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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 전통주 되살리기 50년...'술은 애인처럼 살살 달래 빚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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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온라인중앙일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6-01-22 09:41 조회2,0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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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주.jpg

조정형 명인이 소줏고리에 불을 때고 있다. 소줏고리는 술을 내리는 재래식 증류기다. 술은 그에게 운명 같았다. 고두밥을 찌는 큰 가마솥이 땅속에서 치솟아오르는 태몽이 있었다고 한다. 이름에 ‘솥 정(鼎)’을 쓴 연유다. “거짓말 아니다. 아버지의 유고집에 기록돼 있다”고 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전통주 동네에서 ‘최고 어른’ 대접을 받는다. 50년 넘게 우리 술과 함께해 온 그의 공력 덕분이다. 전북 무형문화재 제6호, 전통식품 명인 제9호 등 타이틀도 화려하다. 하지만 정작 만난 그는 손사래를 쳤다.

[박정호의 사람 풍경] 전주 이강주 명인 조정형


“그냥 술 기술자로 불리는 게 가장 좋다”고 했다. “외국에서는 마스터(master)라고 하잖아요. 회장, 명인 다 매력 없어요. 제가 1급 양조기술사입니다. 술 관련 특허도 두 개 갖고 있고요. 지금도 연구 중입니다. 파우더 와인(powder wine·가루술)을 개발하고 있어요.”

- 가루술도 있나요.

“과자나 음식, 케이크 등을 만들 때 들어갑니다. 용도가 달라요. 휴대하기도 편하고. 일본에는 이미 나와 있죠. 연내에 특허를 출원할 계획입니다.”

당당하다. 외길 인생에 대한 확신이 배어 나온다. 주인공은 조정형(75) 전주 이강주(梨薑酒) 명인이다. 밀주(密酒)라는 수상쩍은 이름으로 불렸던 우리 술을 되살리는 데 매진해 왔다.

증류주·과실주·막걸리 등 갖은 전통주가 경쟁하는 요즘이지만 1988년 서울 올림픽 이전만 해도 우리 술은 각종 규제에 꽁꽁 묶여 있었다. ‘먹을 쌀도 없는데 술은 무슨 술’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다음달 8일 설날을 앞두고 전북 전주로 내려갔다.

그런데 웬걸, 첫 대면부터 예상이 빗나갔다. 기골 장대한 호인을 기대했는데 키 1m58㎝, 몸무게 64㎏의 다소 왜소한 사내가 기자를 반겼다. 결례를 무릅쓰고 불편한 질문부터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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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이강주 공장 숙성실.


- 몸에 대한 콤플렉스가 컸겠어요.

“형들은 큰데 저는 무지하게 작아요. 오기로 버텼는지 모릅니다. 상대 진학을 생각했었는데 대인관계를 피하려고 발효학(전북대)을 전공했어요. 대신 집중력이 좋아 학부를 수석 졸업했죠. 책을 두 번 정도 읽으면 그 안의 그래프를 외울 정도였습니다.”

- 설 명절이 곧 다가옵니다.

“대갓집에서 자랐습니다. 세배를 다니는 데만 일주일 가까이 걸렸죠. 그때는 집집마다 술을 빚었는데, 그 술을 들고 먼 곳에 계신 친척 어르신께 인사를 다녔어요. 강씨네 술, 평양댁 술 등 어른들은 이 집 저 집 술을 드시고 품평회도 열었죠. 종종 개울에 빠져 곱게 다린 새옷을 망친 분도 있었는데, 명절에는 모든 게 용서됐습니다. 그날만큼은 왕이 된 기분이었던 거죠.”

 

- 세주(歲酒)를 말하는 겁니까.

“어른들은 아이들에게도 액땜하라고 한 잔씩을 나누어줬어요. 정월 초하룻날에 이 술을 마시면 1년간 사기(邪氣)를 없애 오래 살 수 있다고 믿었죠. 더 중요한 건 주도(酒道)를 가르쳤다는 점입니다. 술은 조심해서 배워야 했어요. 한 잔 한 잔 받다 보면 다리가 풀리기도 했지만….”

