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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 대구의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희움, 6년 걸려 문 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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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온라인중앙일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6-01-21 08:35 조회1,3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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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5일 개관한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일본식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했다.

지난해 12월 5일 대구 서문로에서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이 개관했다. ‘(사)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 위안부 문제 해결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건립추진을 시작한 지 6년 만의 일이다. 


故 김순악 할머니께서 “내가 죽어도 내게 일어났던 일은 잊지 말아 달라”는 유언과 함께 남긴 돈이 씨앗 기금이 되었다. 

 

역사관의 공식 명칭은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이다. 위안부의 ‘위안’이란 ‘안식을 주고, 위안을 준다’는 뜻이다.

 

위안부는 일본에 의해 강요된 성 착취와 피해자의 고통을 은폐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말이다.

 

국제 사회에서는 ‘성노예’라는 표현을 쓰지만 당사자인 할머니들이 이 표현을 거부하고 있으며, 지금껏 사용한 명칭에 혼돈을 주기 때문에 ‘위안부’의 앞뒤에 인용 부호를 쓰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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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마당의 라일락 나무. 새순이 돋은 나무의 주름이 할머니들의 주름과 닮았다.

앞마당의 라일락 나무. 새순이 돋은 나무의 주름이 할머니들의 주름과 닮았다.

 

역사관은 1926년 경일은행 자본으로 지었던 2층 목조건물을 매입해 만들었다. 건물을 리모델링했지만 안뜰의 라일락 나무는 그대로 두었다. 라일락 나무의 생이 할머니들이 살아온 시기와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사)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의 이인순 사무처장은 “라일락 나무의 주름이 위안부 피해자의 주름과 닮았다”고 했다.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을 만든 사람들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을 만든 사람들 역사관 입구에는 팔찌와 엽서, 가방 등 희움 상품을 판매하는 공간인 희움 스토어가 마련됐다. 역사관에 들어서면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을 만든 사람들’이라는 전시물이 눈길을 끄는데, 여기에는 건립에 동참한 사람들의 이름이 쓰여 있다. 많은 청소년이 ‘희움 의식팔찌’ 구매를 통해 건립기금 마련에 동참했다. 1층 상설전시실, ‘그날의 기억’

1층 상설전시실, ‘그날의 기억’

 

1층 상설전시실에서는 중국·미얀마·필리핀·인도네시아 등 곳곳에서 일본군이 전쟁 중 저지른 만행을 각종 지도와 연표, 피해자의 증언이 담긴 영상 등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꽃다운 나이, 십대 소녀들의 삶을 완전히 파괴해버린 위안부 생활. 당시의 끔찍했던 생활을 떠올리며 증언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관람객의 눈시울을 붉히게 한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에는 故 심달연 할머니와 故 김순악 할머니의 압화 작품 5점이 걸려있다.

 

피해자 정서치료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원예압화프로그램에 참여한 할머니들은 네 번의 전시회를 개최했고 『할매, 사랑에 빠지다』, 『할매, 사랑에 빠지다 두번째 이야기』 두 권의 작품집도 발간했다. 작품집은 희움을 통해 판매되고 있다.

 

2층에는 기획전시실과 교육관, 야외 전시장 및 공연장으로 이용되는 공간희움이 있다. 현재 기획전시실에서는 ‘해방 70년 한·일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온 평화 이야기’를 주제로 일본 시민들의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교육관에 들어서면 대구·경북지역 피해자 26분 중 22분의 사진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교육관에는 부채·사진·시계·안경·담배 등 남기고 간 유품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이 일본식 적산가옥에 들어선 이유는 무엇일까. 건립 과정에 대해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자 ‘(사)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의 이인순 사무처장을 만났다.

(사)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의 이인순 사무처장

(사)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의 이인순 사무처장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건립은 어떤 계기로 시작되었나요.

“1990년대 초반, 위안부 문제를 알리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을 때 피해자들이 이미 고령이었어요. 그래서 일대기 편찬, 역사관 건립 같은 기념사업을 진행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해요. 피해자 할머니들이 앞장서서 운동이 진행돼 왔는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많이 돌아가셨어요.

 

정책해결운동의 영역 안에서 광범위하게 기념사업을 하자는 자각을 하게 됐죠. 우리 단체는 역사관 건립을 더는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2009년 말, 본격적으로 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를 발족했어요. 할머니들께 역사관을 세워서 당신들의 이야기를 계속 기억하려고 한다고 말씀을 드리니 굉장히 좋아하시더라고요.

 

평소에는 늘 ‘내가 죽고 나면 다 잊어버릴 거 뭘 그리 유난을 떠느냐’고 말씀하셨지만, 반드시 기억해달라는 반어적 표현이었다고 생각해요.”

 

–역사관 건립은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故 김순악 할머니께서 역사관 건립 추진 소식을 들으시고 1억이 넘는 금액을 건립기금으로 기탁하셨어요.

 

할머니께서 주신 돈이라고 해서 모두 역사관 건립에 사용하기 보다는 故 김순악 할머님이 생전에 하고자 했던 일에 일정부분 사용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죠.

 

상의 끝에 맡긴 돈의 절반을 소년·소녀가장 장학금으로 쓰고, 남은 돈은 건립기금으로 사용하기로 했어요. 또 기금 마련을 위해 브랜드 ‘희움’을 만들었어요. 희움을 통해 기부도 하고 매일매일 일상 속에서 할머니들을 기억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자는 생각에 ‘의식 팔찌’를 판매하게 되었어요. 생각보다 많은 분이 동참해주셔서 역사관을 건립할 수 있었죠.”

