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가 산책] 검정 고무장화 > LIFE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Vancouver
Temp Max: 9.05°C
Temp Min: 6.25°C


LIFE

문학 | [문학가 산책] 검정 고무장화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숙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3-21 15:23 조회1,594회 댓글0건

본문



            3ce6001d4c87e5bcae56574ec71a332b_1553206991_1929.jpg정숙인 / 수필가. 캐나다한인문학가협회

 

동쪽으로 난 거실 창으로 봄 햇살이 환히 들이비치는 아침 나절이었다. 한바탕 소란스러웠던 식구들의 배웅 후에 나른한 기운으로 소파에 드러 누웠던 나는 깜박 잠이 들었다가 슬며시 파고드는 한기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군가 바삐 빠져 나가며 열어 놓았던 현관문 사이로 서슬퍼런 꽃샘 바람이 넘나들고 있었다. 황급히 문을 닫고 돌아서니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신발들이 어지럽게 눈에 밟혀왔다. 그 중에서도 유독 눈길이 가는게 있었다. 작년 겨울 초입쯤 새로 장만한 딸아이의 장화였다. 겨울에 유독 비가 많이 내리는 밴쿠버에서 장화는 필수품이었다. 그것을 사면서 아이보다 내가 더 좋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장화의 안쪽은 두툼한 천이 덧대어 보온이 되었고 겉은 빗물에도 끄떡없는 방수 재질로 처리되어 있었다. 햇빛 찬란한 봄날에 장화는 마치 제 할 일을 못다한 양 한 쪽 구석에 시무룩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가만히 그것을들여다보고 있자니 아련한 향수가 내 안 깊숙이에서 피어올랐다. 유리창으로 투영되는 햇살 저 너머로 가슴에 살포시 유년의 무지개가 펼쳐졌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왼쪽 가슴에 하얀 손수건을 달고 다니던 얼굴 하얗고 말이 없던 아이, 그 아이는 곤하게 잠을 자다가도 함석지붕을 두들기는 빗소리가 들리면 여지 없이 자리에서 깨어 일어나 부옇게 동이 틀 때까지 걱정으로 다시는 잠들지 못하였다. 부석한 얼굴로 형제들과 어울려 등교 전의 소란스런 밥상 앞에서도 아이는 편히 밥숟갈을 뜨질 못하였다. 그 날 따라 특별히 계란 후라이가 나왔지만 머릿속은 온통 곤죽이 되어 있을 등교길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학교를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하는 길은 예전에 뽕밭이 있던 자리라 하였다. 그래서인지 그 땅은 맑은 날에도 밟는 자리마다 쑥쑥 내려앉곤 하였다. 특히 비가 오는 날이면 곤죽으로 뻘밭이 되어 오가는 아이들의 신발을 잡아먹곤 하였다. 등교길 한쪽으로는 끝없이 넓은 논들이 펼쳐져 있었고 다른 한 쪽은 커다란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그 개천은 평소에도 물살이 세어 방죽을 지나 다니는 아이들은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야, 학교 안가고 뭐하고 있냐?”책가방을 둘러멘 채 발끝으로 마당의 흙만 계속 파고 있자니 무섭게 어머니의 성화가 달려들었다. 마지못해 아이는 터벅터벅 느린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 야속하게도 오빠들은 늑장부린 동생을 놔두고 저희들끼리만 먼저 가버렸다. 논두렁이 시작되는 곳에 이르기도 전에 운동화는 이미 젖어버렸다. 작아져서 더 이상 신을 수 없게 된 운동화를 한 살 위의 오빠가 물려주었다. 그 낡은 운동화는 쏟아지는 세찬 비를 감당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만신창이로 곤죽이 된 흙더미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어 걸음을 떼놓을 때마다 양발을 붙잡고 늘어졌다. 마치 무서운 꿈속에서 누군가에 쫒기듯 힘겹게 떼어놓는 발걸음이 흡사 납덩이를 매단 듯 엄청나게 무거웠다. 겨우 어렵사리 한 발을 떼는데 갑자기 맨발만 허공으로 쑤욱 내달았다. 뒤를 돌아보니 벗겨진 운동화가 저만치 흙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허공에 매달렸던 발은 급기야 중심을 잃고 아이는 그대로 뻘밭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살이 부러진 우산은 거꾸로 뒤집혀 바람에 내동댕이쳐졌고 온몸은 세찬 비에 금세 젖어 버렸다. 진흙더미에 박힌 신발을 떼어내는데 자꾸만 발가락 사이로 누런 황토 흙이 간질거리며 비집고 올라왔다. 아이는 결국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부러진 우산과 벗겨진 신발, 새로 산 책가방과 신발주머니가 흙투성인채로 여기 저기 널려진 것도 충격이었지만 무엇보다 끔찍스러웠던것은 맨 발가락 사이로 비집고 올라오던 진흙뻘의 불쾌한 감촉이었다. 그것은 마치 알에서 깨어난 가느다란 새끼 뱀들이 서로 뒤엉켜 단단한 껍질을 뚫고 나오려는 듯 발 밑에서 연신 꿈틀대며 좁디 좁은 발가락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고 빠져나오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등교 시간이 훌쩍 지나버려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빗줄기는 여전히 세차게 내렸고 평소보다 배로 불어난 방죽 옆 개천에서는 누런 흙탕물이 아가리를 쳐들고 승천하는 이무기마냥 엄청난 물소리의 용트림과 함께 무서운 기세로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큰 소리로 엄마를 외치며 울던 아이는 뻘에 박힌 운동화 한 짝을 찾아 손에 쥐고 나동그라진 것들을 주섬주섬 챙겨 왔던 길을 울며 불며 내달아 집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열을 펄펄 내며 며칠을 호되게 앓아 누웠다. 그런 아이의 발치에 낡은 고무장화 한 켤레가 얌전히 놓여져 아이와 함께 병상을 지켰다. 이불 귀퉁이로 빠져 나온 아이의 발에 비하면 장화는 엄청나게 컸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장화가 발에 맞기을 기다리던 아이의 큰오빠가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아이의 오빠는 비가 와도 그걸 신고 얼마든지 학교에 갈 수 있다고 아픈 여동생에게말해주었다. 그 말이 효험이 되어 아이는 정말 기운을 차리고 거뜬히 병상에서 일어났다.

