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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바다건너 글동네] 하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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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병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8-08-23 14:25 조회1,7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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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병호(한국문협 캐나다 밴쿠버지부)

 

 

       노인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초조히 걸터앉은 마루에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허리춤 높이 마루 아래 뚤방을 분주하게 왔다 갔다 했다. 뇌 신경세포가 줄면 뇌의 활동이 줄어드는 일반 노인은 아니었다. 노인의 아들 만기는 그날 오전, 먹이를 찾지도 암탉을 보지도 않는 닭장 안의 병 걸린 수탉처럼 뒤축을 반쯤 오려낸 검정 고무신을 신은 채 고개는 눈 없는 설산을 향했으나 뇌는 넋이 나간 채 앉아 있었다. 뙤약볕 내리쬐는 연한 황토색 마당은 여전히 고요했고 폭염의 사나운 기세를 꺾을 것 같은 큰바람을 몰고 올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내 잦아든 바람이 닭장 안의 닭털 몇 개를 변소가 있는 키 낮은 헛간 슬레이트 지붕 위로 흩날려 올리고 있었다.

 

 

털이 잘리기를 한두 번이 아닌 사나운 누렁이는 헛간 처마 아래서 혀를 길게 늘여 뜨려 드러누워 있다가 바람을 맞아 앞다리를 길게 뻗어 기지개를 켰다. 이 미친개 때문에 이웃들로부터 악마로 불려온 노파는 그녀의 누렁이가 달려 다니는 이웃집 아이들을 흙담 아래 개구멍으로 쏜살같이 빠져나가 물어뜯으면 개 등 털을 잘라 불에 꼬실려 까만 기름을 만들었다. 물린 상처에 발라주고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앞으로는 뛰어다니지 말라는 경고를 날리고 양철 대문을 닫고 들어가 버리기 위해서였다. 무쇠솥 아궁이가 딸린 부엌에는 수제비를 쑤다 만 반죽이 든 바가지와 아궁이에 반쯤 들어간 마른 솔잎 낙엽들이 그대로 뒹굴었다. 흡사 6.25 전쟁 때 저녁밥을 지을 무렵 젊은 아녀자들이 밥 짓다 말고 허겁지겁 야간 인민군을 피해 이불만 머리에 이고 산 굴로 피신한 것 같았다.

 

 

“왜 이리 안 오냐. 수제비에 넣을 풋고추 따러 함께 간지 알았는데, 먹구름이 몰려오네. 얼른 나가 찾아봐,” 노인이 속삭였다. “아비야, 장대비가 온다. 어서 데려와,” 미동도 하지 않는 큰아들, 만기를 향해 노인이 다그쳤다. “저 병든 장닭처럼 너새가 되었나 보네, 내가 나가 찾아오마,” 여전히 끄떡없이 산 송장처럼 앉아 있는 만기를 향해 내뱉고는 노인이 마른 흙 달라붙은 장화를 신고 헐렁한 월남치마 동여매고 대문을 나섰다. “제기랄, 알랑거리지 말라고 두어 번 말했을 때 가만히 입 닥치고 있었으면 별일 없었을 텐데,” 만기가 남이 알아듣지 못할 낮은 소리로 혼자 설산 아래 텀벙을 향해 중얼거렸다.

 

 

“우르르 꽝꽝!” 갑자기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시커먼 장대비가 무섭게 무섭게 마구 내렸다. “네 이놈 천벌을 받아야 싸,” 만기는 욱하는 성미를 고치지 못해 이 지경에 처한 자신을 저주하듯 성토했다. 하늘도 들판도 온통 새까맣게 뒤덮였으나 만기의 하늘은 노랗게 노랗게 물 들어갔다. 당장 달려가 그 작고 어린이 키 높이만 한 그 텀벙에 몸을 날리고 싶었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 살자고 맹세했던 때가 엊그제 같았다. “따라 죽고 싶어도 못해, 못 죽는다고 이 머저리야!” 아내가 죽은 것이 마치 위험 상황에서도 입을 닫지 못한 그녀 탓인 양 욕을 퍼부었다. 그 위험은 “입 못 닥치면 텀벙에서 나오지 못하게 할 거야.”라는 자신의 위협에서 비롯된 사실을 망각한듯했다.