 

-정부와 지자체에서는 어떤 도움을 받았나요.

 

“여성가족부나 재정경제부, 대구시 및 지자체에 지원요청을 했지만 초기엔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았어요.

 

2012년부터 대구 동성로에서 홍보 캠페인을 진행하고 희움 물품을 팔기 시작했죠. ‘실체가 없어서 도와주지 않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에 그렇게 모은 돈으로 부지부터 매입했죠.

 

시민의 힘으로 부지까지 매입하고 나니 정부나 지자체의 책임을 묻는 여론이 형성되었고, 정부와 지자체가 그때부터 지원을 해주셨죠. 시민의 힘으로 정부와 지자체를 움직인 사례라고 볼 수 있겠네요.

 

하지만 지원금이 그다지 크지는 않았어요. 역사관 건립에는 총 13억 5천만원이 들었는데 모금과 판매수익금이 70% 이상이었으니 시민의 힘으로 지었다고 볼 수 있죠. 특히 청소년들이 희움 상품을 구매하고 자발적으로 캠페인을 진행하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어요.”

많은 청소년이 ‘희움 의식팔찌’를 구매해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건립에 큰 도움이 되었다. [사진=희움 홈페이지]

–역사관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나요.

 

“브랜드 ‘희움’의 뜻은 ‘희망을 모아 꽃피움’이에요. 희움을 통해 역사관 건립에 참여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이라고 이름 지었죠. 역사관의 이름에는 우리들의 희망, 참여자들의 희망을 꽃피우자는 의미가 담겨있어요.”

 

–역사관 건물이 일본식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한 것이라고 들었어요.

 

“이 건물은 1920년대에 지어졌다고 해요. 처음에는 건물이 다 허물어졌고, 앞마당에 라일락 나무 한 그루가 심겨 있었죠. 라일락 나무의 주름이 할머니들의 주름처럼 보였고, 건물과 라일락 나무 모두 할머니들과 비슷한 시기를 견뎌왔기 때문에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이 건물을 선택했어요.

 

일본식 적산가옥이 할머니들에게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지는 않을까 우려가 됐던 것도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역사를 직면하라’고 말하잖아요. 좋지 않은 기억이라고 해서 전부 무너뜨리고 새롭고 깔끔하게 치장하는 것보다는 리모델링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리모델링을 통해서 과거의 모습을 기억하고자 했죠.”

 

–시민들이 역사관 방문을 통해 배우고 느꼈으면 하는 것이 있다면.

 

“할머니들의 개인적 삶이 역사적 사건에 의해 크게 왜곡되었잖아요. 이를 통해서 역사적·사회적 문제들이 개인의 삶과 무관하지 않고 많은 연관을 준다는 인식했으면 해요.

 

개인은 모두 다양한 사건·환경과 연결된 존재라는 것, 관람객들이 이 점에 대해 인식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서도 역사에 대해 관심을 두고 지금 일어나는 사회적 문제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고민해보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는 어떤 사업을 추진할 예정인지.

 

“역사관 건립에는 청소년들의 역할이 굉장히 컸기 때문에 청소년을 위한 사업을 중심으로 전개하려고 해요.

 

눈높이에 맞춘 전시·행사를 통해서 청소년들이 많이 찾아주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요. 또 대구 지역 역사 선생님들과 연계해서 한 달에 한 번씩 청소년과 시민들을 위한 역사강의를 진행할 예정이에요.

 

자료집 제작이나 토론회 같은 시민모임 20년 활동을 정리하는 다양한 사업들도 있을 거고요. 마지막으로 출판사를 만들어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교재들도 만들 생각이에요.”

 

–청소년들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면 좋겠어요. 학교 안에서 작은 토론회를 열어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함께 공부할 기회를 만들거나 홍보캠페인을 열고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를 함께 보고 토론을 한다든지 말이죠.

 

요즘엔 외교협상에 관한 토론도 가능하겠죠. 외교협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서명운동을 진행할 수도 있을 거고요.

 

무리해서 지방에서 수요시위가 열리는 서울까지 가는 열정도 좋지만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주변의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면 좋겠어요.”

 

–피해자와의 상의 없이 타결된 위안부 협상에 대한 생각은 어떤지.

 

“할머니들과 국민의 의견을 떠난 협약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어요. 가해자로서 피해자에게 자기 잘못을 구체적으로 인정하거나 법적 책임을 인정하려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무효로 하거나 철회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문제가 올바르게 해결될 수 있도록 재협상을 추진해야죠.”

 

경기도 광주시의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부산 수영구의 ‘민족과 여성 역사관’, 서울의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에 이어 전국에서 네 번째로 지어진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이들 ‘위안부’ 역사관 중에는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폐관위기를 여러 번 맞은 곳도 있다. “내가 죽어도 내게 일어났던 일은 잊지 말아 달라”는 故 김순악 할머니의 바람과 함께 설립된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방학이 끝나기 전 위안부 역사관 방문을 통해 할머니들의 힘이 되어드리는 건 어떨까.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주소 대구광역시 중구 경상감영길 50
운영시간 오전 10시~오후 6시(점심시간: 1시~2시), 일요일·월요일 휴관
입장료 일반 2,000원, 학생 1,000원
문의 053-254-1431

글·사진=오영란(매산여고 2) TONG청소년기자, 청소년사회문제연구소 매산여고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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