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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예정원] 11월 1일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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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의정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8-11-15 14:31 조회1,3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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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의정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11월 1일, 학교에 아이들을 데려다 주고 집으로 오는 길.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걷는 사람도, 풀벌레를 쪼아 먹는 새들도 보이지 않는 거리는 적막하기만 하다. 군데군데 버려진 호박들이 차 바퀴에 치여 이리저리 구르다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는 조각이 되어 있다. 주황빛 형체들, 애써 거리를 두고 피해 걷는다. 비 맞은 부서진 호박 덩어리들은 땅에 붙은 껌처럼 바닥과 한없이 가깝다. 곧게 발걸음을 옮긴다, 바지런히. 깨끗한, 내 집으로.

 

 10 월 31일 밤, 이곳은 다른 세상인 것처럼 반짝였다. 누구나 다 행복한 듯, 즐거운 듯. 음각한 호박들이 빛을 밝히며 모두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그렇게 거리의 주인이던 호박들이 비에 젖어 지금은 형체조차 보존치 못한다. 북적대던 거리, 조명, 화려한 장식들도 모두 이제는 빛을 잃어 흐리기만 하다. 마치 밤과 함께 새로운 세상이 되었다는 듯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지만, 제 것이 아니었던 듯하다. 지난밤 아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드나들던, 무섭게도 휘황찬란했던 집의 그것들이 모두 사라졌다. 마치 꿈처럼, 아니, 마치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나는 과연 같은 장소에 변함없이 존재하는가 문득 그 사실이 소스라치게 느껴진다. 짧은 밤사이 무엇이 달라졌고 무엇이 달라지지 않았기에, 이렇게나 낯설고 이렇게나 어색할까.

 

 심란한 마음으로 집으로 터덜터덜, 장화를 신지 않은 발이 물기를 털어내듯 걸어오는 길은 찰박거리는 물소리 외, 참으로 고요하다. 한 집, 두 집 지나며 어떤 집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하다. 어떤 집은 흔적을 채 지우지 못한 장식들 위로 비가 한참을 내린다. 유령이었으리라, 물 먹은 천 조각들이 무섭기보다는 애처롭다. 있어야 할 시간이 아닌, 장소가 아닌 곳에 있는 불청객처럼 우습고 안쓰럽다. 무서우나 찡그린 얼굴이 고통 어린 호소처럼 보인다. 자신의 시공간을 다 보내버린, 자신의 쓸모를 다 했다는 사실을 아는 듯, 그렇게.

 

 나의 집 앞, 줄지어 늘여놓은 호박들이 걸어 들어오는 나를 맞는다. 어떤 것은 웃고, 또 어떤 것은 이를 드러내 겁을 주려는 듯하다. 나무에 걸어둔 것들이, 입구를 환하게 빛내던 것들이 모두 무가치하기만 하다. 아주 잠깐 좀 더 두고 보아야지 했던 것이 후회된다. 12시를 넘기며 바로 치울걸. 잠깐 넘겨 그 생을 늘인 것들이 이렇게나 이것들을 외로이, 혹은 불쌍히 만들어버린 듯하다. 있어야 할 곳, 있어야 할 때를 안다는 것은 얼마나 그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가. 문득 그런 마음이 들었다. 

 

비를 맞으며 호박을 들어 하나씩 초록색 통에 던져 넣었다. 얼굴을 잡고 인사하듯 눈을 마주치는 듯 한번씩 잠시 잠깐씩 쳐다보며. 10월 31일이 오기 전, 설렘에 들떠, 즐거움을 그리며 아이들과 하나씩 새기던 일을 기억해냈다. 표정이 생길 때마다, 생명력이 생기는 듯, 반기며 기뻐하며. 단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참으로 허무하게도 인사조차 없이 보낼 수 없다는 듯. 시간을 들여 천천히 그렇게 이별을 고하듯 보냈다. 그리고 나의 시간과, 나의 공간에 나를 욱여 넣어본다. 버려지는 호박들이 나의 모습이 아니기를, 오늘을 채우리라. 내일은 무가치해질 지, 혹은 그 생을 다할지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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