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行이 항상 좋진 않아…'경쟁자와의 차이 변화가 중요' > LIFE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Vancouver
Temp Max: 11.33°C
Temp Min: 8.57°C


LIFE

생활 | 중도行이 항상 좋진 않아…'경쟁자와의 차이 변화가 중요'

페이지 정보

작성자 온라인중앙일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8-01 06:03 조회1,413회 댓글0건

본문

‘중간(median) 투표자 정리(定理)’와 선거 승리의 함수
중도行이 항상 유리하진 않아 
당내 경선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자신에 대한 지지 증감보다는 
새 지지자와 이탈자 수 비교해야

 
1997년 11월 3일 국회의원회관에서 대통령후보단일화 합의문에 서명하는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왼쪽에서 둘째)와 김종필 자민련 총재(오른쪽에서 둘째). 12월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는 당선됐다. [중앙포토]



얼마 전 여당 원내대표 퇴진을 둘러싸고 거론된 이슈 하나는 여당의 정체성이었다. 좌로 이동하는 이른바 좌(左)클릭이 보수정당 새누리당 나아가서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냐는 지적이었다. 진보정당의 우(右)클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논쟁이 제기된다. 

한국정치사에서 대통령급 정치지도자 가운데 가장 오래 기간 진보적 이미지를 지녔던 이는 김대중(DJ) 전(前)대통령이다. 네 차례 대통령후보 시절의 DJ 이미지를 비교하면 1997년 때가 가장 덜 좌파적이었고 이때 DJ는 대통령에 당선됐다. 1997년 대통령선거 시기와 그 직전 선거인 1992년 선거를 앞두고 DJ는 어떤 색깔의 이미지를 만들었는지 비교해보자. 

먼저, 지금으로부터 꼭 26년 전인 1989년 8월 2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이날 DJ는 서경원 의원 북한 밀입국 사건과 관련되어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 전신)에 의해 강제구인되어 조사받았다. DJ는 서 의원의 방북사실을 사전에 몰랐고 인지한 즉시 서 의원을 당국에 출두하게 했으며 북한 자금을 받은 적이 없고 서 의원 공천에 관여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강제구인 이전인 6월에 이미 대(對)국민사과성명을 발표하고 서 의원을 당에서 제명했다. 

DJ, 92년 대선에선 좌클릭 실패 

이를 두고 같은 편에서는 배신이라고 하고 상대편에서는 ‘도마뱀 꼬리 자르기’의 위장이라고 말한다. 색깔문제로 피해 본 정치인으로서 잘 수습했다는 평가도 있을 것이다. 평가가 어떠하든 DJ는 북한 밀입국 사건이라는 정치적 위기를 극복했다. 

DJ의 좌파적 이미지는 반년 후 단행된 이른바 3당 합당으로 다시 짙어지게 되었다. 김영삼(YS) 민주당총재와 김종필(JP) 공화당총재가 노태우 대통령 측에 가담하여 민주자유당이라는 거대 보수정당을 창당했기 때문이다. 1992년 대통령선거는 그런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실시됐다. 

선거를 20여 일 앞두고 DJ는 전교조·전노협·전농·전대협·전빈련 등 민족민주를 주창하는 단체의 총연합체인 전국연합과 연대했고, 범민주단일후보로 추대됐다. 집토끼(전통적 지지자) 즉 좌파성향 유권자의 적극적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하려는 전략이었으나, 선거결과 집토끼보다 훨씬 많은 산토끼(부동표·浮動票)를 놓친 것으로 드러났다. 

YS와의 대결 구도에서 DJ는 전국연합과 연대함으로써 좌측으로 이동했는데, 이동 전에 YS보다 DJ를 더 가깝게 여겼던 유권자 일부(검은 네모 부분)는 DJ의 좌클릭 후 DJ보다 YS를 더 가깝게 인식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DJ는 자신이 좌측으로 이동한 거리의 절반을 YS에게 넘겨주고 804만 표(33.8%)를 얻었다. 

