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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 [문학가 산책] 이 저녁 내 그림자가 불안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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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병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9-05-16 14:58 조회1,5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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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626aa9ea411150c51f17b869a68e535_1558043873_8173.jpg유병수/시인, 소설가 

 

 

 

일요일 저녁은 적막하다. 불현듯 삶의 모든 절망, 실의, 연민, 회의, 상처, 이런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바라보는 나뭇가지 사이 언뜻 언뜻 비치는 추억은 아프고 어두운 셀로판지를 덧껴 놓은 풍경 사진처럼 세상은 괴괴하다. 기우뚱 저무는 하늘 묵지룩한 구름 건물 창유리로 반사되는 역광 그리고 멀리 공룡의 발소리처럼 대기 전체에 웅웅거리고 있는 저 도시의 소음들.

 

세계는 나름대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데 그 한가운데 서서 정지해 버린 것 같은 일요일 저녁의 적막감은 온몸 전체를 공명감에 빠지게 한다. 그러면 내 몸은 지상에 있는데 넋은 아득히 먼 곳에 떠서 나와 풍경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그토록 친숙해 보였던 것들에 대한, 가깝게 느껴졌던 것들에 대한 거리감, 낯섬, 나는 안절부절못하고 불안에 빠진다. 그 불안하고 낯선 세계를 이어주는 저녁 찌개 끓이는 냄새, 밝음과 어둠을 연결시켜 주는 창문의 불빛들. 그러면 나는 다시 안정을 되찾고 창문의 불을 켠다. 그리고 조금은 낡아서 칙칙 거리기도 하는 전축을 켠다. 이럴 때 가장 어울리는 곡은 우울한 곡이다. 에릭 사티의 <집노페디> 쇼팽의 <발라드 4번> 시벨리우스의 <투오넬라의 백조>처럼 조용히 마음의 호수를 거닐어야 한다.

 

비로소 평온해지는 시간, 멀리 저마다의 지붕 아래 등불을 켠 창문들. 문을 열지 않고 꼭꼭 잠근 창문들. 저 창문 등불 속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국민학교 때 풍금을 쳐 주시던 이영숙 선생님 살아 계실까, 효정이, 현정이, 경희, 지금은 손주 보며 잘 살고 있을, 어렸을 때 보고 아직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국민학교 동창들. 그들이 살고 있을까 저 등불 속에는 집 떠난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도 있을까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위해 식사 때마다 밥 한 그릇씩 더 떠 놓는 어머니 있을까 그 등불 속으로 찾아가면 그들은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 반겨줄까.

 

어렸을 때 보아서 제목이 기억 나지는 않지만 텔레비전에서 본 영화가 생각 난다. 미국의 시골 마을에 사는 가난한 집안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멀리 돈을 벌러 갔다가 우연치 않게 사람을 죽이게 되어 죄를 지어 쫓기는 신세가 됐다.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아버지. 그는 보고 싶은 가족들이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 자신의 집까지 가 창문으로 그들을 바라보지만 들어가지 못하고 그냥 돌아간다. 쓸쓸한 저녁의 거리로.

 

그의 아버지는 죄의 대가로 사형을 당하고 그는 자신의 죽음을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았고 가족들은 언젠가 아버지가 돈 벌어 오실 날만 기다리고 있고... 그러던 어느 날 보고 싶은 가족 때문에 세상에 다시 태어났지만 전생에 죄를 지은 사람은 사람으로 태어날 수 없어 그는 들짐승으로 태어난다. 그리하여 보고 싶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달려가지만 가족들은 놀라 그를 쫓아 버린다. 멀리서 가족들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 그는 이제 그들의 아버지가 아니므로 돌아서서 자신이 새롭게 부딪쳐야 할 저 숙명의 추운 들판 속으로 사라진다.

 

이 저녁 나는 따뜻한 등불보다, 그 등불 속에서 어두워 보이지 않는 창밖의 들판을 잊고 사는 것보다, 춥지만 들판을 서성거리며 등불을 그리워하는 삶을 택했다. 그리하여 모든 불안과 회의와 연민과 절망이 나무껍질처럼 일어서는 저녁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턴테이블에 바늘을 올려놓는다. 저 거친 광야를 향하여, 바람 부는 거리를 배회할 쓸쓸한 영혼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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