 

 

“그래, 사람은 살리고 봐야 했어,” 만기가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자신이 자신의 경고를 철회하면 한 사람이 살지만, 아내가 결코 입을 닫지 못하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는 거야 멍청아….” 비는 여전히 하늘이 뚫리듯 쏟아붓고 있는데 뚫린 하늘길로 올라갈 길이 없는 만기가 비를 맞지 않아도 눈물이 빗물 되게 흐느끼며 자신에게 퍼부었다. 그때, “하이고, 어쩌면 좋냐, 큰일 났네,” 이웃이 들을까 아들이 들을까 속삭이며 노인이 대문을 들어섰다. “아범아 내가 처리할 테니 넌 묵묵히 나를 따라야 한다. 너에게 자초지종 얘기는 묻지 않으마. 함께 나가서 혼자 들어올 때부터 이상했다. 어미는 니 둘의 성격을 잘 안다. 그놈의 빌어먹을 지지 못하는 성격이 모두를 죽이는구나,” 노인이 비교적 차분하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지서 주임이 묻거든 너는 집에서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었고 텀벙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라,” 대화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지도 않다는 듯이 노인이 땅을 보고 말했다. 언제 내렸냐는 듯 갑자기 비가 그치고 다시 작열하는 태양 아래 지서 주임이 들어섰다. “죽은 사람은 입을 열지 않아요. 하지만 자연은 입을 열지요. 갑자기 불행한 일을 겪어 경황이 없으시겠지만, 사건은 사건이니 아침부터 있었던 일을 차분히 말씀해 주세요,” 평소 알고 지낸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모습 앞에서도 전혀 넋 나가지 않는 지서 주임이 냉정히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 밭에 가서 가지와 호박잎, 깻잎을 따고 왔더니 부엌에 아들은 아궁이에 불을 때고 며느리는 수제비를 쑤고 있길래 아침부터 수제비냐? 미리 알았으면 얼큰하게 매운 풋고추를 몇 개 따올 텐데. 라고 했더니 며느리가 휭 나가서, 밭에 고추 따러 가는 줄 알았는데 한참이 지나도 안 오고 먹구름이 몰려와도 안 오길래 나가봤더니…” 노인이 숨을 가다듬으며 지서 주임의 눈이 아닌 콧등을 바라보며 상황을 설명했다. “그런데, 함께 부엌에 있다가 한 사람이 나가서 안 들어오는데 남편은 궁금하지도 않았단 말인가? 시어머니가 찾으러 가게.” 지서 주임이 그렇지 않아도 어딘지 모르게 태도가 의심스러운 만기를 힐끗힐끗 살피며 물었다.

 

 

“만기가 찾아온다고 한 것을 내가 불은 때던 사람이 때야 한다고 하며 이 어미가 찾아온다고 했네,” 아들이 입을 절대 열지 않도록 노인이 얼른 대답했다. “혹시 부엌에서 부부싸움이라도 했었나요?” 지서 주임이 다시 만기 입과 눈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부부싸움 안 하는 부부가 어디 있을까만 우리 아들과 며느리는 이 못난 어미가 속상할까 봐 조용히 말다툼 정도로 밖에는 싸우지 않네. 하지만 오늘은 아들이 “노인에게 흰 쌀밥을 지어드려야지 아침부터 수제비냐고 언성을 높이며 어른 공경할지 모르는 사람과 한솥밥을 먹을 수 있겠느냐고 하니 며느리가 수제비 반죽이 든 바가지를 한번 솥뚜껑에 내리치고는 휭 바람처럼 나가버렸다고 하네,” 노인이 진실처럼 응수했다.

 

 

“망자 머리카락과 텀벙 둘레 풀과 진흙이 쏠린 방향을 보니 텀벙에 빠져서 나오려고 하는 망자를 누군가가 못 나오게 머리를 계속 밀어 넣은 것 같던데,” 노련한 지서 주임이 스스로 죽은 것은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글씨~, 우리 며느리는 누구와 척지을 사람이 아닌데, 누가 그러했을까,” 불똥이 아들에게 튈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완벽히 감출 수 없는 노인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의심은 현장 검증을 하면 훤히 드러납니다. 범인을 꼭 잡아서 부인과 며느리 원한을 풀어드리겠습니다,” 지서 주임이 여전히 입을 열지 않고 멍한 상태로 있는 만기와 노인을 번갈아 보며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시간은 흐르면 어떤 사건은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어떤 사건은 치유되지 않는 상처가 된다. 태양은 지고 뜨고 하루하루 흘러간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하루만 지나면 삼일장을 치러야 한다. 현장검증이 끝나고 부검을 하니 마니 마을 사람들의 견해가 두 패로 갈렸다. 분명 살아 나오려고 발버둥치고 누군가는 밀어 넣으려고 했던 기록이 땅에 남아 있어도 한 편은 자살로 다른 한편은 타살로 믿었다. 현장을 샅샅이 조사한 지서 주임은 타살로 믿고 수상스러운 만기를 살인자로 의심했지만, 지역 신문에 영향을 받은 여론은 조용히 자살 사건으로 묻고 넘어가기를 바랬다. 죽은 여자의 친정 사람들이 몰려와서 현장도 시신도 보았지만 결국 그 사건은 자살로 합의되었고 두 번 죽이지 않기를 바란다는 친정 가족의 청원이 받아들여져 부검 없이 매장하기로 했다.

