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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 [한나의 우아한 비행] 걷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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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ino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6-03-21 11:26 조회1,3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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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없는 서울생활에 내가 선택한 쉼은 걷는 것이다.

 

지하철, 버스가 답답한 어떤 날, 내 작은 집이 숨이 막힐 때, 무작정 걷곤 한다. 문득 ‘내가 왜 한국에 있지’, 이곳에 속한 것 같지 않을 때 탁 트인 한강 다리를 건넜다.

 

좋은 친구가 그리울 땐 사람 냄새 나는 어느 동네 풍경을 벗 삼아 좁은 골목을 걸었다. 약속 없는 일요일에는 청파동에서 예배를 드리고 여의도까지 걸었다. 걷기는 일상에 지친 나를 추스르는 방법이다. 

 

길을 걷다 만나는 도시 풍경 속에서 얻는 영감도 있고, 타인의 삶에 한 장면을 우연히 만나면 공감하기도 한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한참을 걷다 보면 고단함으로 누군가를 향했던 미운 감정조차 흩어진다. 그래서 누군가 나처럼 걷기를 좋아한다고 하면 듣고 싶다. 그가 걷는 이유를.

 

시민단체 자원봉사교육에서 만난 백승우 선생님은 매일 출근길 두 시간을 걷는다고 했다.

 

약수동 자택에서부터 직장인 남산 하얏트 호텔까지, 실제는 삼십 분이 채 안 되는 길이지만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걷다가 사진을 찍으며 시간이 늘었다. 

 

그는 출근길에 지나는 풍경을 담기 시작하면서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실감했고, 아침에 만나는 여럿 맑은 사람들과 벗이 되기도 했다. 운동 삼아 시작한 출근길 걷기로 건강만을 되찾은 것은 아니었다.

 

이제 출근길과 사진은 그의 삶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소중한 일상이 되었다. 처음부터 계획을 잡고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꾸준히 하다 보니 이런저런 길이 열렸다.

 

백 선생님은 수년간 기록한 출근길 사진과 글로 포토에세이 단행본 <약수동 출근길> (2013, 호박)을 냈고, 한국을 소개하는 영어 사진 책 <My Korea> (2015, 카노푸스)을 냈다.

 

사진으로 만난 출근길의 세상 덕분에 그는 날마다 꿈을 꾼다 했다. 그의 성과는 지속적인 걷기가 준 선물이었다.

 

고고학과 대비되는 ‘고현학’이라는 말이 있다. 고현학은 지금 우리가 사는 눈앞에 보이는 대도시의 풍경을 마치 수천 년 전의 사물을 관찰하듯 신기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현대인의 삶의 양상을 이해하려는 일상의 지적 활동이다.

 

고현학자는 대도시의 익명성 속에서 오감으로 느껴지는 온갖 사물과 풍경들의 의미를 파악하려 한다. 사회학자 정수복 선생은 고현학의 주요 방법론은 도시 걷기에 있다고 했다.

 

현대 도시의 핵심이 거리에 있고, 그 모든 풍경은 해석을 기다리는 기호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백 선생님과 나는 고현학자인 셈이다.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현학자로 이 도시를 걷고 있는가.

 

우리가 매일 내딛는 걸음, 그 걸음이 쌓이면 세월이 된다. 그러고 보면 별거 없어 보이는 세월도 똑같은 것이 없다. 걸음마다 보이는 풍경과 사유는 오늘의 지리한 일상을 특별하게 해준다. 해석을 기다리는 세상을 향해 사진을 찍고 생각을 글로 남기는 것은 일상을 충실하기 살기 위한 방법일 것이다.

 

"걷는 사람에게 절망은 없다, 그가 정말 걷는 사람이라면." 라는 한 시인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오늘도 이 도시를 걷는다. / 김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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