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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예정원] 두드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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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민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8-06-02 00:53 조회1,2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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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자 / 캐나다 한국문협 

  

수상한 손님이 찾아왔다. 생면부지의 불청객, 두드러기다. 더러 소문을 듣기야 했지만 아무래도 이 작자는 엉큼한 데가 있는 것 같다. 밖에서 일을 보는 낮 동안에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다가, 혼자 있거나 한가하다 싶을 때, 하루 일을 마치고 자리에 들려 할 때, 슬금슬금 마수를 뻗어온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스멀스멀 옷 속으로 기어들어 와 이제부터 저하고만 상종하자 한다. 반갑지 않은 유혹, 적과 동침이다.

놈은 처음, 시계나 고무줄 자국 같은, 압박 부위에 선보이기 시작했다.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으면 어렵잖게 토벌할 수 있었으련만, 무관심 무저항으로 맞서려 했던 것이 사기만 높여준 꼴이 되었다. 밖에 나갔다 들어설 때 잠깐씩만 기척을 보이던 놈이 요즘엔 게릴라처럼 무시로 출몰한다. 내 등판을 캔버스 삼아 군데군데 지도를 그리고, 제가 무슨 광개토대왕이라고 영토 확장에 기염을 토한다. 멀쩡한 팔뚝 위에 구릉이 솟고 종아리를 따라 백두대간이 형성된다. 중부전선 비무장지대 안에 느닷없이 다도해가 떠오를 때도 있다. 참다 못한 내가 반격을 시도한다. 열에 들뜬 대지는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해저가 융기되고 화산이 폭발한다. 섬과 섬은 부풀어 대륙으로 이어지고 손 갈퀴 자국 따라 이랑이 굽이친다.

이 좋은 봄날, 왜 나는 이렇게 맹랑한 불한당과 신경전을 해야 한단 말인가. 잠잠하다 싶다가도 불쑥불쑥 공략해 오는 변덕스러운 화상 때문에 때 없이 신경이 과민해졌다. 살살 달래다 탁탁 쳐보다 피가 나도록 빡빡 긁는다. 잠깐의 쾌감, 다시 번지는 가려움. 악순환이다. 아무 곳에 집중할 수가 없다. 예기치 않은 춘투(春鬪)에 몸도 마음도 지쳐버렸다. 알레르기 체질도 아니고 무얼 잘못 먹은 기억도 없는데 멀쩡하던 몸이 왜 반란을 일으키는가.

경험자는 말한다. 상대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일단 점 찍은 대상은 괴롭힐 만큼 괴롭히고 나서야 못 이기는 척 퇴각을 할 거라고. 녀석은 혹시 환절기마다 저항력이 떨어지는 내 약점을 꿰뚫고 있을지 모른다. 꽃가루나 식품 첨가물, 집 먼지 합성물 같은 알 수 없는 신무기로 내 육신을 장악하고 영혼까지 철저하게 교란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왜 나란 말인가.

"두드러기가 왜 생긴 걸까요?” 아무래도 억울한 생각이 들어 처방전을 쓰고 있는 의사에게 물었다.

"모르지요" 대답이 짧다. 우문현답인가.

"원인이 확실치 않아요."

"원인을 모르고 치료할 수 있습니까?" 혀끝에 감긴 가시를 감지한 듯 의사가 픽, 웃으며 쳐다본다.

"세상 모든 병이 다 명쾌한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하나의 증상으로 발현되는 거지요. 어쨌거나 적이 오면 무찌르고, 피가 나면 지혈부터 해야지, 왜 싸움이 났는지 언제 다 따지시렵니까."

의사가 잠자코 처방전을 건넨다. 약은 약사가, 진료는 의사가 하니 환자는 돈만 내면 된다는 것인가. 주사실을 나오며 나는 엉덩이주사보다 더 따끔한, 의사의 일침(一針)을 생각한다. 해결책도 없이 머리만 복잡한 여자에게 의사는 덤으로 단순하게 사는 밥을 주입해 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왜 사는가. 왜 쓰는가. 왜 사람은 늙고 죽는가. 왜 우리는 그림자 없는 허무와 화해하지 못하고 사는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왜'가 아니고 '어떻게'일 터이지만 나는 언제나 '왜'에 갇혀 제자리걸음을 걸으며 산다. 명약 비방 없는 고질병이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뜨거운 이름 가슴에 두면 왜 한숨이 나는 걸까. 왜 불러, 왜 불러, 돌아서서 가는 사람을 왜 불러… 현답이 없는 우문의 가사에 의사는 또 웃어 버리겠지만, 그 통속적 치기 앞에서도 나는 마음 놓고 가벼워지지 못한다. 모범답안 없는 질문 밑바닥엔 물음표가 아닌 느낌표가, 세상을 움직이는 어떤 비밀이 숨어 살고 있어서일까.

두드러기가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약이 잘 듣는 것 같다는 내 말에 의사가 시큰둥하게 대꾸한다. 왜 생겨나는지 알 수는 없어도 때가 되면 반드시 스러지는 것, 그것만은 분명 위안이라고. 그는 어쩌면 인생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왜 태어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가야 하는 것, 그것만이 명백한 진실이라고, 의사는 오늘도 묻지 마 그룹의 총수 같은 얼굴로 묵묵히 처방전을 건넬 것이다. 매미가 가을을 알지 못하고 하루살이가 내일을 모르고도 살듯, 대충 주섬주섬 살아내라고, 행간에 가만히 적어 놓을 것도 같다.

봄 꽃 이운 창가에 앉아 가뭇없이 떠나버린 불청객을 생각한다. 이유 없이 왔다가 예고 없이 사라지는, 삶도 순간의 신열일 따름인가. 발진처럼 돋았다가 자취 없이 스러지는, 소멸하는 시간의 불꽃일 뿐인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려움 뒤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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