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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 [뉴스 속으로] 메르스 취재 69일, 잊지 못할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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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온라인중앙일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8-01 05:26 조회1,7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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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한 14번 수퍼 전파자 찾으려 수백 세대 등기부 조회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환자 발생부터 사실상의 종식 선언까지 69일 동안 본지 기자 20여 명이 서울과 지방에서 취재에 매달렸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이후 최대의 인원 동원이었다. 매일 적게는 2개 면, 많게는 8~9개 면에 관련 기사를 실었다. 그사이 무책임한 당국자들의 태도에 함께 분노했고, 안타까운 사연에 함께 눈물을 흘렸다. ‘메르스가 내 환자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맨머리를 들이밀고 싸우겠다’고 다짐하는 의료인의 숭고한 직업의식에 감동하기도 했다. 그 69일간의 기억에서 가장 오래 남을 순간들을 정리해봤다. 

신성식 복지전문기자, 이에스더·정종훈·노진호·김나한 기자 ssshin@joongang.co.kr

<오판> ‘2m 내, 1시간 이상’ 접촉해야 감염 … 출처불명 기준 탓에 초기 방역 실패

“그건 우리 지침이 아닙니다. 5월 21일 첫 브리핑 때 A교수가 밀접 접촉자를 그렇게 정의한 걸로 기억합니다.”(질병관리본부 모 과장)

 “2m 이내 접촉을 밀접 접촉이라 했지 1시간 이상으로 말한 적 없습니다.”(A교수)

 ‘2m 이내, 1시간 이상’이란 밀접 접촉자 기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묻는 기자에게 방역 당국자와 전문가가 내놓은 답이다. 이 기준은 초기 방역 실패의 핵심 원인이 됐다. 양병국 질병관리본부장과 A교수(메르스 민관합동대책반 공동위원장 역임)는 첫 환자 발생 다음 날(5월 21일) 수십 명의 기자가 지켜보는 브리핑에서 나란히 “2m 이내 1시간 이상 함께 대화하면 밀접 접촉자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양 본부장은 “세계보건기구(WHO)의 가이드라인에 따른 것”이라고 부연 설명도 했다. 하지만 그런 기준은 WHO에도,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결정적인 오판을 내린 걸까. 첫 단추를 잘못 끼우게 된 경위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불통> “기자는 기자실에만 있어라” … 대책본부 사무실에서 문전박대

정부는 환자 발생 병원 등 모든 정보를 틀어쥔 채 국민들과의 소통에 소홀했다. 기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불통’은 첫 사망자(57·여)가 발생한 6월 1일 밤에 정점으로 치달았다. 사망자 발생 직후 세종시 보건복지부 청사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청사 내에서 공무원 얼굴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언론 소통 창구인 복지부 대변인실을 비롯해 담당 공무원 중 누구와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청사 3층에 위치한 기자실에 머물던 취재 기자들은 사실 확인을 위해 5층 중앙메르스대책본부 사무실로 올라갔다. 기자들이 계속 항의하자 담당 공무원이 나와 “청사 경비를 부르겠다. 기자는 기자실에만 있으라”며 밀어냈다. 한 시간 뒤쯤 사망 사실을 확인하는 짧은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하지만 사망 시각조차 잘못된 엉터리 정보였다. 잠시 뒤엔 대변인실의 문마저 굳게 잠겼다. 그 이후 받지 않을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대책본부 공무원들에게 전화를 거는 게 기자들의 일상이 됐다.

<추적> 수퍼 전파자 집 찾아 취재 시도 … 결국 못 만나고 손 편지만 남겨

메르스 취재팀이 꾸려진 뒤 확진자들이 있던 병원을 수없이 오갔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14번의 행방을 쫓았을 때다. 삼성서울병원에서 80여 명에게 병을 옮겨 ‘수퍼 전파자’로 불린 14번은 6월 22일 완치 판정을 받고 퇴원했다. 다음 날 그의 집이 있는 평택으로 향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가 사는 아파트를 알아냈다. 아는 건 그의 이름 세 글자뿐. 아파트 주민들을 상대로 수소문했다가는 그가 여기 산다는 걸 동네 주민들이 알게 될 터였다.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 아파트의 세대별 부동산 등기부등본을 조회하기 시작했다. 수백 세대를 조회한 끝에 결국 그의 집을 찾아냈다. “중앙일보 기자입니다. 말씀을 좀 들을 수 있을….”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여기까지 와서 그러십니까.” 두 시간을 기다린 뒤 다시 한 번 얘기했다. “피해자로서의 증언을 해주시죠.” 답이 없었다. 땅거미가 깔렸다. ‘힘내시라’는 손 편지 한 장을 문틈에 밀어 넣고 발걸음을 돌렸다.

<반전> 격리실 걸쇠 부쉈다던 141번 환자 … 기자 전화 반기며 “다 털어놔 후련”

병원 격리실 문을 부수고 달아났다는 비난을 한 몸에 받던 141번 환자. 그에게 던져야 할 질문들은 이랬다. ‘왜 격리치료실 문을 부쉈나요’ ‘왜 메르스를 여기저기 퍼뜨릴 거라고 협박했죠’ ‘유흥주점은 정말 자주 가나요.’ 141번의 전화번호를 손에 넣은 후에도 통화 시도를 망설이게 된 것은 돌려 물을 길 없는 ‘141번에 대한 의문점’ 때문이었다.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었는데 잘 전화하셨습니다.” 막상 전화를 걸자 그는 깜짝 놀랄 정도로 반가워했다. “나에게 사실 확인을 한 기자가 아무도 없었다”며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1시간여의 통화를 마쳤을 때 ‘그도 억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 격리실 걸쇠를 부순 게 아니라는 그의 주장은 이후 병원에 대한 추가 취재에서 사실로 확인됐다. 그는 유흥주점에도 가지 않았다고 했다. 통화 내용이 보도된 뒤 그는 전화로 이렇게 말했다. “한마디 못하고 속만 끓이다 묵혔던 말 다 했으니 이제 됐습니다.”

