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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 [연애를 영화로 배웠네] 동굴 속의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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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onymous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2-13 09:10 조회1,5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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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렇게 좋았는데.


"그리고…, 나 햄버거 싫어해." 

도심 내 촌스러운 커피숍 안. 마주 앉은 그에게 기어이 이 말을 하고 말았다. 헤어지자는 말 대신이었다. 그는 햄버거를 좋아했다. 특히 버거계의 왕이라 불리는 그 브랜드를 사랑했다. 우리는 데이트를 하다가 종종 버거왕에 가곤 했는데 나는 내 기호를 밝히지 않았다. 늘 싫어하는 내색 없이 먹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날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의 기호를 밝혔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우린 헤어졌다. 

분위기 좋고.

그 시절 나는 영화 ‘봄날은 간다’의 여주인공 ‘은수’에 빙의해 있었다(이영애 빙의가 아님). 은수는 여린 듯 단단한 여자였다. 지방 방송국 라디오 PD였던 은수는 이혼녀였다. 상처가 있음에도 쿨하면서 서글서글한 은수에게 사운드 엔지니어인 상우는 푹 빠진다. 봄날 동안 둘은 알콩달콩 사랑을 키운다.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연애의 마침표 같은 결혼 이야기를 여자는 입에 올리지 않는다. 하지만 연애의 화법에서 가정법은 필수 아니던가. “우리가 결혼하면”으로 시작하는 상상들. 시간이 흐르지만, 은수의 방어막은 해제되지 않는다. 은수는 쿨한 여자가 아니라, 쿨하게 흘려보내고 싶은 여자였다. 

진짜 라면만 먹고갈 건 아니지.

나 역시 사랑을 시작했지만, 돌이켜보면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했는데 당시 내 타이밍은 아니었다. 나는 도망가기 바빴다. 그가 보고 반했던 내 모습 이상을 꺼내놓지 못했다. 마음속에 잔뜩 도사린 것들이 많은데 그걸 나누지 못했다. 한 번 말을 가둬놓으니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그의 앞에서 쿨해져갔다. 당연히 가정법은 없었다. 

맛있니.

사실 그무렵 나는 통째로 흔들리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하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건지. 비슷한 것들을 시도하고 있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면 좀 쉽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자존심 강한 나는 고민을 꺼내놓는 게 어려웠다. 만나서 말을 못하니 만남을 지속할 이유도 사라져갔다. 

너무 멀다.

영화에서 상우는 은수에게 결혼하자고 말한다. 은수는 단박에 “김치 못 담가”라고 말하며 돌려 거절한다. 결국 둘의 마지막 대화이자 영화 속 명대사는 이렇게 탄생한다. 

“우리 헤어지자.”(은수)
“내가 잘할게.”(상우)
“헤어져.”(은수)
“너 나 사랑하니?”(상우)
“….”(은수)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헤어지자.”(상우)

어딜보고 있는거야.

내 경우 일부러 햄버거를 이별용어로 쓰겠다고 작정하고 나갔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그 순간 햄버거를 떠올렸을까. ‘니가 좋아하는 햄버거를 난 싫어해=나는 너와 맞지 않는 인간이야’라는 논리구조였던 건데 결국 어설픈 은수 빙의로 끝났다(이후 난 햄버거를 정말 먹지 않는 인간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흘러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내게 “그때 미안했다”고 했다. 멍해졌다. 내가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뭐, 뭐지. 그는 “내 상황이 그때 힘들어서 너에게 손 내밀지 못했다”고도 했다. 이것도 내가 할 말이었는데 뭐, 뭐지. 


다 부질없다.

결국 인간은 상호반응하는 동물임을 깨달았다. 내가 사랑해야 상대도 사랑한다. 사랑은 눈덩이 굴리듯 주고 받으면서 커진다. 그런데 우린 각자의 동굴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내 잘못만은 아니었다고 홀가분해졌지만 한편으로 씁쓸했다. 다시 만나본 결과 그는 내꺼 아닌, 괜찮은 사람이었다. 



마늘 먹고 이제 인간된 기자 hambugerphobia@joongang.co.k*r

※기자 이름과 e메일 주소는 글 내용에 맞춰 허구로 만든 것입니다. 이 칼럼은 익명으로 게재됩니다. 필자는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중 한 명입니다. 매주 금요일 업데이트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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