기울였다마지막 운명의 순간에도 전라도 대동법안을 유언으로 상소할 만큼 강한 의지와 집념을 보였다.

 

김육은 1658년 향년 79세로 세상을 떴다부친의 유명을 받아 가문을 일으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고 실제로 그의 집안은 조선 후기 명문 반열에 올랐다그의 아들인 김우명은 현종의 장인이 되었고손녀인 명성 황후는 숙종의 모후였다.

 

쓰러져 가는 가문을 일으키고극한 반대에도 대동법을 성공시킨 그의 일생을 보면그야말로 집념의 화신이라 말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그런 추진력은 독불장군처럼 보이기도 했다조선시대 효종실록을 편찬한 사관은 김육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평소에 백성을 잘 다스리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는데 정승이 되자 새로 시행한 것이 많았다양호(兩湖)의 대동법은 그가 건의한 것이다다만 자신감이 너무 지나쳐서 처음 대동법을 의논할 때 김집과 의견이 맞지 않자 김육이 불만을 품고 상소로 여러 차례에 걸쳐 김집을 공격하니 사람들이 단점으로 여겼다그가 죽자 상이 탄식하기를 어떻게 하면 국사를 담당하여 김육과 같이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효종실록 효종 9(1658) 9월 5일 자

 

김육의 졸기에 드러나듯이, (김육은) “평생 경제를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고 출세한 사람은 대부분이 경세제민을 임무로 삼았다고 보아야 한다그런데 평생 경제를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라고 조선왕조실록에서 평가받은 인물이 드문 점에서국가를 잘 다스려 인민을 구제하려는 김육의 사명감 또는 책임 의식은 각별했다그래서 김육은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대동법 등 소신의 정책 수행에 정치 생명을 걸었다.


김육은 어린 나이에 소학을 읽고 깊이 감명받아 경세제민의 뜻을 품고숨이 다할 때까지 이 뜻을 줄곧 지켰다지방 관리로 있으면서 경제 정책을 수없이 건의했고이후 정승으로서 이 정책을 추진하고 시행했다대동법과 동전 통용책 등 조선 후기의 경제 발전과 사회 발전을 가져온 빛나는 정책들은 이렇듯 김육의 소신에 힘입은 바가 컸다.


김육은 여러 정책을 건의하고 추진하면서 당파의 이해가 아닌 본인의 소신과 철학을 따랐다오로지 민생 안정이라는 큰 뜻을 가지고 이를 위한 제도개혁에만 온 힘을 쏟은 것이다김육은 강직한 성품으로 정파를 초월해 정치력을 발휘했다공방을 거치며 대립했던 인사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고다른 당색을 가진 관료 간의 협력을 이루기도 했다뚝심 있는 소신과 정파를 초월한 정치력은 김육을 조선 왕조 최대의 정책 업적을 이룩한 인물로 만들었다.


김육은 다사다난한 생애를 보냈다. 12세 때에 일찍이 경세제민의 포부를 품었으나, 13세 때에 임진왜란을 맞는다이 전란 중에 부모를 잃고 죽을 고생을 했다집안을 일으키고자신의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관직에 나서고자 노력했으나 광해군 대에 벌어진 계축옥사로 꿈을 이루기 어려워졌다이후 벼슬의 뜻을 꺾고 경기도 가평군 소재의 잠곡으로 낙향해 10년 동안 농사를 짓고 살았다. 40대 중반에 이르러서 다시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다중앙 관부의 요직뿐 아니라 지방관사신 등 다양한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이윽고 70대에 정승의 자리에 올랐고우의정으로 부임하자마자 대동법의 확대 시행을 추진하는 등 그동안 갈고닦아 왔던 자신의 소신을 펼치며 경제와 문화 영역에 여러 업적을 남겼다.


많은 역경을 겪으면서도 김육은 좌절하지 않고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구체화했다젊은 시절의 경험은 오히려 그가 펼친 소신과 업적의 토대가 되었다김육은 전란을 겪고은거하며 농사를 짓고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민생 안정을 위한 정책 실현을 소명으로 삼았다김육이 이러한 소명을 위대한 업적으로 이뤄 낼 수 있었던 것은 특유의 부지런함과 정신력이 동력이었다잠곡에 은거하던 10년 동안에도 학문에 정진하며 경륜을 쌓았고지방관으로서 일하면서도 풍부한 저술과 출판 활동하며 자신의 사상을 공고히 했다김육이 후대에 남긴 정책 업적은 이렇듯 꾸준한 노력이 맺은 결실로 평가된다.


김육은 1658년 9월 4일 7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이날 비변사 회의에서는 전라도 대동법과 대동미를 저장하는 태안의 창고 설치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김육은 마치 이 회의의 결과를 듣기 위해 기다린 것처럼 이날 저녁까지 버티다가회의의 결과를 듣고 난 후 숨을 거두었다. “직무에 온 힘을 쏟다가 쓰러져 죽기를 바란다던 김육은 실제로 마지막까지 대동법의 완수에 힘을 쏟았다.


김육은 다양한 학문에 개방적인 자세로 접근하여 조선 후기의 과학 기술 발달에도 이바지했다명분과 의리에 매달렸던 주자학자들과 달리 박학(博學)을 추구했으며 오랑캐로 그렇다고 보았던 청나라의 문물뿐 아니라 서양의 문물에 대해서도 개방적이었다선진 기술과 과학을 도입하고전문성을 갖춘 기술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힘썼다시헌력의 도입은 대표적인 성과였고중국의 수차(물레방아), 수레직기(피륙을 짜는 기계)의 도입을 추진하기도 했다.


김육이 공헌한 대동법은 근세적 조세 국가의 성립에 이바지했고동전 통용책(通用策)을 비롯한 화폐 제도는 시장의 발전을 일구었다또한 승지로 있을 때 주장한 서울 하천의 정비 사업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 간접 자본의 구축으로 볼 수 있다조선 왕조가 경제 성장을 위한 사회 간접 자본 구축에 유능하지 못했던 것에 비추어 보면 김육의 존재는 매우 귀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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