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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한나의 우아한 비행] 퀘렌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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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 한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7-12-11 09:24 조회1,5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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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퀘렌시아 (Qurencia)로 데려갈게요.” J는 우리에게 퀘렌시아의 의미를 설명했다. 투우장 한쪽에는 사람들이 모르는 소의 피난처가 이있다고 한다. 투우사와 혈전을 벌이다가 지쳐 쓰러질때면 소는 그곳으로 달려가 숨을 고르고 다시 힘을 모은다. 그 자리를 스페인어로 퀘렌시아라 부른다.  

 

J는 자신의 피난처로 곧 우리를 데려간다는 계획에 신이났다. “퀘렌시아는 자기 자신에게 가장 정직해지는 곳에요, 나는 그 곳을 수백번은 갔어요.”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고, 아내와 헤어지는 상실의 시간을 보낸 그란걸 알기에 그 장소의 의미를 가늠해 볼수 있었다. 그와 같은 상실의 슬픔을 겪지 않았다 하더라도, 한국에서의 삶은 자주 공격적이고 위협적이여서 나의 통제 능력을 벗어난 상황들이 펼쳐진다. 그럴때마다 구석에 몰린 소처럼 공포스럽고 무력해진다. 안식은 불가피하다. 홀로 생각을 정리하고 몸을 추스리는 의식.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언제든 찾아갈 퀘렌시아를 그를 통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의 말을 가만히 듣던 몇몇이 각자의 의미있는 장소를 꺼내놓았다. 누구는 북한산 어느 바위를 말했다. 삶의 갈림길에 섰을때, 북한산을 찾아 한 바위에 누어 한 다짐. 그곳에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그에겐 참 특별한 바위였을것이다. 자연과 벗하며 살기로 한 다른이도 지리산 암자를 그렸다. 그곳에서 자신만의 숨을 쉬다오면 생각도 마음도 정리된다고 했다. 지인들의 특별한 장소가 애틋해지며 탐이났다. 나는 부암동의 박노해 시인의 라카페를 떠올렸다. 성곽길도 마주치고 초록에 둘려 쌓여 혼자 들러 가만히 앉아 있어도 자연스러운 곳. 시인의 글과 사진도 엿볼 수 있는 작은 전시회장도 있는 카페. 좋아하는 사람을 데려올까 하지만 대부분 혼자오고 싶은 비밀스러운 곳. 자신의 비밀장소를 공개해주는 J를 향한 고마운 마음은 이제 그의 은밀한 장소를 침범할 쾌감으로 이어졌다. 

 

J의 퀘렌시아는 북한산 산줄기가 이어지는 산등성이 어느 지점이었다. 북한산 하나만으로도 서울에 살고싶을 만큼 북한산은 아름다운 산이다. 몇개의 오르막을 지나 넓다란 바위 위에 섰다. 건너편엔 여러 봉우리들이 한장면처럼 나란히 솟았다. 가파른 바위 끝에 능숙하게 선 그가 말했다 “이곳에는 상처와 회복, 죽음과 삶, 살육자와 치유자가 있는 곳 같아요.” 그의 치열했던 시간과 갈등이 어렴풋이나마 전해졌다. 

 

비밀스런 퀘렌시아에 머물렀다고 어찌 마법처럼 힘이 불쑥 쏟고 복잡한 문제가 해결되겠는가. 잠시 현실에서 피해있고, 호흡을 가다듬고, 생각마져 잠시 미뤄 놓을 수 있는 곳이라 정해두고 오는 것일테다. 오르는 동안 아무도 마주치지 않을만큼 한적한 곳.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시간과 공간에서 각자는 아무말 없이 현존에 집중했다. 어둠이 내리기전에 내려오자며 일어서는데, 봉우리 사이로 지는 저녁해가 우리를 당겼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이 세상에 나 혼자인 것처럼, 아무 생각도 없는 것처럼. 그 순간만으로 충분한것 같은 착각마져 들었다. J의 퀘렌시아로의 침범. 아름다웠고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었다.  

 

그의 퀘렌시아를 소개받고 나만의 퀘렌시아를 몇개 더 발견하겠다며 뒤적거리다가 “진실한 자신이 될수 있는곳. 그곳이 바로 퀘렌시아이다. 나아가 언제 어디서나 진실한 자신이 될수 있다면, 싸움을 멈추고 평화로움 안에 머무를수 있다면, 이 세상 모든 곳이 퀘렌시아가 될수 있다”는 한 시인의 속삭임에 멈췄다. 

 

장소의 개념을 넘으면 퀘렌시아 같은 사람과 시간은 가까이에 있다. 맛있는 음식과 함께 나누는 벗들과의 유쾌한 대화, 잘 정돈된 집에서 홀로 누리는 느긋함, 작은 사람들이 들어오기전 고요한 교실에서 마시는 커피한잔. 일상에서, 내 세상 모든곳에서 본연의 내 자신에 가장 가까워지는 곳인 퀘렌시아를 세어본다. 가까이 혹은 뚝 떨어진 퀘렌시아에서의 공급은 분주한 삶에서 나를 구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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