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가 산책] 봄날의 기억 > LIFE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Vancouver
Temp Max: 7.98°C
Temp Min: 5.16°C


LIFE

문학 | [문학가 산책] 봄날의 기억

페이지 정보

작성자 유병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3-14 12:29 조회1,426회 댓글0건

본문

 

 

 

 

                          bb5848de2562aab99d519592b6b62a0b_1552591769_7715.jpg유병수 / 시인. 소설가

 

 

 

 

 

유난히 추웠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창문을 열면 새 발자국처럼 떨어지는 햇빛은 겨우내 움츠렸던 내 얼굴을 간지럽히고, 아지랑이 스멀스멀 먼 기억 속을 걸어 나온다. 멀리 아 하면 아 하는, 오 하면 오하는 대기의 빈 공간 하나가 쿵, 무너질 때마다 내 마음의 억장도 쿵, 무너지는 것 같다.

 

봄이 왔다. 언제나 가난한 산동네의 봄은 부서진 연탄재처럼 얼기설기 모여 있어 봄이 와도 설 추워 보인다. 아주 혹독한 추위보다도 설 추운 것이 우리 살을 파고 에인다는 것을 어느 누구나 다 잘 알리라.

 

오전에 내리쬔 햇볕으로 땅이 질척질척해진 산동네 언덕을 우편배달부가 집을 찾고 있는 듯 오가며 두리번거린다. 요즈음도 봄이 왔다고 겨우내 무사했느냐고 봄 편지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당신의 별에도 봄이 왔다고, 조금은 촌스럽지만 꽃편지를 보내는 애인들이 있을까. 두리번거리던 우편배달부가 언덕길을 다 올라와 옆집에 우편 물 하나를 툭 던져 놓고 사라진다.

 

대기의 심연 속으로 빈 공간 하나가 무너진다. 저 살아 움직이는 모든 실체의 영혼들. 서로가 무의식이 되어 떠도는 과거와 과거의 수많은 목소리들 입김들 기억들.

 

1700년대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세계는 존재와 존재, 단자와 단자들이 모호한 관계를 맺으며 서로 일치하고 상호작용하는 세계라고 말했다.

 

단자란, 힘과 작용을 실체화한 것으로서 영혼과 같이 역동적이며 정신적인 단순 실체다. 자연에는 이러한 정신적인 질서가 내재되어 있다. 불투명한 무의식의 고리가 이 세계의 모든 실체들을 재결합시킨다. 한 세기 후에 우주적 공감의 장소를 무의식에서 발굴해 낼 낭만주의 시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지 않은가?

 

봄 어느 날, 푸스스한 머리카락으로 햇빛 바라기를 하며 횡단보도 블록에 앉아 있었다. 하늘은 더없이 푸르렀고 햇빛은 분부셨다. 그때 건너편 신호등 불빛이 바뀌는 것이 보였다. 빨강, 파랑, 켜지며 바뀌는 것이 마치 삶의 이쪽과 저쪽을 구분 지어 주는 것 같았다. 춥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긴 겨울이 끝나고 따듯한 봄이 왔듯이 내가 살던 슬프고 어둡던 삶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을 나는 느꼈다. 녹슨 머리 위로 햇빛 환히 쏟아지던 봄날, 횡단보도를 건너 노란색 유치원복을 입은 아이들이 소풍을 가고 있었다. 그때 나는 거리에 앉아 마구 울었다.

 

겨우내 어디론가 사라졌던 거리의 천사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창밖으로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며 온몸으로 봄을 느낀다. 저 대기 속에 사라진 무수한 기억과 소리들과 기뻤던 것과 슬펐던 것들의 수많은 영혼들이 한데 섞여 쿵, 하고 무너진다. 정지되는 한 순간의 적막과 고요, 불현듯 목이 멘다. 산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살게 하는 것일까.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LIFE 목록

Total 1,071건 1 페이지
게시물 검색
회사소개 신문광고 & 온라인 광고: 604.544.5155 미디어킷 안내 개인정보처리방침 서비스이용약관 상단으로
주소 (Address) #338-4501 North Rd.Burnaby B.C V3N 4R7
Tel: 604 544 5155, E-mail: info@joongang.ca
Copyright © 밴쿠버 중앙일보 All rights reserved.
Developed by Vanple Netwroks Inc.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