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쉽게 풀어쓰는 한국사] 신라인들의 근친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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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창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03-23 07:36 조회87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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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김 씨 왕족들이 가지고 있던 근친결혼 풍습은 넓게는 유목문화와 관련 있기도 하지만, 그 문화가 천산 주변에 살던 사카족의 그것과 맥이 닿아 있을 개연성이 크다는 것이다. 또한 중고기의 고총 고분에서 나온 토우 장식 항아리에는 수많은 토우가 부착되어 있는데, 토우 중에는 성애장면을 다양하게 연출한 것들이 많다. 이는 당시에 신라인들이 상당히 개방적인 성문화가 있었음을 방증한다. 자유로운 성애장면을 담은 천산 주변의 사카족의 암각화가 그러한 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삼국사기>
『김대문은 본래 신라의 귀족 자제로서 성덕왕 3년(704) 한산주 도독이 되었다. 그가 전기 몇 권을 지었는데 그중 <고승전>, <화랑세기>, <악본>, <한산기> 등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삼국사기> 권 4에 실려 있는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
신라 귀족 사회의 문란한 성관계와 근친혼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통해서도 이미 알려져 있었다. 진흥왕의 아버지인 갈문왕 입종은 조카 지소(갈문왕 입종의 형제인 법흥왕의 딸)와 결혼하여 진흥왕을 낳았다. 또 진흥왕의 아들인 동륜태자는 고모 만호(진흥왕의 여동생)와 결혼하여 진평왕을 낳았다. 진평왕 역시 사촌이었던 마야부인과 결혼했다. 또한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와 김춘추가 혼전 임신하고 결혼한 사건은 매우 유명한 일이다. 게다가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서 태어난 딸 지소부인은 김유신과 결혼했으니 김유신은 조카와 결혼한 것이죠. 통일 이후에도 이러한 근친혼은 계속되었다. 신문왕은 김흠돌의 반란을 진압한 직후 김흠돌의 딸을 왕비 자리에서 쫓아내고, 김흠운의 딸을 새 왕비로 맞이했다. 김흠운은 무열왕 김춘추의 사위였으니 무열왕의 손자 신문왕과 무열왕의 외손녀가 결혼한 것이 된다. 또 효성왕은 자기 외할아버지 김순원의 딸, 즉 이모와 결혼했다.
신라 왕실에서는 혈통을 순수하게 보존하기 위한 근친혼이 많았다. 권력과 재산을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에게 호락호락 넘겨준다? 인간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종욱
이러한 골품제도 때문에 신라에서는 왕이 되고 그 자손이 궁궐에 남기 위해서는, 오직 직계 혈통의 왕족끼리 결혼해 성골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골로 왕을 배출하기 위해서는 근친상간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윤리적인 잣대로 따질 수 없는 당대의 신라 사회가 가지고 있는 규범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 내물왕조
『처(妻)를 취할 때 동성(同姓)을 얻지 않는 것은, 남녀가 다름을 두터이 하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노공(魯公)이 성이 같은 오(吳)에 장가들고, 진후(晉侯)가 성이 같은 네 첩을 가지자, 진(陳)의 사패(司敗)와 정(鄭)의 자산(子産)이 크게 나무랐다. 신라와 같은 나라는 동성과 혼인할 뿐만 아니라, 형제의 소생과 고종·이종사촌 누이들까지 데려다 아내로 삼았다. 비록 외국의 풍속이 서로 다르다고 할지라도, 중국의 예속으로써 이를 나무란다면 크게 잘못된 일이다. 흉노가 어미 자식 간에 붙는 것은 이보다 더 심한 일이다.』
김부식의 시각은 ‘비록 외국의 풍속이 서로 다르다고 할지라도 중국의 예속으로써 이를 나무란다면 크게 잘못된 일’이라는 데 집약되어있다. ‘우리의 예속’이 아니라 ‘중국의 예속’으로 비판한다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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