 

 

“아범아, 사건이 잘 해결되었으니 이제 그 욱하는 성격과 자존심을 절대 팔지 않겠다는 생각을 버려다오,” 지서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노인이 중얼거리며 가볍게 날아갈 듯이 걸었다. “세상에 여자는 많다. 절대로 니 성격을 버리지 못할 것 같으면 그 성격을 다 받아줄 여자를 구해라,” 노인이 연신 중얼거렸다. 자신을 닮아 자존심 세고, 미안, 감사라는 단어를 사용할 줄 모르는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를 죽이고도 그 성격을 쉽게 바꿀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은 노인이 조용히 마을에 들어섰다. “아범아, 너를 죽여 보복하겠다고 달려드는 사돈 식구들을 해결하느라 합의 대가로 논 절반을 떼줬다. 나머지 절반으로도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을 테니 이제 옛사람은 끊고 새 사람을 만나라. 늦기 전에 애도 낳고 나 죽기 전에 손주도 한번 안겨줘,” 겪어서는 안 될 사건이 다 해결되어 후련한지 노인이 가볍게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혼자 흥얼거렸다.

 

 

그런데 만기가 집에 없다. 어디에도 없다. 방, 부엌, 헛간, 변소, 장독대, 감나무 밑에도 없다. “만기야!, 우리 아들이 없어!” 다시 대문을 박차고 오던 길을 뛰어가면서 악마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마을 사람들이 찾아 나섰다. 만기가 잘 가는 대나무밭, 저수지 아래, 활정개 고개, 민재 다 뒤졌으나 찾지 못했다. 한 참 후 해가 저문 지 오래되어 어둠이 짙어질 즈음 마을 끝에 사는 호성 할매가 머리에 생선 바구니를 이고 나팔수처럼 소리 지르며 설산을 넘어 내려왔다. 마을에서 옥과 장을 보러 다니는 산길이었다. “설산 아래 오른쪽 봉우리 소나무에 웬 남자가 목매달았어, 나는 겁이 나서 쳐다볼 수가 없어, 누가 지서에 연락해 어서,” 호성 할매가 입가에 흰 거품을 품고 다그쳤다. “아이고, 악마는 어떻게 하나, 작은 아들은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데,” 사건의 내막을 점 칠 줄 아는 동네 아낙들이 입방아를 찌어댔다.

 

 

 “어미 돌볼 사람이 없어 절대로 죽지 않을지 알았는데,” 한마을에 사는 악마의 한 친척 아짐이 슬퍼했다. 또 한 참 후 까맣게 어두워진 밤, 만기네 처가 사람들이 지서 주임과 함께 왔다. “하이고 아이고, 우리 사위가 우리 딸을 혼자 보낼 수 없어 함께 갔구나, 이런 착한 사위가 세상에 어디 있어. 잘 가게 내 사위. 사돈은 우리가 잘 돌봐 드리겠네. 내 딸과 함께 이승에서 못다 한 삶을 저승에 가서 행복하게 살게나,” 죽은 사위의 회색 눈꺼풀을 쓰다듬어 내리며 악마 나이 또래인 만기의 장모가 슬피 울었다. 겉으로는 진실로 보였다. 그때 새벽에도 울지 않던 병든 수탉이 갑자기 길게 울더니 닭 우는 소리가 온 마을을 가득 채웠다. 미친개 누렁이도 자다 깨어 멍멍 짖었다. 개의 울음에 닭 울음이 섞여 새빨간 피로 물들인 석양 하늘이 출렁거렸다. 악마네 집 빗살무늬 창들이 희미한 호롱불에 깜빡 거리며 너울거렸다. 누런 창호지 사이로 노인의 흰 그림자가 천천히 미끄러져 내렸다.(coreits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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