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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집 | 70년대 정·재계 며느리들의 요리 선생님 심영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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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redbear300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5-05 05:56 조회1,6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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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모는 한때예요, 손맛은 평생”



심영순(74)씨는 본명보다 ‘옥수동 요리 선생님’으로 더 유명하다. 장·차관 부인이나 재력가의 며느리와 딸을 비롯해 그로부터 요리를 배운 제자의 수는 수천 명에 달한다. 그가 처음 요리를 배운 건 친정어머니로부터였다. 그러다 더 잘해 보고 싶은 욕심에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역 음식을 배웠다. 황혜성 등 이름난 요리연구가들도 찾아갔다. “인터뷰 시간이 너무 이른 게 미안해서 만들어왔지.” 이야기 할 수 있는 시간이 아침 시간뿐이라는 심씨를 만나려 오전 10시에 찾아간 기자에게 황기·오가피·인삼을 넣고 찐 편육을 권했다. 옆에서 남편 장영순(81)씨가 거들었다. “겉절이에 꼭 싸먹어. 나는 평생, 매끼를 이렇게 먹고 살았어. 내가 임금님보다 낫지?”

친정 어머니의 ‘음식대첩’
 
1960년 심씨와 장씨는 백년가약을 맺었다.
1940년 5월, 서울 신당동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아들 둘을 낳자마자 떠나 보낸 어머니는 딸아이가 반갑지 않았다. 홍수가 나서 집이 물에 잠겼던 날 어머니는 큰딸에게 “들어가서 이불이나 한 채 더 꺼내라”고 했다. 놀라서 뛰어들어간 큰언니가 동생를 업고 나왔다.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두 명의 언니들과 달리 심씨의 유년시절은 혹독했다.

“충청도 진사댁 고명딸이었던 어머니는 사람 부릴 줄도 알았고, 수완이 좋으셨지. 집에 세를 놓고, 월세를 받아 살림을 꾸려서 형편은 늘 넉넉했어. 식모도 여럿이었고.” 하지만 심씨의 하루 일과는 주인댁 ‘아가씨’의 삶과 거리가 멀었다.

“세 살 때부터 콩나물에 물을 주고, 김장철이면 어머니 옆에 앉아 시키는 대로 고춧가루를 뿌렸어.” 심씨가 고등어를 구워 상에 올리면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걸 누가 먹니, 개나 갖다 줘라”라고 모질게 말했던 어머니다. 간을 못 맞추면 부엌에 가 다시 만들어온 나물 반찬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심씨는 그게 서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봐’ 생각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잔칫날이 되면 수십 명의 찬모가 대청마루에 둘러 앉아 전을 지지고, 고기를 재우고, 과일 청을 빚었다. 녹두 빈대떡, 생선전, 튀김… 뭐든 최소 한 광주리씩 만들었다. 어머니는 요리 솜씨가 대단했다. 당시 돈으로 20만원 하는 민어 한 마리를 짐꾼이 마당에 내려놓으면 어머니는 직접 배를 가르고, 회를 뜨고, 뼈를 발라냈다. 심씨는 어머니가 진두지휘하는 ‘음식대첩’ 현장을 가까이서 보고 자랐다. 잔치 후에는 일하는 사람, 동네 사람까지 불러 고루 나누어 먹게 했다. ‘대접을 받으려면 남을 대접하라’는 게 어머니의 철학이었다.

결혼 후에도 심씨의 고생은 여전했다. 효심이 지극한 남편은 월급을 아내가 아닌 어머니께 드렸다. 끼니 때마다 다섯 번 이상 밥상을 차렸다. 시아버지·시어머니·시누이·시동생·남편 상을 따로 내야 했다. “많이도 울었지. 어머니에게 하소연했더니 되레 나를 혼내시더라고. 무조건 희생하고 공경하라고 하셨어.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해 못하겠지만, 그때 나는 그게 맞는 줄 알았어. 지금 생각해보니 식모였지 뭐, 일 잘하는 식모.”

