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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 '회사 가축' '영혼탈곡기' 된 86세대는 '세대전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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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온라인중앙일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12-13 18:45 조회1,5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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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문턱에서 번번이 미끄러지다 간신히 사원증을 목에 건 사회 초년생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의 한 장면. 명문대 신방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회사에선 40대 부장으로부터 온갖 가혹한 상황에 시달리는 20대 스포츠신문 수습 기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사진 반짝반짝영화사]

 


올해로 입사 17년차인 정유회사의 40대 부장은 한 달 전까진 후배를 위한 충실한 조언을 선배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운동권 경력이 있는 80년대 학번이다. 회식 때는 후배를 대상으로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충고를 하려 애썼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노력은 안 하고 불만이 많아. 자네가 지난번에 낸 기획 말이야, 깊이가 없어. 우리 때처럼 사회과학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가 봐….”

 

[세상 속으로] 80년대 민주화 주역 60년대생의 그늘

도전에 직면한 한국사회 주류
에세이 『사축일기』, 영화 ‘열정같은 …’
2030이 선배 꼬집는 문화 트렌드


 그런데 한 달 전 회식 자리에서 그는 3년차 여직원으로부터 도리어 충고를 들었다. 여직원은 캐나다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재원이다. 컴퓨터에도 능통하다. “팀장님, 엑셀 함수 몇 종류나 아세요. 20년 가까이 회사에 다니시면서 엑셀 작업을 매일 후배들에게 시키는 거 창피하지 않으세요?” 부장은 “후배의 얘기를 듣자마자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고백했다.

 1960년대 태어나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86세대’가 직장에서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다. 87년 ‘6·29 민주화 선언’을 이끌어냈을뿐더러 2000년 이후에는 정치권을 비롯해 재계·법조계·문화계 곳곳에서 대한민국 사회 주류로 등장한 그들이다. 그렇지만 조카뻘인 밀레니얼 세대(1980~2000년대생)로부터 ‘꼰대’라는 달갑지 않은 호칭을 듣는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꼰대는 ‘은어로 늙은이를 이르는 말’ 또는 ‘학생들의 은어로 선생님을 이르는 말’이다.

 2030세대가 삼촌뻘인 86세대를 풍자와 해학의 대상으로 삼는 콘텐트도 2015년 새로운 문화 트렌드로 등장했다. 시인 겸 싱어송라이터 강백수(28·본명 강민구)가 쓴 책 ?사축일기?가 대표적이다. 대학 입학 때부터 토익·학점 등 스펙(자격 조건) 경쟁을 겨우 뚫은 20대 신입사원이 직장에서 기성세대로부터 겪는 일상을 책으로 담았다. 이 책에서 말하는 사축(社畜)은 ‘회사의 가축처럼 일하는 직장인’을 일컫는다. 본래 일본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유행한 말로 국내에 수입됐다. 매주 페이스북에서 연재물 사축일기를 구독하는 사람은 7000명이 넘는다.

 지난달 25일 개봉한 배우 정재영·박보영 주연의 영화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도 86세대에 대한 조소가 주된 소재였다. 영화는 현실을 모른 채 수습기자에게 열정만을 강조하는 신문사 연예부장을 ‘영혼탈곡기’로 묘사했다. 영혼탈곡기란 영혼을 탈탈 털 정도로 후배를 괴롭히는 상사를 의미한다. 영화에서 부장은 후배들을 상대로 언제나 노력을 요구하고 열정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실제로도 86세대는 직장에서 ‘군대 고문관’일까. 본지가 11일 기업정보 사이트 ‘잡플래닛’에 의뢰한 결과, 30대 이하 주니어 직장인(5년차 이하)들의 윗세대에 대한 비판은 각양각색이었다.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에 다니는 한 4년차 직원은 선배들을 일컬어 “월급 도둑 차장급 직원이 많다”고 표현했다. 국내 대형 광고업체에 근무하는 주니어 직원은 “86세대 선배들은 시대의 흐름에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할뿐더러 아버지 세대인 50년대생보다도 보수적”이라고 적었다.

