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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 오프라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2위…재산만 30억 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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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redbear300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7-13 12:43 조회1,7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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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방송계에 혁명 일으켜 ... 미국에서 가장 후한 아프리카계 자선 기부자



오프라 윈프리(61)를 빼고 미국 미디어산업을 말할 수 없다. 금기를 뛰어 넘어 모든 주제에 문호를 개방한 대담하고 솔직한 토크쇼로 미국 방송계에 혁명을 가져온 인물이기 때문이다. 1984년 시작한 ‘오프라 윈프리 쇼’는 25년간 미국은 물론 전 세계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은 뒤 2011년 많은 아쉬움 속에 스스로 막을 내렸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퇴임 연설의 한 구절(원래는 웨스트포인트의 군가)를 떠오르게 한다. 이 프로그램의 사회와 제작을 맡으면서 윈프리는 ‘모든 미디어의 여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2015 포브스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순위 12위
 

2007년 미 대선 당시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의(오른쪽) 아이오와주 유세를 지원한 오프라 윈프리(가운데). / 사진:중앙포토

윈프리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엄청난 부도 축적했다.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기록된다. 재산이 30억 달러에 이른다. 돈을 쓰는 데도 인색하지 않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후한 아프리카계 자선 기부자로 통한다. 이미 오프라 윈프리 쇼를 할 때도 새 자동차를 사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을 방청객으로 모아 놓고 이들 모두에게 차를 선물하기도 했다. 윈프리는 특히 아프리카 여학생들이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학교를 지어주고 교과서와 학용품을 지원하는 사업에 몰두하고 있다.

윈프리를 빼고 미국의 힘 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말할 수도 없다. 윈프리는 미국의 아프리카계 중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이 가장 강한 인물의 한 명으로 꼽힌다. ‘2015 포브스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순위 12위에 올랐다. 윈프리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만든 ‘킹 메이커’로도 이름 높다. 오바마가 민주당 대선후보 경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적극적인 지원을 했다. 일리노이주 풀뿌리 정치인 출신으로 연방상원이던 오바마를 꾸준히 지원해 미국의 첫 아프리카계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한 일등공신으로 통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어떠한 정치적·경제적 보상도 요구하지 않는 담백한 태도로 눈길을 끌었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 독서로 극복

윈프리는 전 세계 자수성가한 사람의 우상이다. 가난하고 불행한 어린 시절을 딛고 남을 돕는 사람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윈프리는 1954년 미시시피주의 가난한 농촌 마을에서 10대 미혼모의 딸로 태어나 위스콘신주 밀워키의 친척집으로 보내졌다. 자신도 불우했던 어머니의 삶을 그대로 이어갈 뻔했다. 윈프리는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자신이 9살 때부터 사촌오빠와 친 삼촌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당당하게 고백했다. 왜 자신이 피해자인데도 이를 숨기고 살아야 하느냐는 당당함에 많은 미국인이 공감했다. 14살 때 임신해 아들을 낳았지만 2주 뒤에 숨졌다는 고백도 했다. 자신의 프로그램에서 했던 윈프리의 고통스러운 고백은 그런 일이 개인의 고통을 넘어 미국 사회에서 도도하게 벌어지는 사회적 병폐라는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밀워키에서 테네시주의 한 이발사 집으로 다시 보내졌던 그는 이 남자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자랐다. 불우했던 시절은 윈프리 자신의 필사적인 노력과 재능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윈프리 같은 불행한 사람은 전 세계에 무수히 많을 것이다. 다른 사람과 윈프리가 다른 것은 그 해소법이다. 윈프리는 불우했던 생활로 인한 어려움을 술이나 마약, 사회적 일탈로 해소하지 않았다. 그가 택한 방법은 독서였다. 고통을 잊기 위해 항상 책을 가까이 했고 어린 시절 시작된 엄청난 독서는 윈프리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윈프리의 전매특허인 애드리브와 즉석 연설, 코멘트는 독서의 힘에서 우러나왔다. 나중에 ‘오프라 북클럽’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을 내놓고 미국에 독서 열풍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윈프리는 미처 고교를 졸업하기도 전인 19세 때 지역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22세 때 볼티모어 방송국의 저녁 메인뉴스 공동 앵커 자리를 차지하면서 방송계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오프라의 진행 방식을 싫어하던 담당자에 의해 하루 아침에 아침 토크쇼로 밀려났다. 시사뉴스 진행자로 이름을 날릴 기회를 놓친 오프라는 이런 불행을 오히려 기회로 활용했다. 숨은 재능을 발휘한 것이다. 출연자를 편안하게 해주면서 감성이 풍부한 애드리브와 함께 일사천리로 거침없이 진행하는 특유의 개성을 유감없이 드러낸 것이다. 시원시원한 대화는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아침 토크쇼는 대성공으로 이어졌다. 윈프리의 능숙한 진행은 시카고 지역의 3류 지역방송 토크쇼를 지역 내 1위의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으로 올려놓을 수 있었다. 그 결과 1984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오프라 윈프리 쇼’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윈프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출연료만으로 성이 차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제작사를 차렸다. 이 업체는 윈프리의 텔레비전 쇼를 전 세계에 공급하는 국제적인 방송 제작사로 성장했다. 30억 달러에 이르는 윈프리 재산의 원천이 됐다.

