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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예정원] 팔자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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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성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5-10 09:22 조회1,3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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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e749926a7445baa892326827ca25c_1557505357_0889.jpg정성화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가져가야 할 짐들을 거실 가득히 늘어놓은 채, 남편은 가방에 

짐을 챙겨 넣고 있다. 그가 짐 싸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가 다

시 떠난다는 게 실감난다. 가방의 지퍼가 고장 났는지 닫히지 않

는다고 남편이 말한다. 그를 붙잡고 싶은 내 마음이 염력을 

부린 듯하다.

  남편은 파도치는 바다로 고생하러 가면서도 아내의 눈치를 본

다. 뭘 사다주면 좋겠느냐고 자꾸 묻는다. 대답 대신 고개를 흔드

는데 눈물이 또 주책을 부린다.

  냉장고 문을 열고 낮에 사온 고등어를 꺼낸다. 마음이 허둥댈

때는 무슨 일이라도 하고 있는 게 낫다. 고등어 배를 갈라 내장을

훑어내고 소금을 치면서, 내 속에도 누가 이렇게 소금을 쳐주었

으면 좋겠다 싶다. 속이 상하지 않게 한 움큼 뿌려주었으면.

  그가 떠난 지 일주일쯤 될 무렵이 가장 견디기 힘들다. 그리움

에 대한 항체가 생기려고 그러는지, 거실 한쪽에 앉아있던 햇살

몇 줄기도 이 공간의 적요를 견디기 힘든 지 엉덩이를 뒤로 빼

며 슬금슬금 빠져나간다. 한 나절이 지나도록 오는 이 하나 없고

걸려오는 전화 한 통 없는 날이면, 주방문을 열었을 때 간장병이

라도 하나쯤 넘어져 있기를 바라게 된다.

  해질 무렵이 더 쓸쓸하다. 누구나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며

맞이하는 시간이라서 그럴까. 나도 다른 아내들처럼 저녁상을 마

주하고 앉아 남편에게 이것 맛있지요 저것도 맛있지요 하며, 생

선살도 발라주며, 그렇게 오순도순 살아가고 싶다.

  이승에서의 삶이 전생의 엎을 갚기 위한 것이라면, 나의 전

생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마도 나는 전생에 나의 배우자를 무척 

기다리게 했던 모양이다. 나였더라면, 변방을 지키느라고 일 년

에 서너 번 밖에 고향에 갈 수 없는 졸병이었던지, 아니면 전국 방

방곡곡을 돌아다니는 보부상이었던지, 아니면 우국충정으로 만

주 벌판을 헤매고 다닌 독립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팔자(8)는 뒤집어도 같은 모양이며,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처

음 출발한 점으로 다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사람

의 팔자 또한 뒤집히지 않으며, 벗어나 보려고 애를 써도 벗어날

수 없는 게 아닐까.

  팔자(8)는 옆으로 누여보면 00모양이 되어 편안해 보인다. 그

런데 00는 수학에서 무한대를 의미하는 기호다. 나의 팔자를 모

로 뉘여서 행여 지금의 외로운 팔자로 무한히 이어지게 될까 봐

얼른 도로 세워놓는다. 숫자8을 보고 있으면, 길게 눕지도 못하

고 우두커니 앉아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느끼는 것도 아마 나의 쓸쓸함 때문일 것이다.

  편안하고 아늑하며 외롭지 않은 자리일 수는 없었을까. 그러나

철저하게 외롭다는 느낌이 들 때 나는 오히려 신의 눈길을 느낀

다. 시험지를 내주고는 뒷짐을 진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선생

님 같은, 신, 내가 마음에 쓰이는지 나의 등 뒤에서 꽤 오래 머물러

있는 신이다. 그래서였을가. 내 삶의 시험지 칸을 적당히 메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 무엇인가 더 채워 넣어야 한다는

생각이 봄풀처럼 돋아났다.

  내 속을 뚫고 삐죽이 튀어나오는 외로움과 아픔을 벼려줄 그

무엇이 있었으면 싶었다. 내 삶의 모서리를 공글려줄 그 무엇, 수

필은 내게 그런 의미로 다가왔다. 수수하면서도 단아해 보이고

온순하면서도 심지가 강한 여인, 반듯한 이마를 가진 어느 조

선의 여인 같은 이미지로, 수필에 귀를 대고 있으면 등을 토닥여 주

는 소리가, 마음을 씻어주는 소리가, 그리고 흐트러진 마음을 내

려치는 죽비 소리가 들려올 것 같았다.

  어느 판화가는 자신의 그림이, 두고두고 가까이 지내고 싶은 사

람들과 닮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의 글도 그랬으면 좋겠다. 떠올

리기만 해도 그냥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 볼 때마다 또 다른 나를

보는 듯이 느껴지는 사람, 손 흔들며 헤어질 때는 비질비질 눈물이

날 것 같은 사람과 닮았으면 좋겠다. 내게 있어 글쓰기란 쓸쓸함에

서 벗어나는 탈출구가 아니라, 넘어져 있는 간장병을 세워주는 것

에서 시작되고 부박한 삶들을 껴안는 게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가슴속에다 그리움으로 빚은 콩나물 시루를 하나 안쳐

두었다. 그 시루 위로 하루에도 몇 번씩 물을 붓는다. 때로는 조급

한 마음이 일어 한꺼번에 몇 바가지씩 퍼붓기도 한다. 어떤 콩 알

갱이는 눈을 뜨고 내다보는데 어떤 것은 야속하게 기척도 없다.

또 어떤 것은 순하게 싹을 내는데 어떤 것은 잔 발만 무성하다.

  나는 기다린다, 내 가슴속 콩나물 시루에 소복하게 콩나물이 자

라 오르기를. 그래서 어느 날 한 움큼 솎아낸 콩나물이 내 삶에 

아름다운 시가 되고 수필이 되기를.

  아, 기다림으로 이어지는 나의 팔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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