심씨의 남편은 평생을 공직자로 살았다. 강남구청을 포함해 서울 여러 구청에서 건설국장·시민국장 등을 거쳤다. 심씨는 남편의 청렴하고, 효심이 지극한 모습에 반해 결혼했다. 두 사람은 지금도 “당신이 너무 좋아”라는 애정 표현을 수시로 한다. 금슬 좋다고 소문이 난 부부다. 심씨가 남편 몰래 속삭였다. “얼굴과 몸매는 고작 몇 년이야. 내가 평생 남편 사랑을 독차지한 건, 음식 솜씨. 그거 하나였어.”

맵고 짠 한식에 실망하다 궁중음식 만나
 
임금에게 올렸던 수라상. 궁중 음식을 배운 심영순씨는 다양한 국가 행사에 참석해 수라상을 재현했다.


우연히 대접한 손님 입소문으로 요리수업 시작
어려운 궁중음식, 누구나 손쉽게 하도록 연구
정·재계 인사부터 일반인까지 수천 명 가르쳐



심씨가 요리 선생님의 길을 걷게 된 건 우연한 기회였다. 20대 초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자신의 집에 온 교인을 위해 식사를 대접했다. 심씨의 요리에 반한 그 교인의 입을 통해 요리를 잘한다는 소문이 났다. 근처 초등학교 어머니 교실에서 요리를 가르쳐 달라는 전화가 왔다. 그후 다른 학교에서도 요리 수업을 해달라는 요청이 이어졌다. 몇 번 해보니 제대로 가르쳐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처음에는 한식에 관심이 없었어. 매일 먹으니 특별할 게 없잖아. 오히려 서양 요리를 가르치면 반응이 좋길래 그쪽에 관심이 컸지.” 그녀는 요리학원에 등록해 일식·중식·서양식 요리를 3개월씩 배웠다. 한식도 5개월 배웠다. 하지만 “소시지 구이를 가르치는 정도”로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일식은 양이 적고 달지. 중식은 기름지고, 서양식은 향이 강한 편이라 매일 즐기기엔 무리가 있어. 어떤 요리도 흡족하지가 않았어.”

그녀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음식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부산·김해·영천·울산·경주… 맛있는 음식과 독특한 식재료가 나는 곳을 전부 찾아갔다. “한번은 전주에 갔지. 식당 십수 곳에서 비빔밥도 먹고, 한정식도 먹어봤어. 반찬은 스무 가지가 넘는데, 양념이 하나같이 빨갛고 달아서 다 같은 맛이라 실망했지. 하지만 지역별 식재료를 알게된 건 큰 수확이었어.”

실망감을 안고 돌아온 심씨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 건 궁중음식이었다. 당시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이자 조선왕조궁중음식 2대 기능보유자였던 고 황혜성씨가 매달 자택에서 발표회를 열었다. 심씨를 포함해 요리에 관심 있는 학생 5~6명이 모여 수업을 들었다. 황씨는 조선왕조 마지막 주방상궁 고 한희순씨에게 궁중 음식을 전수받았다. 『귀합총서』 『수운잡방』 등 조선 시대 음식 책을 연구해 현대식으로 편찬했다. 조선시대 요리책에는 재료의 양이 적혀 있지 않았다. 식재료와 조리 순서만 적어놨기 때문에 일반인이 따라할 수 없었다. 황씨는 계량법을 추가하고 조리법도 쉽게 수정했다.

 
2012년 핵 안보 정상회담 수라상 시연행사에서 찍은 심영순·장영순씨 부부와 장녀 장나겸씨의 기념 사진.


심씨는 황씨를 통해 음식은 맛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역사를 알고 나니 같은 음식도 새롭게 보였다.

“음식 문화가 가장 풍요로웠던 때는 여왕이 많았던 신라시대였어. 해산물과 야생 채소가 지척에 있는 자연환경도 한몫했지. 백제는 쌀이 풍족해 맛있는 술이 많았고, 고구려는 밀과 메밀이 많이 났던 나라야. 지역 음식의 뿌리, 왕실 음식의 기초를 배우며 한식과 진짜 친해졌지.”