97년 대선선 DJP연대 우클릭 성공 

1992년 선거 패배 직후 DJ는 정계를 은퇴했다가 1995년 7월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 199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DJ가 취한 선택은 우클릭이었다. DJ는 자신을 온건 보수, 개혁적 보수로 부르고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한나라당)을 수구냉전, ‘보수꼴통’으로 불렀다. 실제 DJ가 개혁적 보수였는지 아니면 위장된 보수였는지는 호불호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DJ는 1996년 여름부터 영남지역과 보수성향 단체에 구애를 펼치는 등 우파적 행보를 이어갔다. 8월 연세대 특강에서는 한총련이 민주세력과 건전통일세력에 피해를 주니 자진해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9월 강릉에서 북한 잠수함이 좌초한 후 무장공비가 도주한 사건이 발생하자 10월 내내 북한을 강하게 규탄하고 국방비 증액과 군인 사기진작 등을 주장했다. 1997년 3월에는 노동자가 임금인상요구를 자제해야한다고 주장했다. 4월 미국 방문 때에는 주한미군이 북한의 남침 억제뿐 아니라 북한위협 소멸 후의 동북아평화유지에도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결정적인 우클릭은 DJP 연합 즉 YS측에서 이탈한 JP와 연대한 것이었다. DJ와 JP의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연대하게 되면 DJ와 JP의 지지자 일부는 이탈할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들어올 산토끼(추가될 지지)가 집 나갈 집토끼(빠질 지지)보다 더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연대가 성사됐다. 

199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DJ는 이회창(昌)후보와의 일대일 대결에서 밀렸다. DJ는 DJP연합을 통해 우측으로 이동했는데, 본래 DJ보다 昌을 더 가깝게 여긴 유권자 일부(검은 네모 부분)는 DJP연합 이후 DJ를 더 가깝게 받아들였다. DJ가 우측으로 이동한 거리의 절반만큼 昌에게서 뺏은 결과가 되었다. 상대에게서 한 개를 뺏으면 득표차는 두 개가 되니 결국 이동한 거리만큼 득표차 효과를 본 것이다. DJ는 1033만 표(40.3%)를 득표했다. 

물론 1997년 선거결과는 제3의 후보(이인제)와 경제위기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사실 1992년 선거에도 정주영후보와 박찬종후보라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제3의 후보 등 다른 주요한 요인이 있었다. 따라서 DJ의 득표율이 1992년 33.8%에서 1997년 40.3%로 6.5%포인트 증가한 것에는 우클릭의 영향이 지대했다고 말할 수 있다. 

새누리당,2012 총선·대선서 중도화 

이제 최근 선거를 살펴보자. 2012년 총선과 대선은 양자대결이었다. 공약 기준으로 보자면 미투이즘(me-too-ism)이나 판박이로 표현될 정도로 유사했고 중도층의 지지를 얻으려는 노력도 있었다. 하지만 연대 파트너 기준으론 중간으로 간 것이 아니었다. 

민주통합당은 반(反)MB 혹은 반(反)새누리당의 연합군사령부를 자처하고 양자대결구도로 몰았다. 2012년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은 막말파문을 일으킨 후보를 내치지 못했다. 또 통합진보당과의 연대 때문에 한미자유무역협정(FTA)과 제주해군기지 이슈에서 좌파적 입장을 표명했다. 2012년 대선에서도 통합진보당은 민주통합당을 지지했다. 민주통합당에 호의적이던 유권자 가운데 일부는 민주통합당이 좌경화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새누리당도 대선을 앞두고 이인제 대표의 선진통일당과 합당했다. 그렇지만 당명·인사·공약 등을 통해 좌클릭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민주통합당보다 더 중간으로 갔다. 

<그림 3>의 <검은 네모 부분>는 민주통합당-통합진보당 연대 및 새누리당 좌클릭 이전에 새누리당보다 민주통합당을 더 가깝게 받아들였던 유권자다. 이들은 두 야당의 연대 및 새누리당의 변신 후에 민주통합당보다 새누리당을 더 가깝게 인지하여 새누리당에 투표했다.