 

나의 생애에 유일했던 검정 고무장화, 비록 낡고 볼품없던 너무나 커서 신을 수 없었던 아버지의 헌 장화였지만 그 장화를 곁에 두고 바라보며 크는 내내 든든하고 뿌듯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사건이 있은 뒤로 걱정이 많았던 아이는 더 이상 비오는 날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아무리 세찬 장대비가 내려도 오빠들과 씩씩하게 떠들며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혼자만의 요술 장화를 간직한 듯 나는 아버지의 장화를 신발장에서 이따금씩 꺼내어 만져보며 큰 위로를 받았다. 빛바랜 검정색의 낡은 장화는 요술램프에 들어있는 지니처럼 유년 시절 내내 어린 소녀에게 용기를 주었고 꿈과 희망을 안겨다주었다. 화창한 봄날, 현관문을 뚫고 투영되는 햇살 아래로 아버지의커다란 검정 장화를 가슴에 품은 아이 하나가 오빠들과 행복하게 콧노래를 부르며 밟는 자리마다 쑥쑥 내려앉는 곤죽의 땅을 거침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 아이의 동그란 뺨 위로 봄날의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LIFE 목록

Total 5,739건 1 페이지
게시물 검색
회사소개 신문광고 & 온라인 광고: 604.544.5155 미디어킷 안내 개인정보처리방침 서비스이용약관 상단으로
주소 (Address) #338-4501 North Rd.Burnaby B.C V3N 4R7
Tel: 604 544 5155, E-mail: info@joongang.ca
Copyright © 밴쿠버 중앙일보 All rights reserved.
Developed by Vanple Netwroks Inc.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