심씨는 궁중음식과 역사 속 음식을 현대인이 조리하고 먹기 편하도록 연구하는 것, 그게 자신의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구절판, 삼선탕, 국화구좌(전골) 등 일반인이 집에서 하기 어려운 요리를 각색해 가정 요리로 변화시키는 노력을 꾸준히 했다.

1950년대 말 한식은 나라에서 장려하던 문화 사업의 일환이었다. 고 이승만 박사는 국내 유명 요리 연구가를 집무실에 불러 지령을 내렸다. 양념은 적고 보기에도 아름다운 한식을 만들라는 것. 이후 한식에 ‘장식’의 개념이 도입됐다. 당시에는 오징어에 빨강·파랑 물을 들이고, 꽃 모양으로 자른 채소로 반찬을 장식하는 걸 세련된 음식의 표본으로 여겼다.

심씨가 전하는 당시의 에피소드 한토막이다. 어느 사업가가 외국 손님을 초대하는 자리에 요리사를 불러 신선로를 만들게 했다. 실고추 한 타래, 파슬리 한 타래, 지단 한 타래를 얹은 무지개색 신선로가 나오자 손님들이 환호했다. 그 얘기를 전하며 심씨는 “실고추는 맵고, 파슬리는 향이 강한데 한 타래씩 넣으면 먹을 수가 없지. 보기 좋은 것에 치중하다 보니 음식 맛이라는 본연을 잊은 게야.” 

 


재력가 부부 이혼 막아준 요리 수업

70년대 말 서른 살 이후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요리 수업에 나섰다. 내로라하는 재력가의 며느리와 딸, 장·차관 부인과 대학총장 부인도 모두 이때 가르쳤다.

집으로 매일 다른 자동차가 그를 모셔가기 위해 왔다. 도요타·캐딜락 등 안 타 본 외제차가 없었다. 그때 번 돈으로 심씨는 이촌동에 있던 10평짜리 아파트를 팔고 현재의 동빙고동 집을 사서 헐고 다시 지었다. 집 수리비는 인세로 충당했다. 그녀의 ‘첫 책’이었던 오븐 부록 덕분에 넉넉한 인세가 입금됐던 것이다. “당시 빵 굽는 오븐이 유행이었어. 그 오븐을 사는 사람에게 주는 부록 요리책을 만들었지. 오븐이 너무 잘 팔려 인세로 집을 고친 셈이야.”

정·재계 인사들을 가르쳤지만 그녀는 기죽지 않고 행동했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를 보고 배운 덕이었다. 엄하고, 당당하게 말하고, 매사에 분명했다. 재벌들은 심씨의 그런 모습을 높이 샀다.

“재벌의 공통점이 있어. 경우가 바르고, 검소하다는 거지. 성북동 국제그룹 양정모 회장 댁은 내가 도착하면 교자상을 차려 점심 대접부터 했지. 반찬이 수십가지가 넘었어. 수업이 끝나면 대문까지 차를 타고 나가야 하는 거리인데도 꼭 따라 나와 배웅했어.”

심씨는 요리만 가르친 게 아니다. 수업 시간보다 오래 가정 상담을 해준 적도 여러 번이다. 직접 요리사로 일해주기도 했다.

“지방의 재력가 집안에 시집간 이가 있었어. 서울대 못 나왔다고, 친정이 가난하다고 시댁 식구들한테 구박받으며 살았지. 어느 날 시아버지가 700명 넘는 손님을 초대할테니 잔칫상을 차리라고 한 거야. 올 것이 왔구나, 사색이 되어 나에게 전화를 했어. 그날 행사 음식은 내가 다 만들어줬어. 며느리가 요리한 것처럼 꾸미고, 나는 일하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고. 그날 이후로 두고 두고 칭찬 받으며 지금도 이혼 안 하고 잘 살고 있다지.”