<검은 네모 부분>는 3.5%포인트라는 박근혜-문재인 두 후보 간 득표율 차를 설명하기에 충분한 크기다. 이런 선거에서 관찰되는 법칙 하나는 “투표자들을 한 직선 위에 이념 순으로 배열했을 때 그 중간에 위치한 후보는 다른 후보와 일대 일로 대결해서 지지 않는다”는 ‘중간(median)투표자정리(定理)’다. 유권자 모두가 투표에 참여하고 양당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상황에서는 중간으로 가기가 승리의 길이다. 중간으로 가기는 투표에 참여하고 싶은데 누구를 찍을까 고민하는 유권자에게 구애하는 전략이다. 

좌파정당에게는 우클릭이, 우파정당에게는 좌클릭이 유리한 선택이 각각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먼저, 좌우나 보혁(保革) 등 하나의 기준으로 유권자를 배열할 수 있어야 한다. 여러 기준으로 배열되어야 한다면 늘 유리한 위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유권자는 입장이 달라도 가깝기만 하면 그 가까운 정당에 투표해야 한다. 만일 자신과 아주 가깝게 위치한 후보가 없을 때 아예 기권하는 유권자가 다수라면, 중간 위치 대신에 가장 많은 유권자가 몰려있는 위치로 가야 유리하다. 

셋째, 기본적으로 양당제여야 한다. 새로운 유력 정당의 등장이 용이하다면 중간으로 가는 것은 위험을 수반한다. 좌클릭 혹은 우클릭 후 생긴 빈 공간에 신당이 진입하여 기존 정당의 집토끼를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유권자가 정치인의 입장변화를 수용해야 한다. 중간으로 가기는 일종의 박리다매(薄利多賣)다. 자신의 입장을 포기하고 많은 지지를 받아 선거에서 승리하려는 것이다. 만일 타협에 대한 유권자의 거부감이 크다면, 자신 입장을 고수하여 소신의 정치인이라는 평판을 얻는 것이 현명하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소수로부터 강한 지지를 받는 전략은 후리소매(厚利少賣)로 부를 수 있다. 

자칫하면 ‘철새’ 낙인 찍힐 수도 

정치노선 변경은 자칫하면 의리 없는 정치인이나 변절자·철새·사쿠라 등으로 새로운 낙인을 가져준다. 또 당내경선에서 취한 입장을 본선에서 바꾸기란 쉽지 않다. 뒤집어 말하면 본선에서 경쟁력이 있는 중간적 입장은 특정이념이 중시되는 당내 경선을 통과하기 어렵다. 

2002년 대선의 새천년민주당 당내 경선과 2007년 대선 본선에서 정동영후보는 중간적 성향을 보여줬는데, 당시 상황은 중간투표자정리가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이후 중간투표자정리가 통할 상황에서 정후보는 오히려 한·미 FTA(자유무역협정)와 대북정책 등에서 과거보다 더 과격한 입장을 견지했다. 

중간으로 가기가 유리한 상황도 있고 반대로 불리한 상황도 있다. 좌클릭이든 우클릭이든, 바꿀 때에는 새롭게 얻을 지지자 수와 이탈할 지지자 수를 비교해야 한다. 자신에 대한 지지 증감보다 경쟁자와의 차이 변화를 계산해야 한다. 

총선을 불과 8개월 앞둔 지금, 정치권은 선거전략을 마련하고 있을 것이다. 선거전략은 유권자가 자기를 지지하도록 만들기, 자기를 지지하는 유권자가 투표에 참여하도록 만들기, 경쟁후보를 지지하는 유권자가 기권하도록 만들기 등을 구분하여 수립해야한다. 선거전략 가운데 정당정체성은 특히 중시된다. 왜냐하면 그 정체성에 따라 선거승리뿐 아니라 계파 간 이해득실도 좌우되기 때문이다. 

김재한 교수 한림대 정치학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LIFE 목록

Total 196건 5 페이지
게시물 검색
회사소개 신문광고 & 온라인 광고: 604.544.5155 미디어킷 안내 개인정보처리방침 서비스이용약관 상단으로
주소 (Address) #338-4501 North Rd.Burnaby B.C V3N 4R7
Tel: 604 544 5155, E-mail: info@joongang.ca
Copyright © 밴쿠버 중앙일보 All rights reserved.
Developed by Vanple Netwroks Inc.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