 젊은 세대는 86세대가 신기술을 익히는 일에 서툴다고 평가한다. 삼성에 근무하는 30대 초반 책임(과장)급 연구원은 “우리 부장은 80년대 운동권 경력을 끊임없이 안줏거리로 내세운다”며 “사상은 드높지만 정작 모바일 회사에 다니면서 태블릿PC로 와이파이 잡는 법도 모른다”고 말했다. 한 정보기술(IT) 업체 5년차 대리는 “하는 일 없는 부장들 대신 젊은 피를 넣어줬으면 좋겠다”며 “코딩을 하나도 할 줄 모르는 40대 이상 간부들을 보면 한숨만 나올 뿐”이라고 말했다. 삼성그룹의 경우, 연간 4500명 수준이었던 신입사원 선발 규모를 지난해부터 3000명 선으로 축소했다. 차장급 이상 간부 사원들의 급여가 총 급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늘어남에 따라 신입사원에게 들어가는 인건비가 예전에 비해 부족해진 까닭이다. 일자리는 86세대와 2030세대 간 세대 갈등의 본질이기도 하다. 서미영 인크루트 상무는 “대한민국 경제가 연간 3%로만 성장하더라도 86세대에 대한 불만은 일정 정도 수그러들 것”이라면서 “하지만 그렇지 못하니까 젊은 층 사이에서는 ‘86세대 때문에 86년생들이 취업을 못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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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30세대의 시선으로 볼 때 86세대 상사들은 지나치게 생각이 깊다. 젊은 세대가 단순히 놀이를 위해 찾는 페이스북·카카오톡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도 그들에겐 정치관·철학을 표출하는 하나의 ‘광장’이다. 에세이 사축일기에도 86세대의 진지함을 꼬집는 구절이 등장한다.

 “지옥문이 열렸다. 업무 효율 증대라는 목적으로 부서 카톡방이 열렸다. 며칠 지나지 않아 이곳은 부장님의 블로그가 됐다. 부장님이 올리는 말과 사진, 비즈니스 철학에 대해 최대한 성심성의껏 피드백하는 업무가 추가됐다. 소홀히 했다가는 ‘부장님의 서운함’이라는 대재앙이 뒤따를 것이다.”

 86세대는 아랫세대, 윗세대와 ‘세대 전쟁(generation war)’을 치렀고 또 치르고 있다. 미국의 ‘히피족’, 프랑스·독일의 68세대가 이전·이후 세대와 싸웠던 양상과 유사하다. 86세대는 종종 군부독재에 맞서 싸운 자신들의 경험을 호기로운 목소리로 들려주려고 했다. 그렇지만 ‘눈물의 캠퍼스’를 겪었던 86세대의 이야기는 20~30대 입장에서 볼 때 흘러간 옛 노래일 뿐이다. 86세대가 후배를 상대로 “노력하라”고 조언하면 후배들은 노력을 ‘노오력’으로 비꼬곤 한다. 서울대 곽금주(심리학과) 교수는 “8090세대(1980~90년 출생한 세대)가 노력을 노오력이라고 말하는 건 윗세대들을 향한 일종의 자조”라면서 “노력해도 통하지 않는 세상에 대해 너무나 간단히 말하는 선배 세대에 대한 반감이 숨어 있다”고 설명했다.

 사실 86세대의 지난 20년을 돌이켜 보면 그들 또한 자신들의 부모나 선배들이 한국전쟁이나 보릿고개 이야기를 할 때 귀담아 듣지 않았다는 시각이 있다. 그들의 경험에 대해 애써 의미를 축소하려 했다는 거다. 예를 들어 70년대 중화학공업을 육성해 현대 한국의 토대를 마련한 일이나 새마을운동에 대해 86세대는 그다지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화여대 함인희(사회학과) 교수는 “세대 갈등 가운데 특히 86세대와 20∼30대 사이의 갈등은 두 세대가 일자리·집값·연금 등을 두고 이해가 상충하면서 정서적 갈등 수준을 넘어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며 “선배 세대인 86세대가 먼저 양보의 손을 건네지 않는다면 봉합되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짚었다.

 그렇다고 86세대 모두가 꽉 막혀 있는 것만도 아니다. 꼰대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도 늘고 있다. 서울 소재 한 대형 로펌에 다니는 신진성(54)씨는 올 6월부터 매주 한 번씩 서울 강남의 스피치 학원에 다니고 있다. 직원은 물론 가족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최신 화술과 유행어 등을 배우기 시작했다. 신씨는 “가족과 이야기를 많이 하려 한다. 고등학생 딸에게 권위적인 모습은 통하지 않더라”고 전했다.

 386 컴퓨터는 486으로 그리고 586으로 버전 업했다. 그렇지만 686 컴퓨터는 없다. 퍼스널컴퓨터(PC)의 시대가 모바일의 시대로 전환된 까닭이다. 15년간 한국 사회를 주도했던 386세대도 언젠간 586 컴퓨터처럼 설 자리를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21세기가 도래한 이래 한국 사회의 주류를 차지했던 86세대가 이제 진정한 도전에 직면했다.

김영민 기자 brad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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