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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예정원] 맛, 있거나 없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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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은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8-09-07 09:56 조회1,8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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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소 / 캐나다 한국문협 자문위원

 

   모든 가는 길에는 향기가 있다.

   길을 가면서 고개 들어 가슴에 하늘을 품는다. 먼 산 위에 걸린 양떼구름 분분히 흩어놓고, 여름 산봉우리에 미련 떠는 눈 뭉치도 빙수처럼 뽀드득 씹어 삼킨다. 때로 끝 간데없는 블루베리와 크랜베리 농장 사잇길에 예쁜 파랑 어치와 순간 스냅을 남기고 베리 꽃 속을 맴도는 꼬마쌍살벌 꼼짝 못 하게 셔터 스크랩한다. 하루하루, 아침마다 열리는 길이 마냥 달콤할 수는 없겠지만 나름대로 맛이 있으면 한다. 

 

   길을 달린다. 집 앞 골목을 서서히 빠져 나와 큰길에 나선다. 학교 앞 시속 30km를 지나 50, 60km, 구간마다 규정 속도를 지키며 달리는데 뒤에 오던 사람이 옆으로 비켜서는가 싶더니 어느새 앞으로 나아간다. 최고 속도 80km 고속도로를 90으로 달려본다. 짧게나마 뒤를 지키며 따라오던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 옆을 스치고 멀리 달아난다. 사라진 속도는 100km를 훌쩍 넘는 듯하다. 참 재미없고 멋쩍은 일상이다. 

   일주일에 몇 번씩 동쪽으로 난 길을 간다. 그 길을 꼭 가야 하는 것은 아닌데 대안이 없다는 어설픈 핑계를 대며 같은 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늘도 그 길을 간다. 길을 달려 새벽 강을 건너온 너와 나. 운동이라는 명분 하나로 함께 시간을 죽이는, 우리는 동아리로 묶여 서로 필요로 만나는 그저 그런 동료일 뿐인가. 모임을 위해 함께 가는 좁은 길에 바짝 앞 사람의 꼬리 물어뜯을 기세라 매번 억지 길을 터주어도 고맙다는 손 인사 한번 없다. 방금 떨쳐버린 꼬리는 누구의 것인지 알면서 시침 떼는 것인지, 아예 자기 가는 길 밖에는 관심 없는 것인지. 강산이 변할 만큼 더불어 가진 서로의 시간이 무색해진다.

   일상의 향기는 누구에게나 맛없고 지루하다. 익숙한 향기일수록 가꾸는 정성과 노력이 필요하고 싫증난 관계일수록 상투적인 행동에서 벗어나 관심과 배려를 더 해야 한다. 함부로 한 행동을 익숙해서 그랬다고 변명하고 싶겠지만 동료를 외면하듯 무심히 스쳐버릴 수는 없다. 아쉽다, 서로 마음을 다하면 깊고 따뜻한 향기가 피어나는 친구로 성숙할 수 있을 텐데. 찰랑대던 아침 윤슬이 프레이저강 다리 아래로 흩어진다. 반짝이던 잔물결은 강물 위로 떠나 보낸 미숙한 우리 시간처럼 차츰 사그라진다. 

   오랜 친구는 말한다. 나이 들수록 바깥 활동을 줄여야 한다고. 즐겁지 않은 자리는 피하라, 웃으며 만나기에도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가는 길이 허허롭다고 멈출 수는 없다. 세상이 재미있거나 없거나 세상 사는 맛이 있거나 없거나 우리는 계속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며 길을 가야 한다. 더욱 길 위에 얽힌 인연의 고리를 함부로 끊을 수는 없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타산적 관계라 해도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한다. 언제나 막다른 길의 최선은 지혜로운 마음으로부터 온다. 길 위에 가장 큰 힘은 마음의 지혜다. 

   ‘내심內心 외경外境’. 내심이 즐거우면 외경의 모든 것이 즐겁다. 마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바깥에서 찾고 그 외경이 다시 내심에 들어오므로 마음을 바로 깨치면 내심과 외경이 서로 환하게 통하여 세상 살아가는 일이 원만하다. 결국 마음이 허공이면 바깥의 쓸데없는 것이 경계를 넘어오지 못한다는 의미다.

 

   잠시, 카약으로 여름을 태우는 아이 따라 노를 젓는다. 노를 젓다가 머리 위 흰머리 독수리에 놀라 한가로운 새끼 오리 자맥질을 지켜보려니 가는 길이 느리고 느리다. 느릿느릿 가는 길은 멀리 국경 넘어 보이는 베이커산의 물소리, 바람 소리, 보이지 않는 숲의 속삭임까지 들린다. 맛깔스레 흐르는, 향기 나는 순간이다. 길 위의 모든 향기를 끌어안고 사는 일이 늘 이렇게 재미있을 수는 없지만 나름 재미있으면 한다. 삶이, 맛있거나 없거나 마음은 저 강물처럼 청정히 흘러야 한다. 강물처럼 흘러가는 마음은 순간이 영원임을 안다. 

   내심은 언제나 외경의 허물 벗어버리는 지혜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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