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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예정원] 내 생의 첫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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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은경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4-25 16:08 조회1,3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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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de26ea7796cf5a60770d99b04898f5b_1556233700_4713.png권은경 / 캐나가 한국문협 회원

 

 초록색 휘핑크림에 무지개색 스프링클스가 뿌려진 컵케이크를 건네는 아이의 얼굴이 밝게 빛났다. “이거는 선생님 거에요.” 컵케이크를 받아 들고 오늘이 아이의 생일일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오늘이 네 생일이니?” 하고 물으니 그는 아니라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이 봄이 시작되는 첫날이래요. 그래서 축하하려고요.” 그러고 보니 어느새 봄은 아주 가까이에 와 있었다. 봄을 품고 있는 컵케이크 하나를 아이들과 나누어 먹으며 나는 그렇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내 생의 첫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봄은 새 생명의 부활을 알리는 기쁨과 희망의 계절이다.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어 온기를 느낄 수 없는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것도 어쩜 잃어버린 생명을 되살리는 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겨울의 혹독한 추위 앞에 홀로 서 있을 때면 봄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막연하게 느껴져서 과연 현실 속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봄, 그 봄을 가슴에 안고 감격하는 이유는 겨울을 견뎌냈다는 안도와 생존을 위해 눈물을 먹으면서도 성장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공부는 만만치 않았다. 낯선 언어로 토론을 하고 에세이를 쓰고, 실습을 병행해야 했다. 내 나라를 떠나온 이후로 자꾸만 작아지는 자아를 어떻게 든 다시 세워보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도전이었지만 나는 점점 더 작아지는 것만 같았다.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면서 느꼈던 막막함이란…. 중세의 오래된 성 앞에 서서 넘을 수 없는 높디높은 벽을 올려다보는 기분이랄까? 여름부터 시작된 나의 겨울은 깊은 인내와 기다림을 요구하며 차디찬 눈을 뿌렸다.

 

운이 좋게도 얼마되지 않아 나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4, 5학년 초등학생과 함께하는 일이었다. 출석부를 받아 들고 스무 명이 넘는 아이들의 이름을 살펴보았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낯선 이름들이 빼곡하게 줄지어 서 있었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새로 온 선생님을 바라보는 수많은 눈동자가 무섭게 반짝였다.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익히는 일조차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학교 시스템, 문화, 놀이, 그들이 즐겨 먹는 간식조차도 내게는 생소했다. 의연한 선생님의 모습을 갖추고 싶었지만, 생각과 달리 나는 아주 서툴렀다. 타국에서 접한 사회는 곳곳에 위험이 가득한 정글과 다름없었다. 돌아보니 직장 생활의 첫걸음마를 시작하며 전전긍긍하던 순간에도 나는 아이들과 많은 것을 함께하며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을에 주운 솔방울을 물감으로 색칠해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했고, 눈 덮인 운동장에 누워 천사를 만들고, 산처럼 쌓인 눈 언덕 위에서 썰매도 탔다. 푸른 잔디가 고개를 든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이름도 낯설던 게임들을 하며 뛰어놀다 보니 어느새 봄이었다.

 

아이들은 봄을 맞이하며 축제를 열고 싶어 했다. 봄 축제를 알리는 포스터를 만들어 붙이고 초대장을 이웃 학교에 보냈다. 삼삼오오 팀을 나누어 게임을 준비하고, 축제에 빠질 수 없는 팝콘과 솜사탕도 마련하기로 했다. 그들은 운동장에 모여 각자의 자리를 표시하고 맡은 역할을 잘 해낼 수 있도록 서로를 독려했다. 평소에 애를 먹이던 개구쟁이들 얼굴로 축제의 설렘과 호기심이 햇살에 빛나는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찬란한 봄볕 아래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돌면서 콧마루가 시큰해졌다. 봄은 얼음을 걷어내 듯 세상사에 찌들어 꽁꽁 언 사람의 빈궁한 마음조차도 그렇게 녹이고 있었다. 

 

공놀이를 하자며 불쑥 얼굴을 내민 주근깨 투성이 사내아이를 보며 겨울잠에서 깨어나듯 지난날의 생각을 더듬는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편, 그가 던진 노란색 공을 두 팔로 받으며 나는 새롭게 찾아온 봄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있는 주체적 자아를 발견했다. 봄빛이 깃들어 삶을 환하게 채운 지금, 나는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를 울려 다시 찾아온 인생의 봄을 자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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