<안타까움> 인터뷰 약속한 삼성서울병원 의사 … 한동안 꺼진 휴대전화 다시 켜졌지만 ?

“의사인 제가 자기 몸 상태도 모르겠습니까. 증세가 나타난 상태에서 돌아다녔다는 건 거짓말입니다.” 삼성서울병원 의사인 35번 환자(38)는 전화 통화 내내 격앙된 상태였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메르스에 감염된 의사가 증세가 발현된 상태에서 아파트 재건축 총회 등에 참석해 시민 1500여 명과 접촉했다”고 발표한 다음 날(6월 5일)이었다. 그는 “극심하던 통증이 어제 조금 가라앉아 참을 만해졌는데 시장 발표를 본 뒤 다시 아픔이 심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연신 기침을 해댔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엿새 뒤 그가 중태에 빠졌다는 발표가 나왔다. 그로부터 두 달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그는 치료받고 있다. 그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사나흘에 한 번꼴로 전화를 걸어봤다. 그러다 지난달 27일 그의 휴대전화에 전화를 걸었더니 신호음이 울렸다. 통화로 연결은 안 됐지만 전화기가 켜졌다는 사실만으로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의 쾌유를 빈다.

<감동> “저승사자 물고 늘어지겠다는 표현 … 중환자실 하루만 있어도 절로 나와”

6월 10일은 메르스가 한창 기승을 부릴 시기였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코호트 격리’ 병원이 생겼다. 병동에 환자들과 함께 격리된 의료진의 생활이 궁금했다. 몇 번 연락한 적 있는 한림대 동탄성심병원에 의료진이 직접 하루 생활에 대해 쓴 글을 요청했다. 병원 측이 흔쾌히 승낙했다. 다음 날 오전 병원에서 “주인공 간호사가 집과 병원을 오가는 방식으로 코호트 격리된 상태”라고 연락이 왔다. 완전 격리가 아닌 다소 애매한 격리였다. 망설이다 일단 원고를 한번 받아보기로 했다. ‘저승사자 물고 늘어지겠습니다. 내 환자에게는 메르스 못 오게’라는 제목의 김현아(41) 간호사의 편지는 이런 과정을 통해 게재됐다. 이 편지는 의료진을 향하던 세상의 비난이 격려로 바뀌는 계기가 됐다. 김 간호사에게 글을 잘 쓰는 비결을 물으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보호복 입고 하루만 코호트 격리된 중환자실에 있으면서 환자들이 생과 사를 넘나드는 것을 보면 저절로 글이 나올 겁니다.”


[S BOX] “내 환자 끝까지 지키고 싶은 많은 의료진 중 한 명일 뿐”
 

갑자기 쏠린 관심에 가장 먼저 든 느낌은 그저 두렵다는 것이었다. 난 단지 내 환자들을 지키고 싶은 많은 의료진 중 그저 평범한 한 명의 간호사일 뿐인데….

 중환자실에서 보낸 20년은 단순히 그들을 돌보던 시간만은 아니었다. 때론 그들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던 시간들이었고, 그들의 거친 수염을 미는 시간은 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을 더는 시간이었다. 환자들과 나는 이렇게 서로 소통을 했고 그들은 이런 나에게 내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줬다. 메르스와 싸우던 시간은 그 자부심이 어느새 그들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굳어져 있었다는 걸 스스로 알게 된 시간이기도 했다. 내게 메르스는 결코 두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막연한 공포감에 싸인 사람들을 보며 내 자부심이, 내 사명감이 나도 모르게 두려움 뒤로 숨지는 않을까, 그래서 행여 ‘내 환자들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섰을 뿐이다.

 코호트 격리(병원을 통째로 봉쇄하는 조치) 중 이렇게 스스로 다짐했던 글이 공개되자마자 많은 이가 우리를 걱정해 줬고 당시 상황들을 궁금해했다. 전화로 끊임없이 인터뷰를 요청해 왔고 우리 얘기들을 듣고 싶어 했다. 환자들을 돌보는 바쁜 상황 속에서도 언론 인터뷰에 응했던 건 숨어서라도 메르스를 막고 있는 우리가 있다는 걸 알려야 공포에 싸인 많은 사람이 안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고 또 그 당시 우리에게는 더 많은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행히 많은 사람이 막연한 메르스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의료진에게 많은 관심과 힘을 줬고, 용기를 얻은 의료진은 두려움 없이 더욱더 메르스를 물고 늘어질 수 있었다.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격리를 마친 후 통화한 국무총리님께는 의료진을 대표해 용기가 꺾이지 않게 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드릴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처음 경험한 방송 출연은 긴장이 최고조였지만 메르스와 싸우던 시간뿐 아니라 그동안 간호사로 살아오면서 겪은 일들과 그 안에서 느낀 점을 대중 앞에서 얘기할 수 있는 영광을 준 고마운 시간이었다. 메르스와 싸운 모든 의료진을 대신해 참석한 야구 올스타전에서는 의료진을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직접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따스한 자리였다. 이 감사한 경험들이 앞으로도 반드시 내 환자를 끝까지 지켜내도록 하는 단단한 사명감이 될 것임을 난 굳게 믿고 있다. 김현아

한림대동탄성심병원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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