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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예정원] 텅 빈 버킷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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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은경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8-10-11 14:06 조회9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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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은경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버킷 리스트는 죽기 전에 꼭 해 보고 싶은 일이나 보고 싶은 것들을 적은 목록이다. ‘죽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속어인 ‘킥 더 버킷(Kick the bucket)’에서 유래된 말인데, 중세 시대 교수형을 시행할 때 올라가는 양동이를 걷어차므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장면을 떠올리면 그 의미가 쉽게 다가온다. 누구도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지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숙명이다. 그래서 죽음을 떠올리면 유한한 삶을 어떻게 하면 후회 없이 살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꿈 많고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 나는 철학자라도 되는 양 내가 누구인지, 인간에게 허락된 삶이 무엇이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며 생의 첫 버킷 리스트를 채워나갔다. 그때는 인생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고, 인생에 대한 모든 선택권은 나에게 있다고 자신했기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일들을 적을 수 있었다.

 

버킷 리스트에는 내가 바라는 일들이 일련번호를 달고 줄을 섰다. 대학 캠퍼스에서 짜장면 시켜 먹기, 혼자 조조 영화 보기, 인사동에 있는 카페 ‘귀천’ 가기, 한 달에 한 권씩 시집 사기……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일들을 떠올리며 연필을 꼭꼭 눌러 적던 일이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유치하고 이기적인 욕망으로 가득한 버킷 리스트였는지 모른다. 누가 보자고 한다면 얼른 등 뒤로 감추어 버릴 만큼 가볍고 깊이가 없다. 운이 좋아서 죽기 전에 그 모든 것을 이룬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계절은 흐르고 꽃은 그 계절을 따라 피고 지기를 반복했고 나는 어느덧 마흔을 훌쩍 넘겼다. 새삼 지난날을 돌아보며 앞으로 살아갈 날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그리고 하얀색 종이 한 장을 펼쳤다. 몸과 마음이 미성숙했던 시절, 줄을 세워 적었던 버킷 리스트가 부끄럽다면 나는 지금 무엇으로 그것을 대체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거침없이 적어 나가던 그때와 달리 나는 그 어느 것도 선뜻 적지 못하고 흰 종이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영국에서 벌인 설문 조사에서 50세가 되기 전에 꼭 해봐야 하는 버킷 리스트를 공개했다. 인생의 선배들은 후회 없이 살려면 집을 사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라고 말했다. 외국어를 배우고,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오로라를 보러 가라고…… 소설을 써보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가라고…... 돌이켜보니 그들이 말하는 상당 부분을 나는 이미 이루었고, 현재 진행 중이다. 알 수 없는 인생을 살면서 자신이 바라는 일들을 하나하나 이루어 나가는 것은 나름 보람되고 행복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서는 다른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들을 다 해 보았다고 해서 네 삶에 후회가 없을까?’ 무엇을 하면서 성취감을 맛보고, 한때 황홀감을 느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이 정해놓은 수많은 목표 중 하나를 성취한 것에 불과할 뿐 삶을 바꿀 만큼 대단한 것도, 그다지 남을 이롭게 하는 것도 아니었다. 

 

실패와 방황을 거듭하며 아팠던 젊은 날의 격정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하라고 등을 떠민다. 텅 빈 버킷 리스트를 앞에 두고 아무것도 채울 수 없는 이유는 어떤 행위와 업적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는 자체가 어리석다는 생각에서이다. 사람은 누구나 목적에 따라 행동하고, 그 목적에 비추어 가치를 판단하기 마련인데 목적을 상실한 채 내세우기 좋은 행위만을 강조하는 것은 모순 그 자체이다. 헛되고 이기적인 욕망으로 채운 버킷 리스트는 성숙하지 못한 자아가 생산해낸 미숙아에 불과했다. 나 자신과 삶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거듭하며 어떤 궁극 점에 닿기 전까지 나의 버킷 리스트는 비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세속에 얽매여 조바심을 불러일으키는 수많은 허상에 흔들리고, 그것들을 털어내기 위해 오늘도 잠잠히 가을 하늘을 올려다본다. 얼마나 더 나이를 먹고 애를 태워야 인생의 깊은 의미를 알고 저 푸른 하늘 위로 날아오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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