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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예정원] 진정 오늘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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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종학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8-08-09 14:43 조회1,3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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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灘川 이종학 / 캐나다 한국문협 고문

 

한국에서는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병원과 세무서와 검찰청은 멀리 돌아가라고. 신상에 껄끄러운 기분이 드는 공공기관이기에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가까이하지 말라는 의중이 드러난다. 살아가는데 평상심을 자극하는 예민한 문제인 건강을 비롯한 세금과 사법에 관계된 일을 다루는 곳이다. 그렇다고 멀리할 수도 없으니 그야말로 불가근 불가원이다. 지난 연말에 나는 병원 문턱을 넘어서고 말았다. 그리고 암세포가 폐에 침투하여 간에까지 전이된 매우 공격적인 악성 종양을 찾아냈다. 나는 자신도 의아할 정도로 담담했다. 체념이다. 담당 의사는 항암치료를 받겠느냐고 묻는다. 지금 상태라면 지상에서 남은 시간은 3개월 이내지만, 항암 결과에 따라 1년 이상의 생명 연장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나는 고개를 조용히 흔들었다. 미수(米壽)를 바라보는 나이다. 수즉다욕(壽則多辱)이라니 애써 병원 신세를 지면서 더 살기를 바라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다. 인위적인 수명 연장은 원치 않는다. 병고에 부대끼는 고통과 자식들에 떠넘겨야 하는 온갖 병시중은 차마 못 할 짓이다. 미약한 바람에도 언제 꺼질지 모를 목숨 부지하겠다고 가족에게 부담을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가족이 반대하고 나섰다. 첨단의학이 고도의 발전을 구가하는 현대에 살자면, 병이 났을 때 의사의 의견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당연한 순리라는 주장이다. 수명은 하늘에 있어도 병을 다스려서 최선의 삶을 제공하는 의술과 사명은 전적으로 의사의 소관이다. 더구나 사회 보장제도가 잘된 캐나다에서는 무상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지 않은가. 국가도 국민의 건강을 맡아 염려하거늘 환자가 인술을 포기함은 자살 행위에 진배없다고 입을 모았다. 이렇게 해서 내 주장을 굽히고 항암에 들어갔다.

          

나는 오래 전부터 암에 경계심을 가졌었다. 내 누님과 동생이 암으로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난 터라 무관심할 수가 없었다. 예방 차원에서 우선 걷기운동부터 시작했다. 하루에 한 시각 정도, 어디든 가리지 않고 걸었다. 비나 눈이 방해하는 날은 쇼핑몰이나 아파트의 파킹 장을 돌았다. 여행지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언젠가 한국에 나갔다가 청국장 애호가들의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거기에서 암을 몰아내는 비장의 식이요법을 알았다. 청국장 가루에다 찐 마늘 가루, 계피가루를 섞어서 아침 공복에 장복하는 방법이다. 우리 부부가 이제껏 연만한 세수를 유지해 왔음이 이런 관심을 기울인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암이 찾아오다니 못내 섭섭하기는 하다. 하긴 필연은 우연처럼 온다고 하니 순응함이 마땅하다. 

 

항암제 주사 치료에 들어갔다. 3주 단위로 1회씩 4회에 걸쳐 정맥주사를 맞대 다음 주사 시술 전에 혈액검사와 X레이 촬영을 통해서 반응 정도를 관찰한다. 나는 한 번 주사 치료를 해봐서 효과가 신통치 않으면 항암을 중단하고 싶다고 담당 의사에게 당부했다. 항암제 주사는 1회에 약 3시간 걸린다. 의외로 편안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특이한 변화는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가 10일 뒤에 사단이 생겼다. 갑자기 혀가 굳어지면서 말이 헷갈리고 팔다리의 힘이 풀렸다. 나는 앰뷸런스 안에서야 말소리가 들리고 언어 장애도 어느 정도 회복된 듯했다. 죽는다는 것이 이런 거로구나. 병원에서는 백혈구 수치가 많이 떨어져서 생긴 건강 이상이라면서 입원하란다. 꼼짝없이 10일 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 식욕과 잠이 도망쳤다. 독서도 불가능하고 도무지 집중력이 엉망이었다. 바보 천치가 되었다는 두려움에 모골이 송연 했다. 내일 목숨이 다할지라도 책과 펜은 놓고 싶지 않았다. 

 

어렵사리 퇴원하고 나서 나는 다시 암 센터를 찾았다. 내심 항암을 중단하겠다는 각오였다. 그러나 X레이 검사 결과를 먼저 일별한 담당 의사가 의외의 말을 했다. 간과 폐에 자리 잡았던 종양의 위세가 많이 위축되었으니 항암을 계속하자고 한다. 의사인 자신도 신기할 정도라며 엄지손가락을 잔뜩 추켜세운다. 이렇게 해서 네 번의 항암제 주사와 재발할 경우 뇌로 전이하지 못하도록 예방차원으로 10회의 방사선 치료까지 마치고 3개월 후를 기다리는 중이다. 그 동안에도 백혈구와 혈소판 수치 부족으로 수혈(輸血)과 기타 약물 주입 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이 삶과 죽음에 대한 저서를 남겼다. 어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어떻게 죽어야 하나? 이런 글들은 지금도 쓰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쓰리리라. 누구나 반복할 수 없는 1회적 삶,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아야 하는 내 생명은 어디에서 왔으며 나의 삶에서 무엇이 남았는가? 스스로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시점에서 ‘오늘’이 유난히 절실해진다. 어제나 내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 더없이 소중해진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똑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 오늘 발을 담그고 있는 강물은 어제의 강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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