‘오프라 윈프리 쇼’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알려진 텔레비전 토크쇼는 하나의 전형적인 모습을 가진다. 쇼에서 윈프리는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소탈한 대화로 출연자의 마음을 풀어준다. 윈프리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다고 느낀 출연자는 자신의 개인적인 일상사를 대중 앞에 털어놓는다. 충격적이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진솔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막장 드라마 같은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차마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비밀이 대부분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감정적으로 격해지기도 하고, 후련해 하기도 한다. 시청자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 아파하거나 함께 공감하게 된다. 누구에게도 비밀은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윈프리의 출연자가 마음 편하게 자신의 비밀을 고백할 수 있도록 대화를 나누면서 애드리브로 시청자의 공감을 극대화 한다. 이 과정에서 윈프리는 때로 자신의 아픈 과거까지 숨김없이 털어놓는다. 이런 솔직함은 편안한 진행과 더불어 윈프리의 특징이 됐다. 시청자들은 온갖 감정의 변화 속에서 웃다가, 울다가, 화내거나, 감동하거나 하면서 쇼를 보게 된다. 때로 상상을 뛰어넘는 혁신적인 시도도 한다. 이러니 시청자가 채널을 돌릴 틈이 없고, 프로그램에 광고가 몰릴 수밖에 없다.

미국 기준으로는 타블로이드 신문이나 장식하던 기가 막힐 내용이 주류 방송 토크쇼의 소재가 된 것이다. 엄청난 힘을 가진 방송에서 이런 소재를 다뤘는데 어떻게 미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을까? 이는 대중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집어낸 윈프리의 감각에 있다는 게 미디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부부나 연인, 부모와 자식이 ‘우주의 생성 원리’와 ‘생물의 근원’ ‘미국과 러시아와의 외교관계 개선 가능성’ ‘아프리카 가난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원 효과’ 같은 고담준론을 소재로 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중은 가족과 함께 있을 때는 주로 주변 이야기, 동네이나 친척의 가십, 가족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이 가족과 나란히 앉아 보는 방송 프로그램에선 이런 이야기를 주제로 다루는 게 폭발적인 힘이 있다는 설명이다. ‘출생의 비밀’ ‘배우자의 바람기 같은 치정 관계’ ‘부부싸움’ ‘별거와 이혼’ ‘고부갈등’ ‘형제자매 싸움’ ‘부모와의 갈등’ 같은 타블로이드적인 소재가 바로 그것이다.

사회적 감성치유 효과 거둔 ‘오프라 윈프리 효과’

이런 허접해 보이는 소재를 ‘출연자의 고백’이라는 적나라한 형식에 입혀 시청자의 감성적인 친화력을 끌어내고 이를 통해 엄청난 시청률을 올리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출연자는 자신의 사연이 혼자만의 고통이 아님을 자각하게 되고 이는 시청자들에게 감정의 공유현상을 일으킨다. 결국 프로그램을 통해 출연자와 시청자 모두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고 이를 이용해 좌절을 극복할 힘을 얻게 된다. 미디어에서는 이를 두고 ‘오프라 윈프리 효과’라고 부른다. 방송 프로그램이 사회적 감성치유의 효과를 거두는 것이다. 고백의 소재에 따라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기도 한다. 출연자의 고백에 윈프리 자신의 충격적인 고백이 곁들여진 ‘친족에 의한 유아 강간’은 미국 사회에 커다란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예일대의 미디어 연구에 따르면 윈프리 쇼는 미국에서 필 도나휴가 개척한 ‘타블로이드 쇼’ 방식을 대중화하고, 혁명적으로 바꿔놓았다. 그 결과 소재의 제약을 없앴다. 예로 LGBT(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과 트랜스젠더)들이 거침없이 주류 방송에 등장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털어놓을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했다. 윈프리 쇼는 미국 사회를 더욱 개방적이고 솔직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분석이다.

쇼가 본 궤도에 올라가자 윈프리는 또다시 혁신을 시도한다. 자신의 토크쇼에 문학과 독서, 자기개발에 종교적인 영성까지 포함했다. 때로는 여과 없는 자기고백 문화, 자신이 직접 나서 문제가 있거나 소원을 이루지 못한 사람을 도와주는 지원 스타일, 감성 중심의 접근법 등이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쇼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윈프리는 밑바닥에서 독서와 노력, 인간 사랑으로 성공으로 이른 자수성가형 인간의 대표로 칭송받았다.

오프라를 가리키는 수식어 중에 독특한 것이 있다. 방송진행자, 미디어 소유주와 함께 ‘배우’라는 직업이 바로 그것이다. 윈프리는 1985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컬러 퍼플]에서 제도적으로 학대받는 여성 소피아를 연기했다. 193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던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들이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이 영화에 출연할 당시 윈프리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오프라 윈프리 쇼’가 탄생한 이듬해였다. 미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유명했지만 전국적으로는 지금처럼 유명하지 않았다. 연기도 초보였다. 그래서 받은 출연료가 3만5000 달러에 불과했다. 할리우드 기준으로는 단역 배우와 조연 배우의 중간쯤에 해당한다. 하지만 영화에서의 연기 도전으로 오프라 윈프리는 오스카상 후보에 오른 여배우가 됐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에 오른 지금도 그는 이 경력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이 기록으로 지난 3월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뽑은 ‘놀랄 만큼 낮은 출연료를 받은 할리우드 배우 10명’에 올랐다. 생존하는 유명인 중에서 인생은 주어진 것이 아니고 스스로 개척하는 것임을 그만큼 잘 알려주는 사람이 또 있을까?

글=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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