- 떵떵거리는 집안이었나요.

“꼭 그런 건 아니고, 할아버지께서 전주부사, 지금으로 치면 군수를 하셨어요. 어릴 적에 호적을 보니까 60여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옛날 양반집에선 다 그랬죠. 함께 살지 않는 서자(庶子)도 호적에 올렸죠. 큰 잔치가 있으면 모두 와서 도와주었고…. 이강주는 6대 선조 때부터 집에서 빚어왔습니다.”

이강주에는 배(梨)와 생강(薑)이 들어간다. 쌀과 보리로 빚은 약주를 숙성시켜 소주를 내린 다음 여기에 배·생강·울금·계피를 넣어 1년간 더 숙성시킨다. 마지막으로 아카시아꿀을 가미한다. 옅은 노란색에 향이 강한 편이다. 알코올 도수 25도·19도 두 종류로 시판되며, 중국 수출용은 38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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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에 있는 술박물관. 조 명인은 술 관련 도구 1300점을 모았다.


- 술 인생 반세기가 됐습니다.

“64년 대학 졸업 직후 전북 이리 보배소주 공장장으로 들어갔습니다. 파격적 대우였죠. 이후 25년 동안 목포 삼학소주, 전주 오성주조, 제주 한일소주 등에서 공장장을 했어요. 잘나가는 1급 기술자였죠. 그런데 갈증을 느꼈어요, 뭔가 성에 차지 않았죠.”

- 갈증이라니, 무슨 뜻이죠.

“값싼 위스키도 많이 팔 때였어요. 외국 원액을 사다가 양주를 만들었는데, 내가 할 일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기술자로서 용납이 되지 않았죠. 우리 입맛에 맞는 술을 개발하고 싶었어요. 당연히 회사에선 싫어했죠. 누가 시간이 많이 들고, 성공 확률이 낮고, 제조허가도 나지 않을 술을 만들려고 하겠어요.”

-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자료조사부터 했습니다. 직원들을 시켜 전국 도서관에서 술과 관련된 한자, 이를테면 주(酒)·고(膏)·춘(春)자 들어간 고서를 복사해 왔죠(여기서 조 명인은 그때 자료가 수북이 쌓인 캐비닛을 열어 보였다). 그것을 토대로 전국 전통주 지도를 만들고 80년대 초부터 틈 나는 대로 방방곡곡을 누볐습니다.”

- 만만찮은 일이 아니었겠죠.

“다들 미쳤다고 했죠. 남들은 고생했다고 하는데, 다 제가 좋아서 한 일입니다. 재미있잖아요. 일단 시골에 가면 막걸리집부터 들렀습니다. 이런저런 음담패설도 하며 그 동네 술 애기를 듣죠. 술 빚는 사람이 있으면 소개도 받고. 마치 금광을 캐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렇게 연을 맺은 사람 중에 지금 명인이 된 이도 많아요. 취재 나온 작가를 사칭하다 경찰서에 불려간 적도 있고…. 참, 그때 ‘미친 놈 클럽’이 있었어요.”

- ‘미친 놈 클럽’이라니요.

“아리랑·무당·북 등을 조사하러 다니던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동아리가 됐죠. 이 동네 저 동네 정보를 주고받았어요. 전국을 반 바퀴 돌면 설 미친 놈, 한 바퀴 돌면 반 미친 놈, 두 바퀴를 돌면 완전 미친 놈이라고 했는데, 나는 두 바퀴를 돌았으니 완전 미친 놈이었죠. 그래도 인정이 살아 있는 때라 마을 사람들이 밥을 먹여주고 잠도 재워줬습니다.”

- 가족들 반대도 심했겠죠.

“오죽하면 한학자였던 아버지께서 제가 무형문화재 신청을 내려고 할 때 심사위원들에게 ‘저놈 떨어뜨려라’고까지 하셨을까요. 그래도 90년 이강주 공장을 세우고 사업이 잘되니까 아버지께서 고천(古泉)이란 호까지 지어주셨습니다. 오래된 샘, 술이 떠오르죠. 아내만큼은 ‘끝까지 해보라’고 했습니다. 역시 본각시가 최고입니다. 성공하든지 죽든지 둘 중 하나였습니다.”