심씨는 한 재력가의 부인 얘기도 했다. “얼굴도, 몸매도 너무 예쁜데 남편이 거들떠도 안 보더래. 음식 얘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내게 수업을 들으러 왔지.” 부인은 열심히 요리를 배웠다. 그중 하나가 간장게장이었다. 다음 수업 때 부인이 행복한 표정으로 심씨에게 전했다. “남편이 간장게장 직접 만들었는지 물어봤어요. 선물하게 또 만들어달라고요.”


대를 이은 요리 연구의 길
 
‘옥수동 요리 연구원’에서 강의 중인 심영순씨.



2000년대엔 비법 양념 계량화…‘즙 선생’ 별명
“아쉬운 건 딱 한 가지, 어머니 음식이 그리워
하늘에서 내 음식 보면 누가 먹겠냐고 화낼 걸”



수업을 요청하는 사람이 늘어나자 심씨는 1988년 옥수동 극동아파트 상가에 요리 학원을 열었다. 지금까지 가르친 사람이 수천 명에 이른다. 여전히 연락하는 제자도 있고, 고인이 된 제자도 있다. 2000년에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추천사를 쓴 『최고의 우리 맛』을 출간했다. 같은 해에는 EBS ‘최고의 요리비결’에 출연해 그녀의 비밀 레시피와 양념장 만드는 법을 강의했다.

“이대·연대·서강대 여자 교수만 모아서 가르친 적이 있어. 다들 유학파에 한식이라고는 잘 몰랐지. 미국에서는 햄버거만 먹어도 흠이 안 됐는데, 한국에 오니까 남편들이 한식을 해달라고 조르더래. 바빠 죽겠는데 남편이 한식을 먹고 싶다니까 어쩔 수 없이 요리를 배우러 온 거야.”

한식의 기본인 양념을 만들기 위해서는 손이 많이 간다. 양념장 만들다가 준비 시간을 다 놓친다는 게 한식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2004년 그는 수년 간 연구해 자신이 만드는 양념을 계량화해서 ‘향신양념’이라는 상품을 개발했다. 무·배·마늘·양파·생강·대파 등 한식 양념장에 꼭 들어가는 채소와 과일을 모은 즙이었다. 서양음식을 위한 샐러리즙·당근즙·양파즙도 개발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즙 선생’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2013년에는 전국을 돌며 요리 대결을 벌이는 TV 프로그램 ‘한식대첩’에 심사위원으로 출연했다. 지난해 ‘한식대첩 시즌 2’를 거쳐 다음 달 ‘시즌 3’에도 나올 예정이다.

심씨의 네 딸 중 두 딸이 어머니의 재주를 물려 받았다. 큰딸 나겸(53)씨는 심씨의 요리 전수자이자 ‘옥수동 요리 연구원’ 부원장이다. 넷째 딸 윤정(44) 씨는 향신양념을 개발하고 연구하는 나베S&F의 대표다. 은주씨는 미국에서 8년, 윤정씨는 이탈리아에서 8년간 예술 공부를 했다. 먼 곳에 있는 딸들에게 안부 전화를 할 때마다 심씨의 첫 번째 인사는 “잘 먹었니?”였다.

“내 나이가 벌써 일흔넷이야. 남편과 사이 좋고, 아이들 잘 자랐고, 사람들 많이 가르쳤으니 아쉬울 게 없어. 한 가지, 어머니 음식이 그리워. 특히 편육을 잘하셨거든. 황기·오가피·매실·인삼 등 갖은 재료를 넣어 삶는 법도 어머니께 배웠지. 어릴 적 나는 이걸 행주에 싸서 바구니에 넣고 찬 우물에 담그는 담당이었어. 빨리 수축시켜야 단맛이 빠져 나오지 않거든. 그걸 명주고름처럼 얇고 빳빳하게 썰어주시면 김치든 채나물이든 아무거나 싸먹어도 다 맛있었어. 오늘 내가 만든 두꺼운 편육을 보면, 우리 어머니 하늘에서 화내실거야. 누가 먹겠느냐고.”
 
 
글=이영지 기자 lee.youngji@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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