- 전세를 11번 옮겨다녔습니다.

“사비(私費)로 연구하느라 작은 아파트 한 채 들어갔죠. 한 번은 돈을 벌겠다고 농약장사를 하다 크게 손해도 봤습니다. 죽어버릴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86년 제주에 내려가 약 2년 동안 술 200종을 직접 담가봤습니다. 방에 항아리 10개를 놓고 자글자글, 뽀글뽀글 술 익는 소리를 들을 때 얼마나 좋든지…. 이강주 공장을 세울 때도 전세보증금 7000만원에서 반을 뚝 떼 3500만원으로 시작했습니다. 인생 9수생을 자처하는 이유죠.”

- 술을 빚을 때 가장 중요한 건 뭐죠.

“온도입니다. 술마다 다르지만 이강주의 경우 처음 밑술은 28도가, 두 번째 내릴 땐 32도가 넘으면 안 됩니다. 온도를 높이면 빨리 익지만 특유의 맛을 낼 수 없습니다. 서두르면 절대 안 되죠. 지성을 들여야 합니다. 애인을 다루듯, 자식을 키우듯 말이죠. 살살 달래야 합니다. 항아리마다 익는 소리가 다 다르거든요.”

- 권할 만한 주도 가 있다면요.

“아버지께서 남기신 말씀이 있습니다. ‘주불강권(主不强勸) 객불고사(客不固辭)’입니다. 억지로 권하지도, 지나치게 사양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게 정답입니다. 술은 정을 나누는 겁니다. 주고받는 맛이 최고죠. 그런데 사람마다 취향이 달라요. 저는 25도 소주에 위가 맞춰진 까닭인지 맥주 맛을 모르겠어요. 오줌냄새가 나요. 또 술이 약하면 사이다로 대작해도 됩니다. 그게 우리의 문화입니다. 주품(酒品)입니다.”

술의 신선이 된 시인 이백, 술 낚시를 한 실학자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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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인간을 만들고 인간은 술을 만들었다고 했다. 술을 빼놓고 우리의 희로애락을 말하기 힘들다. 평생 술과 벗해 온 조정형 명인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주당이다. “젊어선 주량이 따로 없었다”고 말했다. “친구들이 제발 그만하자고 할 때까지 마셨다”며 얼굴을 붉혔다.

조 명인은 호탕한 성격이다. 말본새도 시원시원하다. 즉문즉답형이다. 그에게 좋아하는 역사상의 술꾼을 꼽아달라고 청했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중국 당나라 시인 이백(701~762·사진 왼쪽)과 조선 후기 실학자 박지원(1737~1805·사진 오른쪽)을 들었다. 그가 쓴 『명주보감』에도 소개한 인물이다.


“예전에는 지금처럼 각박하지 않았어요. 머리를 써 가며 술을 마시지 않았죠. 시대도 환경도 달라졌지만 술을 사랑하는 면에선 이백을 따를 만한 이가 없다고 봅니다. 주선(酒仙)이라는 별명이 공연히 생겼을까요.” 그가 이백의 시 ‘술잔을 들고 달에게 묻다(把酒問月)’ 마지막 대목을 읊었다.

‘오직 바라건대 노래하며 술을 들 때/오래오래 그 잔 속에 달빛이 비치기를(唯願當歌對酒時 月光長照金樽裏).’

박지원은 ‘술 낚시’로 유명했다. 술을 먹고 싶지만 살림이 가난해 손님이 왔을 때만 부인이 막걸리 두 잔을 내놓았다고 한다. 꾀를 낸 박지원은 가짜 손님을 끌어들이곤 했다.

풍채가 멋진 선비를 만나면 “바쁘지 않으시다면 저희 집에 같이 가서 약주나 한잔 하실까요”라고 권했다. 행인을 술 낚시의 미끼로 삼은 것이다. 조 명인이 크게 웃었다. “술 먹는 풍류와 해학이 이 정도는 돼야죠. 하하하.”

글=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jhlogos@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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